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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악, 만대(萬代) 기억하리라"…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사건/사고

    "죄악, 만대(萬代) 기억하리라"…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베트남의 눈물③] 가해 주체 명확히 지목하는 학살지역 주민들

    베트남전에 파병된 한국군 일부는 전쟁과정에서 대규모학살과 성폭행 등으로 민간인 수천 명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이후 50년이 흘렀으나 생존자들에게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며 나아가 희생자 2세에까지 대물림되고 있다. CBS노컷뉴스는 한베평화재단과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가 주최한 '베트남 평화기행'에 동행해 피해의 흔적을 따라가며 가해자로서 한국의 책임 역시 여전하다는 것을 되짚어 본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 움푹 팬 눈에서 눈물 뚝뚝…베트남전 한국군 학살, 그 이후
    ② "적군 핏줄 라이따이한" 한국군 성폭행 피해자의 주홍글씨
    ③ "죄악, 만대(萬代) 기억하리라"…베트남의 '한국군 증오비'
    ④ '마음의 빚'에 멈춰선 베트남 학살…공식사죄 언제쯤?


    베트남전쟁 당시 대규모 민간인학살을 경험했던 피해 주민들은 마을에 '한국군 증오비'를 세워두고 50년 전 가해의 주체를 명확히 지목하며 학살의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

    ◇ "한국군이 430명 죽였다" 매일 곱씹어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빈호아사 입구에 세워진 한국군 증오비. 마을로 진입하는 통로이자 지역 인민위원회 건물 근처에 위치한 이곳을 주민 다수는 매일 드나들고 있다. (사진=김광일 기자)

     

    "하늘에 가닿을 죄악 만대를 기억하리라. 한국군들은 이 작은 땅에 첫발을 내딛자마자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일들을 저질렀다. 수천 명의 민간인을 학살하고, 가옥과 무덤과 마을들을 깨끗이 불태웠다" (증오비 우측 비문)

    베트남 중부 꽝응아이성 빈호아 마을 입구 언덕배기에는 높이 3.5m에 너비 5m쯤 되는 한국군 증오비가 세워져 있다. 지난 5일 평화기행단이 증오비를 찾았을 때 학생들을 비롯한 주민 다수는 이곳을 지나며 학살의 고통을 곱씹고 있었다.

    증오비 우측 비문(사진=김광일 기자)

     

    비문과 마을주민, 한베평화재단 등에 따르면 지난 1966년 12월 5일 새벽 5시 출라이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 해병대 청룡여단 1개 대대는 빈호아사로 진군했다. 군인들은 현재 증오비가 위치한 마을 입구 쪽에 있던 지름 10m쯤 되는 폭탄 구덩이에 주민 36명을 몰아넣고 느닷없이 총 세례를 퍼부어 숨지게 했다.

    다음 날에는 근처 꺼우 마을로 들어가 중화기와 수류탄 등을 동원해 273명을 학살했고 찌호아 마을을 습격해 12명을 더 살해했다. 응옥흐엉 마을에서는 80세 노인을 참수해 머리를 들판 한가운데 진열한 것으로 기록됐다.

    증오비 비문 좌측에 쓰인 통계를 보면 희생자는 모두 430명에 달했다. 이 중 268명이 여성이었다. 연령대별로는 182명이 어린아이였고 109명이 50세~80세의 노인이었다. 전체 희생자 가운데 7명은 임신한 여성이었으며 2명은 성폭행을 당한 것으로 나타났다. 2명은 산 채로 불에 탔고 1명은 참수, 1명은 배가 갈라진 채 발견됐다.

    주민들은 학살을 마친 군인들이 시신 상당수를 우물에 던져 넣은 뒤 불을 질렀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에 따라 2000년대 초반 새 우물을 파기 전까지 수십 년간 주민들은 식수를 이용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 '극적 생존' 갓난아기, 주민들이 품었다

    지난 5일 자신의 집을 찾은 평화기행단을 만난 도안응이아(51) 씨(사진=김광일 기자)

     

    학살 당시 생후 6개월이던 도안응이아(51) 씨의 경우 총탄에 쓰러진 어머니 배 밑에 깔려 있다가 사흘 뒤 극적으로 구조됐다. 발견 당시 피투성이 상태로 어머니의 빈 젖을 빨고 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하지만 핏물과 빗물에 흘러든 탄약으로 인해 눈이 멀었고 그렇게 50년을 살아왔다. 밤에는 자주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고아가 된 그를 거둬준 건 마을 주민들이었다. 엄마들이 젖을 먹여 키웠고 학교에도 보내줬다. 그가 10세 때 남들보다 늦게 첫걸음을 때던 날 주민들은 잔치를 열었다.

    왼쪽부터 도안응이아 씨의 부인,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 도안응이아 씨, 그리고 도안응이아의 아들 탄빈 씨(사진=김광일 기자)

     

    15세가 되던 해 주민들이 직접 지어준 흙집은 나중에 시멘트벽으로 수리됐고 도안응이아 씨는 현재 부인·자녀와 함께 이 집에 살고 있다. 아들과 딸에게는 자신과 달리 평안하게 살길 바라며 각각 탄빈(淸平)과 빈인(平安)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그는 자신의 집을 찾은 평화기행단을 향해 연신 웃음을 보였다. 이후 CBS노컷뉴스 취재진과의 별도 인터뷰에서 "어머니도 할머니도 없이 그동안 너무 고통스럽고 슬펐다"면서도 "한국 사람들이 옛날엔 참 많이 미웠는데 지금은 좀 괜찮아졌다"고 털어놨다.

    ◇ 국방부 "베트남 관계 고려…공식 입장 없어"

    베트남 곳곳에 설치됐던 이런 한국군 증오비는 현재 총 전국 3곳에 남아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한베평화재단 구수정 상임이사는 "어딘가에 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주민들은 증오비가 한 번 무너지면 다시 세우지는 않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우리 국방부는 "베트남과의 관계를 고려해 민간인 학살과 관련한 공식적인 입장을 내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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