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발하는 고소고발로 인해 검찰 수사가 좌지우지되고 있다. 정치, 사회 각 분야에서 건전한 토론과 논쟁으로 풀어야 할 현안들이 모두 검찰로 쏠리는 현상도 가중되고 있다. 비리 척결이라는 검찰 본연의 업무보다는 각종 사건의 민원 창구로서 수사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검찰이 일부 공안사건 수사를 위해 고소고발을 적극 이용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CBS는 고소고발에 휘둘리는 검찰의 현 모습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정치인 언론 가리지 않고 수십 명 고발… 대통령 명예훼손 고발 폭증
보수논객 심상근씨는 지난해 가을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7시간 의혹'을 제기한 정치인, 언론, 학자 등을 대검찰청에 무더기로 고발했다. 심씨가 운영했던 '박정희 전 대통령 대변인 사이트-박통.kr'을 보면 그가 접수한 고발장만 수십 건에 달한다.
'박 대통령 연애는 거짓말' 이라는 발언을 했던 설훈 의원, '도둑심보를 보여주는 것 같다'고 비판한 이종걸 의원,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 비판한 우상호 의원, 정권에 각을 세운 박지원 의원 등 야당 국회의원 다수를 고발했다. 각종 매체들은 물론 박 대통령을 동물에 비유한 만평을 그린 손문상 화백과 '박 대통령도 죽는다는 것을 기억하라'는 신문 기고글을 쓴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처럼 현 정부 들어 가장 눈에 띄는 고발건은 바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고발이다. 대검찰청이 제공한 통계 자료에 따르면 일반 명예훼손 접수건은 2010년 1만 1,841건에서 지난해 1만 4,882건으로 꾸준히 늘고 있다. 사이버 명예훼손 접수건은 2010년 4,549건에서 지난해 8,131건으로 5년 만에 2배 가까이 급증했다. 워낙 '묻지마 고소고발'이 많다보니 실제 기소되는 비율은 줄어들고 있다. 일반 명예훼손 기소율은 같은 기간 17.7%→ 13.8% 사이버 명예훼손 기소율은 23.4%→13.6%로 크게 떨어졌다.
기소율이 낮다고 해도 고발 자체가 하나의 풍토로 굳어지고 있다.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고발은 주로 보수단체에서 주도하는데, 국회의원이건 언론인이건 가리지 않고 고발당하는 실정이다. 통상 대통령 명예훼손에 대한 고발장은 A4용지 1~2장 정도로 간단하다. 언론 기사나 발언록 같은 것을 찾아내 붙인 다음 이 부분을 수사해달라고 검찰에 고발장을 낸다.
허술한 고발장은 때론 신속한 수사와 사법처리까지 이어진다. 국제적인 문제로 커진 것이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명예훼손 사건이다. 세월호 당일 박 대통령의 행적 관련 의문을 제기한 외신기자를 검찰이 기소한 것은 법조계에서도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국경없는기자회' 등 해외 언론단체에서도 우려가 쏟아졌다.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행적 의혹을 보도한 가토 다쓰야(49) 일본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사진=황진환 기자)
◇ 고발되는 순간 위축돼… 권력 감시 기능 약화정작 당사자가 가만히 있는데도 명예훼손 수사와 처벌이 가능한 것은 모욕죄와는 달리 명예훼손죄는 당사자 동의 없이도 처벌 가능한 '반의사불벌죄'이기 때문이다.
독일, 일본 등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 명예훼손을 형사처벌하는 나라는 드물다. 영미권 국가에서는 형사처벌없이 민사소송으로 해결한다. 허위 뿐 아니라 사실 공표까지 명예훼손으로 처벌하는 나라는 일본과 우리나라밖에 없는데 그나마 일본도 고소고발 문화가 거의 없고 적용범위가 좁다.
특히 2008년 '탤런트 최진실 자살' 등을 계기로 사이버상 명예훼손 처벌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고 실제 법이 강화됐다. 법학자들은 명예훼손 처벌에 관한한 우리나라보다 법 조항이 강한 나라는 없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명예훼손 처벌 강화의 반사이익은 엉뚱하게도 연예인보다는 현 권력층에서 누리고 있다.
대통령과 정권에 대한 비판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하는 경우가 빈번하면서 정권 비판의 목소리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다.
일단 '묻지마 고발'이 접수되면 피고발인 신분으로 검찰 수사 대상에 올라 그 자체로 위축될 수밖에 없다. 언론인과 정치인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도 심리적 위축을 줄 수 있다.
검찰도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지난해 박근혜 대통령이 "모욕이 도를 넘었다"고 발언한 다음날 '사이버명예훼손전담팀'을 꾸려 인터넷상에 대통령을 비방하거나 세월호 사건 관련 글을 올린 네티즌을 전격 구속하기도 했다. 명예훼손 수사가 독재 정권 시대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정태호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명예훼손죄로 고발돼 검찰 수사를 받는 순간, 당사자나 주변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결국 힘 있는 자의 비리 사건이나 각종 의혹에 대해 국민들이 점차 입을 다물게 된다"고 우려했다.
◇ 공론장 축소까지… 명예훼손 처벌 범위 줄이고 檢 독립해야
검찰에 출석하고 있는 정윤회씨 (사진=박종민 기자)
정권이 직접 명예훼손 고소고발전에 뛰어드는 경우도 마찬가지로 공론장의 위축을 가져온다.
'정윤회씨와 십상시의 국정개입 의혹 문건'은 언론에 보도되자마자 청와대가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면서 검찰에 공이 넘어갔다. "검찰 수사 결과를 지켜보자"는 분위기로 흐르면 사회적, 정치적 논쟁의 기능은 약화되게 마련이다. 왜 비선라인 의혹이 불거졌는지, 청와대 내부에 어떤 내분이 있었는지 토론과 논쟁이 활발히 오가야할 시기에 검찰 수사에 온 관심이 집중됐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의혹제기가 됐어도 일단 검찰 수사를 지켜보자고 하면 공론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회적 공론을 통해 풀어야할 비판적인 문제제기를 사실상 봉쇄해버리게 된다"고 비판했다.
그렇다면 남발하는 고소고발전의 폐해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전문가들은 우선 가장 대표적인 명예훼손 처벌 범위를 지금보다 약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명예훼손죄를 당사자의 처벌 의사가 있어야 처벌하는 '친고죄'로 바꾸거나, 명백한 허위사실에 의한 명예훼손만을 처벌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승희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이 국회에 계류된 상태이다.
정태호 교수는 "우리나라가 해외 선진국과 비교했을 때에도 명예훼손 형사 처벌 기준이 너무 엄격한 것이 객관적인 현실이다. 이를 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