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세 명의 석방문제를 놓고 워싱턴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억류기간이 짧게는 5개월, 길게는 1년8개월에 이르면서 이들을 어떤 식으로든 석방시켜야 한다는 정책적 압박감이 커진 탓이다.
특히 11월 중간선거를 앞두고 이번 사안이 본격적인 쟁점으로 부상하면 정치적 부담까지 떠안게 될 가능성이 크다. 자국민 보호를 최우선 가치라고 천명해온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게는 악재로 작용할 공산이 높기 때문이다.
오바마 행정부를 더욱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북한이 고도의 여론전을 전개하고 있는 점이다. 북한이 미국의 대표적 보도채널인 CNN에 억류자 세 명을 인터뷰하도록 허용한 것이 단적인 예다.
이들 세 명은 1일(이하 현지시간) 방영된 인터뷰에서 서로 입을 맞춘 듯 미국 정부가 자신들의 석방을 위해 더 적극적으로 역할을 해달라고 호소했다. 이는 북한이 미국 정부에 압박을 가하고자 기획한 고도의 심리전술인 것으로 외교 소식통들은 보고 있다.
특히 정확히 한 달 전 AP통신의 영상서비스인 ATPN과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선총련) 기관지 조선신보가 이들 세 명을 인터뷰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다. 한 외교소식통은 "국제사회와 미국 내부의 여론 형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력 미디어들을 골라 교묘하고도 지속적인 여론전을 전개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 내에선 북한의 이런 전술이 모종의 정치적 선물을 내놓도록 미국 정부를 압박하는 전형적인 '인질외교'라는데 이견이 없다.
문제는 미국이 북한에 대해 이렇다할 '외교적 지렛대'를 갖고 있지 않아 이 같은 인질외교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스웨덴 대사관을 통한 우회적 영사적 접근으로는 북한을 움직이는데 근본적 한계가 있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결국, 북한이 희망하는 대로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몸값'을 지불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커지고 있다.
특히 평양에 고위급 특사를 보내는 방안이 워싱턴 조야에서 조심스럽게 거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관심을 보일만한 인물들을 평양에 파견해 이들을 '구출'해오는 시나리오다.
이미 2009년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여기자 두 명의 석방을 위해, 2010년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아이잘론 말리 곰즈 씨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일각에서는 과거처럼 전직 고위급 인사들이 방북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 지난 4월 억류된 제프리 에드워드 파울씨의 가족은 조지 W. 부시·빌 클린턴·지미 카터 전 대통령 등에게 편지를 보내 도움을 청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빌 리처드슨 전 미국 뉴멕시코 주지사나 뉴욕시에서 활동하는 윌리엄 델빈 등 종교계 지도자들도 방북 용의를 피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12월 북한에 격추된 주한미군 헬기 조종사 석방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던 리처드슨 전 주지사는 이날 CNN에 나와 "북한은 이번 억류자들 석방을 통해 미국과의 대화를 원하고 있다"며 "클린턴 전 대통령이나 나와 같은 고위급 인사들이 방문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과연 전직 고위인사들이나 종교지도자들의 방문 정도로 이들을 순순히 석방해줄지는 미지수이다.
북한으로서는 이들의 석방을 계기로 북·미관계를 큰 틀에서 유리한 방향으로 끌고 가려는 구상을 그리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분석에서다. 한 외교소식통은 "미국과의 직접 대화와 6자회담 재개로 이어질 수 있는 '연결고리'로 활용하려는 포석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북한으로서는 전직 인사들보다는 당장 오바마 행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가진 현직 인사들의 방북을 희망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오바마 행정부가 집권 이후 6년간 견지해온 대북정책 기조에 변화를 주는 신호로 해석될 수 있어 쉽지 않은 결정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의 패트릭 벤트렐 공동대변인은 지난달 31일 연합뉴스에 보낸 논평에서 "대북정책에 변함이 없다"는 입장을 확인했다.
결국,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현행 대북정책 기조를 유지하면서 이들 세명을 구출해오는 고차 방정식을 풀어내야 하는 상황에 처한 셈이다. 특히 11월 중간선거를 앞둔 점이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더욱 곤혹스러운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