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윤상현, 나경원, 원희룡, 한동훈 당대표 후보가 2일 오전 서울 강서구 ASSA아트홀에서 열린 '체인지 5분 비전발표회'에서 정견 발표에 앞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국민의힘 7·23 전당대회가 눈살 찌푸리게 하는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됐다.
한동훈 후보가 과거 비상대책위원장 시절 김건희 여사가 보낸 문자를 무시했다는 이른바 '읽씹(메시지를 읽고 답장하지 않는 것)' 논란이 불거지더니 김 여사의 '사과 의도'가 있었는지 여부를 놓고 거친 공방으로 비화됐다. 채 상병 '조건부 찬성'에 따라 한 후보를 배신자로 규정한 데 이어 더 거친 공방에 불이 붙은 셈이다.
한 후보는 7일 자신에 대한 '사퇴 요구' 움직임을 '제2의 연판장 사태'로 규정하며 국면 전환을 시도했다. 그러자 '읽씹' 사실 외에 상당 부분 가려 있던 문자의 내용이 구체적으로 폭로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친윤계는 김 여사가 다섯 차례나 사과 의지를 담아 문자를 보냈는데, 한 후보가 모두 무시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 탓에 당이 총선에서 이길 수 있는 기회를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반면 한 후보는 사과 의지가 담긴 김 여사의 문자 내용 자체는 인정하면서도 일부 구절을 근거로 본래 뜻은 대국민 사과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을 드러냈던 문자라고 반박한다.
같은 문자 메시지 내용을 놓고 해석에 있어 공방을 벌이고 있는데, 전당대회의 본질과는 한참 벗어난 이슈에 여권(與圈)의 정치 자산을 허비하고 있다는 비판이 불가피하다.
대통령의 '당무 개입'이라는 여권에 치명적인 이슈를 끌어들여 야당에 공세의 빌미를 제공하는 '자책골' 정치를 펴고 있는가 하면, 그 같은 '당무 개입' 비판을 샀던 과거 '연판장' 사태를 비판하는 데 있어 연판장에 동참했던 의원들이 '내로남불' 식으로 나서는 촌극마저 벌어지고 있다.
"사과 의지 5번 무시" vs "사과 못 할 이유 나열, 진정성 못 봐"
한 후보는 이날 자신의 페이스북에 "선거관리위원을 포함한 일부 정치인들이 제가 사적 통로가 아니라 공적으로 사과요구를 했다는 이유로 연판장을 돌려 오늘 오후 후보 사퇴 요구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다"며 "여론 나쁘다고 놀라서 연판장 취소하지 말고 지난번처럼 그냥 하라"고 밝혔다.
전날 오후부터 일부 원외 당협위원장들이 '읽씹' 논란을 토대로 한 후보의 사퇴를 촉구하는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다른 당협위원장들에게 동참 여부를 묻는 연락을 돌렸는데, 이를 지난 전당대회 때 나경원 의원이 겪었던 사건에 빗대 '제2의 연판장' 사태로 규정한 것이다. 논란이 커지자 회견을 준비하던 일부 원외 당협위원장들은 이를 취소했다.
한 후보 측은 김 여사와의 메시지가 유출된지 채 하루도 되지 않아 당내 사퇴 요구 움직임까지 일사불란하게 일어나는 점을 근거로 친윤계 내지는 대통령실의 압력이 작용한다고 보는 분위기다. 한 후보 측은 이날 오후 기자단 공지를 통해 "'대통령실을 선거에 끌어들이는 일이 없도록 각별히 당부드린다'는 대통령실의 공식 입장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실을 당 대표 선거에 활용하려는 움직임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는 입장을 냈다.
반면, 친윤계에선 한 후보가 사과하겠다는 김 여사의 취지를 읽고도 무시했고 이 때문에 총선에 참패했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한 후보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특히, 김 여사가 한 후보에게 보냈다는 문자 내용을 두고 양측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리고 있다.
앞서 지난 4일 CBS 박재홍의 한판승부에서 CBS 김규완 논설실장은 총선 국면이던 지난 1월 '명품백 수수 의혹'에 휩싸였던 김 여사가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다'는 취지의 문자를 보냈지만, 한 후보가 이를 무시했다고 전했다.
김 논설실장에 따르면 김 여사가 지난 1월 18일과 21일 사이, 한 후보에 "몇 번이나 국민들께 사과를 하려고 했지만 대통령 후보 시절 사과를 했다가 오히려 지지율이 떨어진 기억이 있어 망설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에서 필요하다면 대국민 사과를 포함해 어떤 처분도 받아들이겠다. 사과를 하라면 하고 더한 것도 요청하시면 따르겠다"는 내용의 문자를 보냈다.
또 7일 채널A는 김 여사가 지난 1월 18~21일 사이에 보낸 문자를 포함해 총 5번의 메시지를 한 후보에게 보냈는데, 모두 답을 받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지난 1월 15일 김 여사는 한 후보에 명품백 논란 사과에 대해 "무조건 시키는 대로 하겠다"는 취지의 문자를 두 번 보냈고, 1월 19일에도 "비대위 차원에서 사과를 결정해주면 그 뜻을 따르겠다며 죄송하다"는 취지의 문자를 보냈다.
내용만 보면 사과를 하겠다는 의지가 강하게 담겨있지만, 한 후보 측 해석은 다르다. '19일 문자'의 내용 중 "사과하면 책임론에 불이 붙을 것"이란 전제가 깔려 있는데, "그럼에도 사과를 결정하면 따르겠다"고 했기 때문에 사과 의사가 아니라 사과 못할 의사를 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23일 문자'에 대해서도 친윤계는 김 여사가 사과에 대한 의지를 재차 강조하는 메시지를 냈다고 주장하지만, 한 후보 측은 역시 '그럼에도'라는 구절이 포함된 것을 강조하며 "(사과의) 진정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총선 참패 정당 맞나"…與 싸움판 전대에 터져나오는 '한숨'
국민의힘 한동훈 당대표 후보가 5일 오후 서울 여의도 중앙당사에서 열린 '미래를 위한 약속, 공정 경선 서약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양측이 김 여사가 보냈다는 문자 내용을 두고 서로 다른 해석을 내리며 책임 소재를 찾는데 집중하는 사이, 당 혁신을 위한 비전 제시 등 건설적인 논의는 사라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당 내부에선 "총선 참패한 당이 맞느냐"는 질타도 나왔다.
수도권의 한 원외 당협위원장은 CBS 노컷뉴스와 통화에서 "민생을 위해 정책 개발하고 주민 소통해야지, 5~6개월 전 문자를 무시했다 (안 했다) 가지고 싸우는 게 선거에 패배한 정당 맞느냐"고 꼬집었다.
특히 갈라져 싸우고 있는 두 세력은 한때 범(汎)친윤계라는 한 배를 탔던 인사들로 현재 갈등은 명분도, 실익도 없다는 측면에서 양비론적인 비판이 불가피하다. 지난해 친윤계 초선의원이 '윤심'을 이유로 나경원 당시 당 대표 후보를 낙마시켰던 이른바 '연판장' 사태가 있었다면 이번엔 당시 동참했던 인물들이 한 후보 측에 서서 '제2의 연판장' 사태를 비판하고 있다.
당권을 잡기 위한 이전투구 외에 별다른 정책적 쟁점도 없는 상황에서 오로지 '배신자', '문자 읽씹', '연판장' 같은 자극적인 키워드들이 전당대회의 모든 이슈를 빨아들이는 '블랙홀'이 되고 있다.
한 재선 의원은 "선거 패배에 대해 반성하는 척이라도 해야 하는 상황인데, 싸우기만 하고 있으니 당원들이 더 화가 난다"며 ""네거티브가 너무 심한 상황이라 당 선관위가 더 개입할 필요성이 크고, 부끄러우니 빨리 끝나기나 했으면 좋겠다"고 지적했다. 당 관계자도 "전당대회 끝나고 당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수준을 넘어갔다"며 분열 상황을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