경기 화성시청에 마련된 전지공장 화재 참사 관련 합동분향소에서 정명근 화성시장이 헌화하고 있다. 화성시 제공방글라데시 국적의 A(38)씨는 비전문취업비자(E9)로 한국에 온 이주노동자다. 13년 전 처음 입국해 대전과 경기 의정부, 포천 등지를 거쳐 3년 전 안성시에 있는 한 이동장치 제조공장으로 직장을 옮겨다니며 '코리안 드림'을 꿨지만,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근무한 지 몇 개월 지나지 않아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됐다. 고통을 호소해도 회사는 '괜찮다. 그 정도는 병원 안 가도 된다'는 말뿐이었다. 급기야 출근조차 못할 지경이 되면서 병원을 찾았다. 급성 간질성폐질환. 수술로 폐 일부를 절제하면서 폐기능 절반을 잃었다.
그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힘든 일들은 다 우리만 한다"고 서툰 한국어로 말했다. 직원이 80명 규모인 이 공장은 동남아시아와 중국, 러시아에서 온 외국인들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철근 절단이나 화학약품 처리 등 한국인 직원들이 맡지 않은 위험한 작업은 모두 이들 몫이었다. 한 중국인 동료는 운반작업을 하다 대형 철재 부품에 깔려 119에 실려간 뒤 1년 넘게 소식이 끊겼다.
위험 도사린 현장, 망가진 몸…인력시장서도 기피 사업장 떠돌아
A씨가 작업하던 공간은 늘 먼지와 매캐한 악취로 가득했다. 작업장 한쪽에는 항상 '케미컬(화학원료)' 통들이 놓여 있다고 했다. 일반 마스크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 방진 마스크라도 달라고 회사 측에 요구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는 입사 1년도 채 되지 않아 앓아 누웠고, 회사 기숙사 신세를 지게 됐다. 이마저도 사측이 방을 비워줄 것을 요구해 쫓겨날 위기에 처했었는데, 시민단체 도움으로 매달 100만 원씩 지원받아 숙식비를 지불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민간의 도움뿐, 공적 지원은 없었다.
24일 오전 10시 31분께 화재가 발생한 경기 화성시 서신면의 한 일차전지 제조 공장. 화성=황진환 기자일을 하지 못하게 된 A씨는 월급 200여만 원을 만회하려 인력시장에 뛰어들었다. 최근 화재가 난 화성시 내 아리셀 공장 사례처럼 인력센터 연락을 받아 위험한 작업장을 떠도는 아르바이트였다. 그는 "그냥 가라는 대로 간다"고 말했다.
그가 기대를 걸고 있는 건 산재보험이지만, 이 마지막 희망조차 '불가' 판정을 받았다. A씨는 "다른 사람들(사측 관계자 등) 말만 믿고 어려운 작업을 했던 걸 인정해주지 않았다"며 "노무사와 단체가 있어서 다시 (재심) 신청을 했다"고 더듬더듬 설명했다.
재심 결과를 기다리기도 불안하다. 4년 10개월. 취업 연장기한으로 고국에 다시 돌아가야 할 시점이 되면서, 그는 불법체류자로 전락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 A씨에게 외국인 18명을 포함한 23명의 사망자를 낸 화성 공장 화재는 언제 '내 일'이 될지 모를 참사다. 한국에 있는 동안 고향에 있던 부모님을 여읜 A씨는 "우리도 다 가족이 있고, 똑 같은 사람이다"라며 "안전하게 일하고 싶고, 다치면 좀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하소연했다.
외국인 직원 안전교육, 대응 메뉴얼도 없는 '불안한 작업장'
코리안 드림의 허상을 깨달은 건 A씨뿐만이 아니다.
고양시 가구 제조 공장에서 일하는 중국 국적의 B(61)씨는 지난 2019년 출근 첫날을 잊지 못한다. B씨는 안전교육 없이 나무를 절단하는 기계와 표면을 다듬는 그라인더의 작동법만 배우고 현장에 투입됐다. 동료들은 '일 하는 방법'을 알려줄 뿐 '안전 수칙'은 알려주지 않았다. 안전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기계에 손가락이 빨려 들어가 절단될 뻔한 위기도 있었다. 그라인더를 놓쳐 발등에 떨어진 적도 있었다. 기계 날에 손가락이 베이고, 살이 찢어지는 등 온몸에 상처가 남았지만, 나이 많은 자신을 받아줄 곳이 없어 버텨야만 했다.
고질병도 얻었다. 환풍기도 없이 작업을 하다 보니 마스크를 써도 하루 일과가 끝나면 코와 입 주변에 나무를 절단하면서 나온 톱밥과 먼지가 잔뜩 쌓인다.
B씨는 "공장에서 일을 시작한 이후로 하루도 기침이 끊긴 적이 없었다"며 "환기 좀 시키자고 사장님께 건의했지만, 민원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모든 창문을 닫고 일한다"고 토로했다.
부상을 견뎌낸 덕분에 지난해 '반장'이라는 위치에 올랐지만 허울뿐이었다. 같은해 중순 동료가 기계에서 나온 나무 파편에 얼굴 부분을 찔리는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B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단 한번도 사고 대응에 대해 배운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사장에게 사고를 알리는 게 전부였다.
그는 "동료가 다친 이후 내가 부상을 입으면 과연 누가 나를 챙겨줄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며 "아무리 고민을 해도 내가 조심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울먹였다.
고용허가제에 갇힌 이주노동자들…"한국인이 기피한 곳만 취업"
25일 경기 화성 일차전지 업체 아리셀 공장 화재 사고 현장에서 합동감식이 진행되고 있다. 화성=박종민 기자화성 전지공장 화재 참사를 계기로 열악한 노동환경에 내몰린 이주노동자 실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커지고 있다.
26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국내 산업현장에서 이주노동자들은 고용노동부나 인력센터 등으로부터 주로 내국인들이 기피하는 업종 중심으로 취업 알선을 받고 있다.
문제의 핵심은 차별이 전제된 '고용허가제'다. 당초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의 노동력만 제공하고, 이들의 국내 정착이나 한국사회로의 안정적인 진입은 제한하도록 설계됐다. 1990년대 이후 국내 경제수준이 급격히 향상되면서 사양업종인 이른바 3D(Dirty·Difficult·Dangerous)업종에 대한 내국인들의 취직 기피 현상이 발생했고, 이를 이주노동자로 메우려는 취지에서 도입됐기 때문이다.
실제 '외국인근로자의 고용 등에 관한 법률 시행규칙'을 보면 일정 기간(3일~7일) 내국인 노동자를 구하지 못한 조건 등을 기준으로 이주노동자를 채용하도록 규정돼 있다. 내국인 구직자를 구할 수 없는 사업장이어야 외국인을 채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구조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이 취업하는 주요업종은 노동환경이 열악하면서도 임금이 낮고 산업재해 위험성이 높은 소위 '몸 쓰는' 분야에만 집중되는 현실이다.
국내 체류 허용기간도 영주권 취득을 할 수 있는 기준인 5년에 조금 못 미치는 4년 10개월로 제한돼, 사업주 입장에서는 외국인들을 궂은 현장에 투입하면서도 비교적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구조인 셈이다.
이 때문에 이주노동자들은 산재 위험지대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는 처지다.
김달성 포천이주노동자센터 대표는 "고용허가제에 따라 한국인을 구하지 못해 외국인을 선발한다고 신청을 해야 이주노동자를 채용할 수 있다"며 "이로 인해 알선 받는 곳이 모두 3D 업종이고, 미등록 외국인들은 3D 중에서도 가장 혹독한 현장으로 보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내국인 꺼리는 뿌리산업에 몰린다…산재에는 '사각지대'
25일 오후 화성시 서신면 리튬전지 공장인 아리셀에서 박순관 에스코넥 대표가 23명의 사망자를 낸 사고가 발생한 것에 대해 고개숙여 사과하고 있다. 화성=박종민 기자이같은 실태는 통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고용노동부와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취업자 가운데 공식 집계된 이주노동자는 92만 3천 명으로 처음 90만 명을 넘어섰다. 지난해 전체 취업자 대비 3% 수준이지만, 국내 전체 산업재해 사망자(812명) 중 이주노동자 비율은 11%(85명)로 나타났다. 위험한 현장에서 일하다 숨진 외국인 비율이 국내 취업자 중 외국인 비율보다 3배 이상 높은 것으로, 해마다 비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특히 주물과 금형, 용접 등 국내 산업의 뿌리를 이루지만 내국인들이 종사하기 꺼리는 제조업에서 이주노동자 의존도가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난해 해당 업종에 종사한 전체 인원 73만 2천 명 중 외국인은 7만 명을 웃돌아 10%를 기록했다.
올해 정부가 산업계의 고질적인 인력난 극복을 위해 외국인 노동자 도입 규모를 대폭 확대하려는 방침도 우려를 더하는 대목이다. 정부는 E9 비자 형태의 이주노동자를 작년보다 40% 가까이 늘린 16만 5천 명 이상 입국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국노동연구원 하재준 선임연구위원은 "외국인 노동자 유치 필요성은 국내 노동시장에서 인력수급이 원활하지 않은 위험한 업무와 환경이 열악한 사업장이 늘어났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며 "이런 한국의 기업생태계 속에서 이주노동자들의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노력에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실제 산업현장에서는 외국인 산재 피해자들이 은폐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점도 문제다. 한국노동연구원에서 2021년 발표한 한국노동자 산재 은폐율 조사 결과에 따르면, 30인 이상 사업장 기준으로 66%로 나타났는데, 이주노동자들이 50인 이하 사업장에 몰려 있는 만큼 이보다는 은폐율이 더 높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사각지대에 가려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구제책 마련이 절실하다는 의견이 뒤따른다.
김달성 대표는 "이주노동자들은 제조업에 가장 많다. 위험과 죽음을 아웃소싱하는 외주화를 넘어 '이주화'로 심화되고 있다"며 "화성 화재 참사처럼 집단적 이주노동자의 사망은 흔한 상황은 아니지만, 그들이 한두 명 죽어나가고 신체 일부가 잘리는 원시적 산재들이 누적되면서 간헐적으로 큰 사고가 나는 게 아닐까 싶다"고 짚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