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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대를 물린 동지 이범진과 이위종

    편집자 주

    제주CBS는 광복 79주년을 맞아 이준 열사의 구국운동을 소개한다. 이준 열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법률학교 1회 졸업생으로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취임했지만 윗사람들의 비행을 탄핵하다 면관됐다. 이후 기독교로 개종한 후 구국운동을 펼쳤다. 광복은 선열들의 뜨거운 독립운동을 통해 이뤄졌다. 독립운동가 후손인 이양재 선생의 기고를 통해 이준 열사가 펼쳤던 독립운동과 이 시대 광복의 의미를 찾아본다.

    [이준 열사와 그 동지들⑧]

    이범진과 이위종 부자. 이양재 제공이범진과 이위종 부자. 이양재 제공
    ▶ 글 싣는 순서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②이준 열사, 서재필과 입헌정치·공화정 추구
    ③신앙 동지 김구와 전덕기 목사
    ④게일 목사와 국민교육회 동지들
    ⑤동기동창이자 절친 함태영 목사
    ⑥황성기독교청년회 최대 후원자 민영환
    ⑦대를 이은 독립항쟁 동지
    ⑧대를 물린 동지 이범진과 이위종
    (계속)

    이준의 강직하고 끈질긴 못 말리는 성격은 그 시대에 정평이 났다. 그는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이듬해인 1896년 2월3일, 한성재판소 검사시보로 임명되었다가 상관과 충돌해 3월 6일 면직된다. 그 시기 2월29일부터 이듬해 8월8일까지 이범진은 제4대 법부대신을 지낸다. 이범진은 이준의 6일간 상관이었던 셈이다.
     
    그 때 이범진은 이준의 강직한 의지를 각인하며 이준의 항명을 수습한다. 그 둘은 단, 6일간 스쳐 지나간 것 같지만, 아니었다. 고종황제의 신임이 컸던 이범진은 헤이그 특사 파견의 한 주모자였다. 그는 자신의 아들 이위종(1887~1924경)을 함께 특사로 보낸다. 이준은 1907년 7월14일 헤이그에서 사망하는데, 당시 이위종은 이상설과 함께 장례를 치르고 미국과 유럽을 돌며 독립운동을 모색한다.
     
    가장 어린 헤이그 특사 이위종은 1905년 러시아 놀켄 남작의 딸 엘리자베타와 결혼하기 위하여 러시아 정교회로 개종한다. 그리고 러시아 국적을 얻어 독립운동가들을 합법적으로 도울 수 있었다. 1908년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으로부터 군자금 1만 루블을 받아 장인 놀켄 남작과 함께 연해주를 방문한다.
     
    연해주 한인사회에서 최재형과 전 간도관리사 이범윤(1863~?, 이범진의 형)을 중심으로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는데 이위종은 자금 지원과 함께 이 조직의 회장으로 중심적인 활약을 한다. '동의회'는 1906년부터 이용익과 이범진이 모의하여 조직하기로 한 독립운동단체로서 1908년 4월 안중근 등 87형제들이 최재형의 집에서 조직한 이후, 1909년10월26일 안중근의 이등박문 격살의 산실이 된다.
     
    1910년에는 이준의 아들 이종승(이용)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와서 권업회와 동의회에 가입하여 이상설과 이위종 최재형 등과 항쟁 동지가 된다. 이준(아들 이용)과 이범진(아들 이위종)은 대를 물려 항쟁 동지가 된 것이다.
     
    이범진은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을 위해 사용했다. 그는 고종황제에게 보내는 유서에서 "우리나라 대한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1911년1월13일, 그는 자결을 함으로써 최후의 항거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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