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의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한 뒤 항일운동을 벌였던 제주시 와흘리 출신의 임도현(앞줄 가운데)씨. 이 사진은 임씨의 조카 임정범씨가 중국 류저우신문사 편집장을 통해 입수한 사진이다. (연합뉴스)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으로 탈출해 장제스, 윤봉길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벌여온 항일투사가 10년간 6번의 독립유공자 심사에서 탈락하는 등 제대로 조명을 받지 못해 안타까움을 사고 있다.
후손이 어렵게 자료를 모아 제시했지만 정부는 자료가 미흡하다며 공적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후손들은 애국의 뜻을 기리기 위해서라도 개인의 자료수집에 의존하기보다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항일투사에 대한 조사와 연구에 나설 것을 바라고 있다.
◇ 항일 비행사 임도현, 그의 행적
1931년 12월 일본 도쿄(東京) 인근의 다치카와(立川) 비행학교에 다니던 임도현(任道賢) 선생은 비행훈련을 받던 도중 동료 6명을 포섭, 일본군 비행기를 몰고 중국 상하이(北京)로 탈출했다.
도쿄에서 출발해 제주도를 거쳐 상하이까지 1천800여㎞를 비행한 그는 상하이 인근 옥수수밭에 비상착륙했다.
마적단을 만나 동료 조종사들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그는 상하이외국어학교와 류저우(柳州)육군항공학교, 육·해군대학교 등에서 차례로 수학한 뒤 중위로 임관해 쓰촨(四川)성 중경중앙군사정부 직속부대에 소속돼 장제스를 보좌하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임 선생은 1934년 만주의 소만 국경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다 왼쪽 머리에 총을 맞는 큰 부상을 입었으나 상하이로 후송돼 치료를 받고 목숨을 건졌다.
그러나 1934년 친분이 있던 조선인의 밀고로 상하이 일본영사관에 붙잡혀 강제로 일본에 송환됐다.
임 선생은 1935년 비행 탈출에 대한 죄를 묻지 않는 대신 가마가제 특공대원으로 전쟁터에 나가 목숨을 바쳐 특수임무를 수행한다는 서약서를 쓰고 다시 다치카와비행학교에 들어가야 했다.
그는 이후 총상을 입은 머리 부상 후유증을 핑계로 비행 대기자 명단에 올려놓고 있다가 다시 탈출해 고향인 제주도에 들어와 숨어 살았다. 1936년 5월 검거돼 조선총독부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소에서 무고와 공갈 혐의로 기소돼 10월 형을 선고받아 목포형무소에서 1937년까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32년 상하이에서 벌어진 윤봉길 의사의 의거에 관련됐다는 혐의로 체포돼 전기고문 등 모진 고문을 받으며 옥고를 치르다 풀려났으며 고향 제주에서도 중국으로 빠져나가려다 2차례나 붙잡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
이후에도 마을에서 공출과 징병 거부 운동을 벌이고, 해방을 맞아 학교 건립 등의 계몽운동도 하기도 했으나 고문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52년 43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이런 내용은 임 선생의 어머니가 4·3사건 당시 소개작전으로 집이 모두 불에 탈 때 조그만 장롱 속에서 겨우 건져낸 기록문건(자필 이력서)을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 6번의 탈락…괘씸죄 적용?
10년간 백부인 임도현 선생의 독립유공자 선정을 위해 고군분투해 온 임정범(60)씨는 지난 8일 국가보훈처로부터 2014년도 광복절 기념 독립유공자 공적심사 결과를 받아들고 허탈감을 넘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번만큼은 백부가 독립유공자로 선정될 것이라 굳게 믿었지만 결과는 '공적내용에 대한 활동 당시의 객관적인 입증자료 미비로 포상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는 답변이 돌아왔기 때문이다.
임씨는 지난 6번의 심사에서 모두 탈락하는 결과가 나온 데 대해 '괘씸죄'가 적용된 것이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사연은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임씨는 당시 백부가 직접 쓴 기록문건인 자필이력서 등을 보훈처에 올렸는데 사전 독립유공자 포상자료 검토과정에서 모 심사위원으로부터 '이것(내용)은 너무 황당하다. 정신병자가 쓴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을 들었다.
그 심사위원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운형보다도 더 높은 등급을 받을 인물'이란 말도 덧붙였다.
임씨는 백부가 정신병자 취급을 받은 것에 격분해 3년간 일본 경시청 비밀문서와 중국 류저우항공학교에 있을 당시 사진자료 등 추가 증거자료를 모아 지난 2008년 광복절 포상에 맞춰 다시 재심을 요청했다. 결과는 탈락이었다.
심사결과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여러 차례 신문고를 통해 '심사위원을 바꿔달라'고 따졌고 언론에도 억울함을 호소했다. 포털 사이트 다음의 '아고라'에서는 서명운동까지 일기도 했다.
2009년 3·1절 포상에 다시 재심을 요청했으나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결국 임씨는 서울행정법원에 국가보훈처를 상대로 독립유공자 공적심사결과 유보처분취소 소송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때 임씨는 국가보훈처가 제출한 소송 답변자료를 통해 백부 임도현 선생에 대해서만 공적심사에서 제외당한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지난 2009년 6월 10일 '심사 보류'가 아닌 '심사 제외'로 분류된 이유를 국가보훈처에 따져 물었다.
심사 제외에 해당하는 경우는 당사자가 친일 행적이 있거나 독립운동행적이 전혀 없는 경우에만 적용되는 경우로 백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사항이며 제외 대신 보류 조치가 적용되는 게 보통이었다.
당시 보훈처 관계자의 답변은 황당했다.
보훈처 관계자는 "당신이 심사위원을 바꿔달라고 하는데 심사위원들이 제외를 안 시키겠어요?"라는 답변이었다.
임씨는 이 말을 책임질 수 있는지를 즉각 따져 물었고 보훈처에 강력히 항의했다.
보훈처는 "직원의 적절하지 못한 응대와 언사로 오해와 불쾌감을 드렸다"며 직원 개인의 말실수로 일축했다.
이후 2010년, 2012년, 2014년에도 모두 재심이 이뤄졌지만 결국 '입증자료 미비'와 같은 이유로 포상대상에 포함되지 못했다.
◇ 국가차원의 조사 이뤄져야
국가 보훈처가 임도현 선생의 독립운동 행적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객관적인 증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임도현 선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기록은 그가 직접 쓴 기록문건이 전부인데 이를 뒷받침할 공신력 있는 다른 자료가 없다는 것이다.
보훈처 관계자는 "임 선생을 비롯한 7명이 4대의 일본 비행기로 나눠 타고 상하이로 망명을 한 셈인데 이는 당시 엄청난 사건"이라며 "비행기 자체가 항일 운동 세력에게는 중요한 무기가 되고 엄청난 힘을 보탠 셈이 되는데 독립운동진영과 중국, 일본 정부 등 어느 곳에서도 이를 기록한 문서를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임 선생의 기록문건과 1936년 임 선생이 선고받은 총독부 판결문, 보훈청이 임 선생 관련 기록으로 찾아낸 상하이 일본영사관의 내부 문건인 '요시찰인관계잡찬(要視察人關係雜纂)' 내용에서 그의 1931∼1934년 행적이 다소 어긋나는 부분이 있어 정확한 고증을 필요로 하는 독립유공자 포상에서 제외됐다는 설명이다.
이에 대해 10년간 백부의 관련자료를 모아온 임씨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다.
그는 일본군과의 전쟁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었다는 백부의 기록문건 내용을 뒷받침하기 위해 지난 2009년 6월 제주시 조천읍 와흘리 임 선생의 묘소에서 제주대 법의학 교수팀과 언론사, 도의원 등이 참여한 가운데 유해를 직접 확인했다.
제주대 법의학 교수팀은 "유골을 검색한 결과 두개골 좌측 측두골 부위에 0.5∼0.7㎝가량의 천공흔(구멍이 뚫린 흔적)이 관찰됐다"며 "손상 형태로 미뤄 총상에 의한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소견서를 내 임씨의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