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도네츠크 주정부 청사 앞에서 7일(현지시간) 복면을 한 친러 시위대가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연합뉴스)
우크라이나 동부지역이 심상치 않다.
하리코프주(州), 도네츠크주, 루간스크주 등에서 분리주의 움직임이 확산하면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 제2의 크림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확산하고 있다.
이 지역의 친러시아계 주민들이 주민투표를 통해 우크라이나로부터의 분리·독립을 선언하고 뒤이어 러시아에 편입을 요청하면 러시아가 이 지역을 연방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크림식 시나리오가 재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현재 우크라이나 접경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집결시켜 두고 있는 이유도 이같은 시나리오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란 해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 병합까지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과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를 초래할 것이 뻔한 무리한 시도를 러시아가 감행할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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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저명 정치학자이자 하원 의원인 뱌체슬라프 니코노프도 8일(현지시간) 현재로선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군대를 투입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크림과는 달리 우크라이나에 동부 지역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핵심 영토다. 크림은 지난 1954년 니키타 흐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우크라이나에 선물로 넘겨주기 전까지 줄곧 러시아에 속했었다. 우크라이나로 귀속된 뒤에도 상당한 자치권을 누려 우크라이나와의 통합성이 약했다. 크림의 러시아 편입에 따른 충격이 치명적이지 않을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동부 지역은 다르다. 동부 지역은 우크라이나가 오랜 역사에서 처음으로 제한적이긴 하지만 주권을 가진 공화국으로 처음 탄생한 20세기 초반부터 우크라이나의 중심지였다.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에 뒤이어 1917년 12월 최초의 우크라이나 소비에트공화국이 선포된 곳이 동부 도시 하리코프였다. 하리코프는 우크라이나에 정식으로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이 세워진 1919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내 우크라이나의 수도였다. 이에 앞서 17세기 중반 우크라이나 카자크들이 건설한 하리코프는 줄곧 우크라이나인들의 중심도시로 발달했다.
도네츠크 지역은 사회주의 혁명 이후인 1920년대 이오시프 스탈린에 의해 우크라이나로 귀속됐으며, 루간스크주는 1938년 도네츠크주가 스탈린스크주와 보로쉴로프스크주로 분리되면서 생겨났다. 나중에 스탈린스크주가 도네츠크주로 보로쉴로프스크주가 루간스크주로 개명됐다.
이렇듯 동부 지역은 1991년 소련 붕괴 후 완전한 주권국 우크라이나가 탄생하는 모태였다. 이 지역을 잃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태생지를 포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친러 성향이 강한 동부 지역이지만 주민 구성은 러시아인보다 우크라이나인이 다수를 이룬다. 하리코프주의 경우 270만명 주민 가운데 우크라이나인이 70%에 달한다. 러시아인은 25%에 불과하다. 430만명 인구의 도네츠크주에선 우크라이나인이 56%(러시아인은 38%), 220만명 인구의 루간스크주에선 우크라이나인이 58%(러시아인 39%)를 차지하고 있다.
200만명 인구의 근 60%가 러시아인이고 우크라이나인이 24%에 불과한 크림과는 양상이 다르다.
대다수 동부 지역 주민들이 러시아어를 사용하지만 우크라이나어를 모국어로 여기는 주민들도 상당하다.
동부 지역이 역사적으로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중서부 지역보다 러시아적 문화가 우세하고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것은 사실이나 이 지역이 우크라이나에 주는 의미는 크림과 비교할 수 없다는 의미다.
동부 지역은 경제적으로도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다. 철강·석탄·화학 공업 등 국가 주요 산업의 상당 부분이 이 지역에 집중돼 있다. 중서부 지역은 농업 지대로 경제적으로 낙후돼 있다.
동부 지역을 내주는 것은 곧 우크라이나의 핵심을 내주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크라이나가 절대 동부 지역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가 동부 지역 병합을 시도할 경우 우크라이나로서도 결사항전이 불가피하다. 이같은 정황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전면전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계획적으로 동부 지역 병합을 시도할지는 의문이다.
변수는 우크라이나 내부 상황이다. 우크라이나 중앙정부가 동부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잃고 친러 성향이 강한 동남부 지역과 친서방 성향의 중서부 지역 간 갈등이 내전 상황으로 치닫는다면 러시아의 선택도 달라질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선 러시아도 동남부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 보호를 이유로 자연스레 무력 개입에 나설 공산이 크다. 니코노프도 우크라이나에서 폭력이 확산하고 유혈사태가 벌어지면 러시아도 가만있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그 이전 단계에선 러시아는 동부 지역의 혼란 상황을 우크라이나 및 서방과의 협상에서 스스로의 발언권을 키우기 위한 카드로 이용하려 할 것으로 보인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가 각 지역의 자치권을 최대한 인정하는 연방제와 어느 정치·군사 진영에도 속하지 않는 중립국 지위를 채택하고 개헌을 통해 이를 헌법에 명시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같은 개헌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상당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으로 판단하는 듯하다.
동부 지역의 분리주의 움직임은 러시아의 이같은 요구에 힘을 실어주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다. 러시아가 동부 지역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