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감 예방 주사를 맞고 있는 어린이. (자료사진)
# 네 살배기 아이를 키우고 있는 김모(38·서울 은평구) 씨는 날씨가 싸늘해지자 독감 예방주사를 맞히러 동네 의원에 갔다 백신이 없다는 말을 듣고 발길을 돌렸다. 김 씨는 몇해 전에도 예방주사를 못 맞혀 아이가 독감에 걸려 고생했던 기억이 있다. 보건소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가는 곳마다 "당분간 백신이 들어오기 힘들다"는 말만 반복했다.
# 80살 정모 할머니(강원도 강릉)는 최근 무료 예방 접종 맞으러 보건소를 찾았다가 백신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예방접종 기간이 조금 지나서 백신이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나라에서 당연히 맞혀주는 줄 알고 안심했던 정 할머니는 유난히 춥다는 올 겨울을 앞두고 걱정거리가 하나 늘었다.
겨울이 코 앞으로 다가오고 있지만 독감 백신 품귀 현상이 해소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의사협회까지 나서서 제약회사에 협조를 보내고, 정부의 대책 마련을 촉구했지만 이미 물량을 공급할 시기를 놓쳤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독감 백신의 수요와 공급 불균형은 수년 간 반복돼 온 문제이다. 특히 올해는 백신 공급 절대량이 부족해 비상 상태지만 정부는 시장의 문제라며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 따르면 올 가을 출하 승인을 받은 독감 백신은 지난해 공급량 2213만도즈보다 20% 감소한 1,769만도즈다.
이렇다보니 일반 병, 의원 뿐 아니라 보건소에서도 유료접종 분량이 부족한 상태이다.
질병관리본부 김영택 과장은 "평상시보다 올해 공급량이 확 줄어든 것은 맞다. 수요 예측이 잘 안된 것 같다"면서 "정부가 65세 이상 노인 및 장애인 등 취약계층에 책임지는 절대량 이외에 민간 부분에 대해서는 시장 질서가 있기 때문에 깊숙히 개입하기는 힘들다"고 말했다.
독감 백신은 유정란에서 추출해 제작 기간이 오래 걸리는데다 2,3개월 안에 빠르게 소진되고 유통기한이 짧아 수요 공급을 맞추기 어려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어느 해에는 백신을 많이 만들었다가 버리고, 어느 해에는 백신 품귀 현상을 빚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성주 의원이 질병관리본부, 식품의약품안전처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최근 3년간 약 1천만명분, 700억원의 독감 백신이 폐기된 것으로 조사됐다.
재작년과 작년에도 각각 2천만명 분의 독감백신이 국내에 도입됐지만, 이 중 1/5인 400만명 분의 독감백신이 해마다 버려졌다.
이를 의식해서인지 제약회사들이 올해는 독감 백신 생산을 대폭 줄이면서 병, 의원 뿐 아니라 보건소에서도 품귀 현상이 빚어지게 됐다.
강릉보건소, 군산보건소 등 일부 보건소에서는 물량을 확보에 실패하면서 무료접종을 일찍 중단하는 일도 속출하고 있다.
때문에 정부가 백신 수급을 민간에만 의존하면서 국가 차원의 백신 수급 관리가 미흡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미국의 경우 백신 제조사에 재정 지원을 하면서 3~5년간 장기구매계약을 체결하여 백신주권을 확보하고 있다.
캐나다도 자국 내 생산 독감백신을 장기구매하고 있으며, 캐나다와 일본은 백신의 원재료가 되는 유정란의 연중 상시 공급을 지원하고 있다.
김성주 의원은 "백신 수급에 대한 모든 것을 민간에만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 정부는 안정된 백신수급을 논의할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