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8일 있었던 새누누리당 유승민 전 원내대표의 사퇴 기자회견 모습 (사진=윤창원 기자)
얼마 전 국회법 개정안 처리 문제를 둘러싼 당청 갈등이 청와대의 완승으로 끝났다. '배수의 진'을 친 박근혜 대통령의 요구에 새누리당이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사실상 축출하며 백기투항한 결과다.
새누리당은 당시 "당청 화합이 우선"이라는 공자님 말씀을 내세우며 스스로를 위안했지만 언론은 '수평적' 당청관계는 의미없는 구호에 불과했고 '수직적' 당청관계가 재확인됐다는 분석을 내놨다.
새누리당이 박 대통령의 위세에 눌려 납작 엎드린 데에는 9개월여 앞으로 다가온 총선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30%의 콘크리트 지지층을 가진 박 대통령을 등에 업지 않고는 총선에서 자리 보전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렇게 당청관계가 가까스로 봉합되며 청와대 우위의 당청관계가 확인된 듯한 그 순간 향후 여권의 권력지형 변화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이슈 하나가 불쑥 튀어나왔다. 바로 '노동개혁'이다.
◇ 김무성 한마디에 다시 살아난 '노동개혁'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 (사진=윤성호 기자/자료사진)
그런데 노동개혁은 '불쑥'이라는 단어가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진부한 이슈 가운데 하나다. 박 대통령은 올 초부터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줄기차게 강조해왔다.
박 대통령은 올 초 신년 기자회견에서 "노동시장 개혁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인 생존전략"이라며 "노와 사는 상생의 정신을 바탕으로 3월까지는 반드시 노동시장 구조개혁 종합대책을 도출해줄 것을 당부드린다"고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박 대통령을 필두로 한 청와대와 정부가 사력을 다해 추진한 노동개혁은 결국 시한내 합의를 이끌어내는데 실패했다. 그리고 곧 '노동개혁' 이슈는 수면 밑으로 가라앉았다.
그런데 이렇게 소리소문없이 사라질 것 같았던 노동개혁 이슈가 다시금 부상한 것은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지난 17일 "나라를 위해서 표를 생각하지 않고 노동시장 개혁을 추진하겠다"며 노동개혁을 위한 배수진을 친 이후다.
이에 새누리당은 곧바로 하반기 최대 추진 과제로 노동개혁을 선정하고 노동개혁특위를 구성해 빨빠르게 대응했다. 김 대표는 장외농성 중인 한국노총을 직접 찾아 설득작업을 벌이는가 하면 미국 워싱턴에서까지 노동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등 직접 노동개혁 과제를 챙기고 있다.
박 대통령이 수차례 국무회의, 수석비서관회의 등 공개석상에서 노동개혁을 부르짖었을 당시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던 언론 역시 김 대표를 비롯한 새누리당이 발 벗고 나서자 관심 있게 이를 지켜보고 있다.
◇ 與 조정·통합 능력이 노동개혁 성공 열쇠
지난 7월 16일 있었던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지도부의 회담 (사진=청와대 제공)
일각에서는 당청관계를 회복하고 박 대통령을 모처럼 알현(?)한 김 대표 등 당 지도부가 청와대의 지시를 착실하게 이행하고 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한다. 일면 타당한 분석이다.
다만 앞으로 흘러갈 방향이 이같은 분석과 반드시 맥을 같이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올 상반기 최대 국정과제 가운데 하나였던 공무원연금개혁과 노동개혁을 비교해 보자.
공무원연금개혁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기까지 가장 큰 동력이 됐던 것은 국민적 공감대였다. 하지만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개혁은 근본적으로 하나의 목소리가 나오기 힘든 이슈다.
임금피크제, 일반해고 요건완화 등 노동개혁의 세부항목을 놓고 사측과 노조, 청년층과 중·장년층,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각 계층의 목소리가 하나로 나오기 힘든 상황이다. 심지어 한 가정 안에서도 이들 계층이 상존하는 것이 대한민국 노동시장의 현실이다.
이 때문에 이를 조정하고 통합하는 정치력이 노동개혁 성공의 열쇠가 될 수밖에 없다. 바로 이 역할을 김 대표가 자임하고 나섰고 성패 여부는 그와 새누리당의 역량에 크게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한마디로 청와대가 노동개혁 화두를 먼저 던졌을지는 몰라도 이 화두를 이끌어가 매듭지을 곳은 새누리당이라는 말이다. 새누리당의 한 재선의원은 "갈수록 늘어나는 청년실업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동개혁은 필수"라며 "당리당략을 떠나 이 문제를 해결하는데 당력을 집중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 與 협조 없이 朴정권 성공도 없어비단 노동개혁 뿐만 아니라 정권의 최전성기가 지나 앞으로 내리막길을 달릴 일만 남은 박근혜 정권 입장에서는 향후 새누리당의 도움없이 제대로 된 국정운영이 힘들다.
최근 벌어진 유승민 사태를 박 대통령과 청와대의 완승으로 볼 수도 있지만 이는 한낱 전투에 불과했다. 작은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친 청와대를 향해 큰 전쟁을 내다본 새누리당이 마지못해 한수 접어줬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지 모른다.
당장 내년 총선 이후가 변화된 당청관계를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미 4년 임기를 보장받은 새누리당 의원들이 지금처럼 '朴바라기'로 남아있을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역대 정권, 그 가운데서도 현 여권은 정권말기에 접어들면 당청관계가 소원하다 못해 앙숙 관계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김영삼 정부도 그랬고 이명박 정부도 그랬다.
특히, 지난 2011년 '세종시 수정안' 문제로 당시 유력 대권후보 신분이었던 박 대통령은 이명박 정부와 정면 충돌했고 이때문에 이명박 정부의 레임덕은 더욱 가속화됐다는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RELNEWS:right}
물론 당시 박 대통령이 가졌던 위상과 김 대표 등 현 여권 잠룡들의 위상에 큰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현재 당청관계를 당시와 단순비교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새누리당의 협조 없이 박근혜 정부의 성공도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박 대통령도 청와대도 변해야 한다. 유승민 사태에서 드러난 일방통행식 소통을 버리고 당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수직적 당청관계에 취해있을게 아니라 오히려 청와대가 수평적 당청관계를 읍소해야 한다.
오죽하면 친박계 핵심의원조차 전체 의원들이 모인 의원총회 자리에서 "권력자가 너무 자기중심적이다. 권력자는 그래서 망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비수를 꽂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