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찬 광복회장. 광복회 제공독립유공자를 대표하는 광복회가 8.15 광복절 기념식 불참을 선언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져 귀추가 주목된다.
이종찬 광복회장은 10일 광복회학술원 주최 청년 특강에서 "정부가 근본적으로 1948년 건국절을 추구하려는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광복회는 광복절 행사에 나갈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앞서 광복회는 지난 8일 독립기념관장에 일제 식민지배를 합법화하는 뉴라이트 인사가 임명됐다고 비판하며 오는 14일 윤석열 대통령이 주재하는 영빈관 오찬에도 불참 방침을 통보했다.
광복회는 이어 대통령실 측에 독립기념관장 임명 철회 등을 촉구했지만 태도가 바뀌지 않자 결국 15일 광복절 행사에도 참석하지 않겠다는 강수를 뒀다.
이종찬 회장은 10일 특강에서 "용산에서, 보훈부에서 여러 회유책을 들어 행사에 참석하라는 회유가 왔으나 거절했다"고 저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러면서 "한국에 있는 (민족)반역자들이 일본 우익과 내통하여 오히려 전전(戰前‧태평양전쟁 이전) 일본과 같이 가고 있다는 위기감이 들어 이래서는 안 되겠다. 마지막 수단으로 결단한 것이 경축식 불참"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이 회장은 위기감의 근거로 현 정부의 '1948년 건국절' 추진을 들었다. 그는 "1948년 건국을 집요하게 갖고 가 전전 일본이 준 피해를 무조건 잊으라고 하는 것은 한일 국교정상화 이래 우리 정부가 견지해 온 '일제 식민지배 정당화는 안 된다'는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일"이라고 지적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광복절 경축사에서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운동"으로 규정해 광복회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반발을 불렀다.
광복회는 독립운동을 '이승만의 건국을 위한 준비운동'으로 정의함으로써 선열들의 해방 전 독립운동을 무력화하고, 일제 식민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이승만 대통령을 '건국대통령'으로 삼는 것에 힘을 실어줬다고 비판한다.
실제로 윤 대통령의 '독립운동=건국운동' 규정 이후 기존 이승만기념사업회는 '이승만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로 이름을 바꾸는 등 '건국대통령'을 명문화하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이는 2008년 이명박 정부가 광복절 행사를 '건국 60주년 행사'로 추진하려다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고, 2015년 박근혜 정부는 '식민지근대화론'을 담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추진하다 탄핵 여파로 무산된 것과 대비된다.
광복회가 현 정부의 반역사적 행태에 경고음을 울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 회장은 지난해 8월 육군사관학교 내 홍범도 장군 흉상 철거 논란이 벌어졌을 때 당시 이종섭 국방부 장관에게 퇴진을 충고하는 공개서한을 보냈다.
그럼에도 정부가 홍범도 흉상 철거 방침을 굽히지 않자 지난 5월에는 "4월 총선 민의를 거스르는 경악스럽고 비겁한 짓"이라며 차라리 흉상을 폭파하라고 초강경 태도를 취했다.
최근에는 정부가 한국학중앙연구원 이사장과 원장 등에 뉴라이트 인사를 임명하더니 독립기념관장 인사에서마저 같은 일이 벌어지자 경각심이 최고조에 달했다.
지난 7일 광복회 긴급 이사‧지부장 연석회의에선 "독립운동 세력을 약화, 분열시키고 민족혼을 빼는 일제시대 밀정 같은 일"(이 회장) 등의 격앙된 반응이 쏟아져 나왔다.
광복절 기념식이나 영빈관 행사 불참을 결정한 주요 이유 중 하나는 이런 분위기에서 참석할 경우 자칫 우발적인 불상사가 우려된다는 것이었다.
이종찬 회장은 지난 대선 국면에선 윤 대통령의 멘토로까지 불리는 가까운 사이였다. 1936년생으로 구순을 앞둔 원로이자 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해온 노정객의 지지는 윤 대통령에게 큰 힘이 됐을 것이다.
이 회장은 윤 대통령이 정치 참여를 선언한 곳이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임을 계기마다 언급하며 삿된 참모들을 멀리할 것을 촉구했지만 더는 기대를 접은 것으로 보인다.
'용산'이 반성보다는 오히려 회유에 나섰음을 공개하고 "일제시대 밀정"이나 "반역자들" 같은 날선 언어로 비판에 나선 점에서 볼 때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