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연 경기도지사가 지난 2022년 10월 '선감학원 아동 인권침해사건 진실규명 결정 발표 기자회견'에서 선감학원 피해자들에게 사과를 한 뒤 눈물을 훔치고 있다. 황진환 기자50여년 전 경기 수원역 대합실에서 형을 기다리다, 제복 입은 남성들에게 붙들려 선감도로 끌려갔던 이주성(65)씨. 그곳에서 당한 비참한 학대는 정신적 트라우마와 함께 고지혈증과 고혈압, 소화성궤양 등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지금도 약 없이는 잠조차 잘 수 없다.
변변한 직장을 갖기 어려워 생활고에 시달리던 그에게 4년 전 시작된 경기도의 선감학원 피해자 의료비 지원은 한 줄기 빛이었다. 매년 1인당 500만 원이라는 말에 한껏 들뜨기도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의료비 지원은 진료비에 한정됐다. 약값이 지원대상에서 빠진 것. 매달 경기도의료원을 다녀올 때마다 진료비 영수증에 찍힌 금액은 7천 원 정도에 불과했지만, 약값 10여만 원은 고스란히 이씨 몫이었다.
이씨는 "의료비 지원 한도 500만 원은 허울 뿐이다. 진료비로 받는 금액은 얼마 되지도 않고, 1년에 200만 원 가까운 약값은 한 푼도 지원이 안 된다"며 "의료비에서 약값을 뺄 이유나 규정도 없는데 왜 이렇게 지원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진료비보다 훨씬 비싼데…지원금에서 제외된 '약값'
경기도가 공권력으로부터 잔혹하게 인권을 유린당한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에 대해 의료비 지원을 해오고 있지만, 지원 대상에 약제비가 제외되면서 일부 피해자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9일 경기도에 따르면 도는 도내 거주하는 선감학원 피해자(150여 명 추산)들을 대상으로 지난 2020년 8월부터 도의료원 진료에 한해 연간 500만 원 한도의 의료비 지원을 해오고 있다.
이어 지난해부터는 도내 상급병원에서의 의료비도 최대 200만 원까지 추가 지급하는 방식으로 지원을 확대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과 김동연 경기도지사의 공식사과와 함께 이뤄진 조치였다.
문제는 경기도가 '의료비에 약값은 포함되지 않는다'며 보수적으로 판단하면서 발생했다.
'경기도 선감학원 사건 피해자 등 지원에 관한 조례'를 보면 의료실비 보상금 지급과 심리치료 및 의료지원 사업 등이 가능하다고 규정했을 뿐, 세부 지급 항목은 명시돼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해 도는 약제비를 제외해야 한다는 별도 규정은 없지만, 기존 취약계층에 대한 의료비 지원 사업에서도 약값은 포함되지 않는 등 형평성을 고려했다는 입장이다.
때문에 의약분업에서 제외돼 병원 안에서 약을 제조할 수 있는 정신과 약제비를 제외하고는 모든 약값을 피해자들이 자비로 부담해야 하는 처지다. 피해자들이 주로 앓고 있는 만성질환에 대한 고액의 약제비 부담은 여전히 클 수밖에 없다.
실제로 피해자 1인당 연간 의료비 지원금이 500만 원으로 책정돼 있지만, 지원 실적은 저조한 실정이다. 도의료원 기준 지난해 선감학원 피해자들에게 지급된 총 의료비는 8400만 원(질병 401건)으로 질병 1건당 20만 원에 그쳤다. 피해자 1명당 2~3가지 이상 질병을 앓고 있다는 점을 감안해도 연간 한도에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다.
또 다른 선감학원 피해자 조모(66)씨는 "고지혈증이 심해서 약을 끊을 수가 없는데, 도의료원 진료비는 얼마 안 나오지만 약값이 매달 10만 원 넘게 나간다"며 "조금이라도 아껴보려고 돈이 많이 드는 치과진료는 도의료원에서 받고 약값이 큰 질환은 동네 병원으로 간다"고 말했다.
조례에 따라 '도지사 의지'만 있으면 약값 지원 가능
선감학원 피해자 이모씨가 발굴 현장에서 발견된 친구의 유품을 만지며 오열하고 있다. 진실화해위 제공경기도는 선감학원 피해자 의료비 지원 사업을 신설하면서 '도의료원 취약계층 의료서비스 사업'에 선감학원 피해자들만 추가하는 방식으로 설계했다. 자연스럽게 '도의료원 취약계층 의료서비스 사업'에 빠져 있는 약제비 지원이 선감학원 피해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됐다.
하지만 선감학원 피해자 지원 조례는 피해자들에게 약제비 등 추가 지원을 할 수 있도록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
조례 제11조 3항에는 '지원사업의 구체적 범위, 절차 및 방법 등에 대해 필요한 사항은 도지사가 정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도지사의 의지만 있으면 약제비 지원이 아예 불가능하지 않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경기도 관계자는 "'법적으로 약제비 지원이 안 되는 게 아닌데 왜 안주냐'고 따지면 할 말은 없다"면서도 "어려운 여건 속에서 여러 지원을 해오고 있다. 현재 약제비 지원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했다.
"'최대한'의 지원이 도지사 뜻, 약값도 의료비에 포함해야"
지난 1970년대 선감학원 원생들의 모습. 선감역사박물관 제공
하지만 의료비 지원을 위해 편성된 예산이 목적에 맞춰 충분히 활용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정해진 한도 내에서 약제비도 지원해 피해자 지원의 취지를 살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경기도의회 이상원(국민의힘·고양7) 의원은 "도지사가 전면에 나서 피해자들에게 의료비를 지원하려 했으면 충분한 사업 효과가 나도록 노력해야 한다"며 "선감학원 피해자 의료비 지원 예산 집행률이 저조하다는 점에서 약제비 실비 지원은 시급해 보인다"고 주장했다.
김영배 선감학원아동피해대책협의회장도 "대부분 피해자들이 약값이 많이 나오는 질환을 앓고 있다"며 "이런 현실을 반영해 전향적으로 약제비까지 지원을 해주는 게 혜택을 제대로 주는 유일한 방법이다"라고 촉구했다.
앞서 김 지사는 지난해 2월 수원시 팔달구 옛 경기도청사로 자리를 옮긴 선감학원사건 피해자지원센터를 방문해 "신청자가 더 늘어나서 예산이 부족하면 더 확보할테니까 (경기도로) 많이 오셨으면 좋겠다"며 적극적인 지원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