멕시코에서 꽤 성공한 한국인 기업의 젊은 차기 경영자가 살해된 사건이 교민사회를 뒤숭숭하게 만들고 있다.
특히 피해자가 금품을 노린 강도의 우발적인 범행에 희생된 것이 아니라 표적 살해됐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사업을 하는 교민들은 더욱 불안에 떨고 있다.
23일(현지시간) 멕시코 주재 한국대사관 관계자와 교민 등에 따르면 지난 21일밤 멕시코주 에카테펙의 상업용 비닐봉지 제조공장의 사무실에서 이 모(32)씨가 살해될 당시 친형과 사촌형이 함께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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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나이의 현지인으로 추정되는 범인은 친형에게 테이프로 이 씨의 손을 묶어 움직이지 못하게 한 뒤 머리에 총 한 방을 쏴 관통상을 입혀 숨지게 해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친형과 사촌형은 범인에 의해 밖으로 끌려나오다가 달아나 화를 모면했다고 현지 검찰에 진술했다.
사망한 이 씨는 이 공장 창업주의 작은아들로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공장 전반을 관리하면서 경영자 수업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씨의 친척이 사장을 맡아 현지인을 250명가량 고용한 이 공장은 멕시코주 상업용 봉지 시장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고 교민들은 전했다.
공장은 경비가 삼엄하고 외부인의 접근이 통제되는데도 권총을 소지한 범인이 잠입한 점에 비춰 '전문 킬러'의 소행일 것이라는 소문이 한인 사업가들 사이에 떠돌고 있다.
이 씨의 친형은 총성이 '퍽' 했다고 말했다.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사용했다면 전문적인 살인청부업자일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마약 갱단을 포함한 범죄 조직이 총기류를 쉽게 손에 넣을 수 있는 곳이 멕시코지만, 금품을 노린 단순 강도가 소음기가 달린 권총을 소지한 사례는 보지 못했다고 강도를 당한 한인 피해자들은 말했다.
출입구 등을 감시하는 폐쇄회로TV에 노출도 되지 않아 현지 고용인 등 내부인과의 결탁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한 한인 기업가는 "단순하게 돈만 노렸다면 그런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살해 표적이 됐을 수 있다"고 짐작했다.
멕시코에서 발생하는 범죄 유형을 감안하면 지역에서 '잘 나가는' 한인 사업체에 무서운 수법으로 겁을 주려는 현지 경쟁업체의 소행일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이 기업가는 나름대로 추정했다.
한인 사회에서는 이 공장이 지역에서 10여 년 넘게 운영되면서 창업주와 친인척들이 꽤 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10여년 넘게 또는 20년 가까이 멕시코에서 사업을 벌여 터전을 잡은 일부 교민 사업가는 이번 사건이 '남의 일 같지가 않다'는 심정을 토로했다.
22일 밤 수도 멕시코시티에 마련된 장례식장에서는 한인 사업가들이 삼삼오오 모여 유가족들을 위로했지만 자신의 앞날도 걱정스럽다는 표정들을 지었다.
표적 살해 의혹이 짙은 사건은 이뿐만이 아니다.
작년 9월 한인 상인들이 옷 장사를 많이 하는 멕시코시티의 재래시장인 테피토에서 김 모(52) 씨가 권총탄을 머리에 맞아 즉사했다.
범인은 현금은 빼앗지 않고 가게를 나오는 김 씨에게 근접해 권총을 발사했다.
테피토를 포함한 센트로 등 멕시코시티의 거대 재래시장에서 장사하는 한인들은 강도를 당하는 일이 일상사에 가까울 정도라는 말도 나온다.
돈을 빼앗을 목적으로 침입한 강도라면 고분고분 현금을 건네주면 그만이지만 다른 목적이라면 목숨이 걸린 문제가 된다.
센트로에서 장사를 하는 한 교민은 "옆 가게에서 강도가 돈을 빼앗아 도망가는데 '강도다'라고 소리쳐도 경찰이 꼼짝도 안하는 일도 있다"고 말했다.
현지 경찰을 절대적인 보호막으로 볼 수 없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시장 골목에서는 실탄으로 무장한 사설 경비들이 가게 앞에 많이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기업을 경영하거나 장사를 하는 한인 사회에서는 '멕시코에서는 남에게 원한을 살 일을 절대 하면 안 된다'는 말이 퍼져 있다.
한 한인 사업가는 "큰돈을 벌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사람도 여럿 있다"며 "복불복이라는 말도 있지만,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조심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