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민중항쟁 현장 사진에 포착된 한 시민군을 추적하는 다큐멘터리 '김군'. 이 영화 연출자 강상우(36) 감독은 당시 시민군에 몸담았던 100여 명을 접한 시대의 목격자다. 그와의 인터뷰로 5·18 시민군의 어제와 오늘을 3회에 걸쳐 짚어본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
① 5·18 서사 생명력은 왜 지만원의 차지가 됐나 ② "그들은 5·18을 찰나의 첫사랑처럼 회고했다" <계속>계속> |
영화 '김군' 스틸컷(사진=영화사 풀 제공)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계엄군이 물러났던 1980년 5월 21일과 계엄군의 참혹한 무력진압이 이뤄진 27일 사이 광주는 해방구였다. 강상우 감독은 "시민군이 그때를 회고하는 방식은 마치 첫사랑 같다"고 말했다.
"열렬하고도 뜨거웠으나 참혹한 비극으로 끝난 첫사랑. 그 뒤로 어떠한 보상이나 보답도 주어지지 않았던 짧았던 순간들. 항상 선생들께서는 그렇게 격렬했던 감정의 순간들로 그날들을 회고한다."
강 감독은 "굉장히 찰나였으나 계엄군이 물러난 뒤 트럭에 함께 올라 순찰을 돌 때 느꼈던 즐거움을 말씀하시는 분들도 많았다"며 말을 이었다.
"자국 군대가 대낮에 국민들을 죽이는 모습을 목격한 데서 시작된 항쟁. 그 열흘(5월 18~27일)로 인해 그분들 인생이 뒤바뀌고, 세계관은 뿌리부터 흔들렸다. 그 기억이 강렬할 수밖에 없잖나."
그는 "영화 '김군'에도 등장하는 시민군 오기철 선생은 촬영 당시 유독 울분에 차 계셨는데, '80년 5월로 다시 돌아간다면 사람들 죽어 나가도 가만히 있겠다'고도 하셨다"며 "물론 진심이 아니다. 5·18에 대한 진상규명·명예회복 등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현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전했다.
사진 속 시민군을 "김군"이라며 알아본 주옥 씨는 5·18 당시 배에 둘째 아이를 품은 채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들에게 내갔다. 강 감독은 "주옥 선생을 2014년 처음 알았는데, 선생이 하루 종일 지내는 세탁소에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연스레 5·18도 소재로 올랐다"며 "선생만 해도 우리를 만나기 전까지 외부인에게 5·18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다"고 설명했다.
"주먹밥을 만들 때는 재료가 없어서 그냥 맨밥이었다더라. 선생의 세탁소가 대학 근처에 있는데, 바깥에 나가지 않고 그 안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 왔다. 대학에서 축제 때마다 폭죽소리가 들리면 5·18 당시 기억이 떠올라 많이 힘들었다고 한다. 그러한 선생께서 사진 속 시민군을 기억해내지 못했다면 이 영화는 시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 "지금도 이발소 가면 내가 머리 감아요…물만 대도 무서우니까"
영화 '김군'을 연출한 강상우 감독(사진=영화사 풀 제공)
5·18 시민군으로 참여했던 생존자들의 몸과 마음은 항쟁이 끝난 뒤로 피폐 일로를 걸었다. 죄책감마저 오롯이 피해자인 그들의 몫이었다.
극우논객 지만원 씨로부터 '제36광수'(북한 권력 서열 2위 최룡해)로 지목된 양동남 씨는 영화 '김군'에 출연해 아래와 같이 증언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남았다는 것,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때문에 87년도까지 망월동 묘역 한 번을 못 갔어요. 미안하고 죄스럽고 그래서…. 5·18 때문에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사람들이 광주에 많이 있어요. 지금도 약을 안 먹으면 잠을 못 자는 사람들도 있고…."
5·18 당시 열아홉 살이던 양 씨는 고문 후유증으로 여전히 커다란 고통을 겪고 있다. 물리치료를 꾸준히 받고 있지만, 마음의 상흔은 쉽사리 아물지 않는다.
그는 "지금도 이발소 가면 머리를 내가 감아요. 엎드려서 물만 이렇게 대도 무서우니까. 눈 뜨고 엎드려서 내가 머리 감고 있어. 아직도 기억은 생생하게 그대로 살아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강 감독은 "당시 체포됐던 시민군들은 거의 모두 고문 조사를 받았기 때문에 몸이 많이 불편한데다 생계를 잇는 데도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말을 이었다.
"5·18 생존자를 위한 트라우마센터가 생긴 지도 얼마 안 됐고, 그곳을 활용하는 생존자들조차 많지 않다. 5·18 당시 체포됐던 분들은 물론이고 체포되지 않았던 분들까지 '폭도'로 낙인 찍힌 상황에서 병원에 가 치료받는 것을 굉장히 두려워했다고 한다. (생존자들은) 그 통증을 관리하기 위해, 울분을 삭이기 위해 술을 많이 드셨고, 그로 인한 합병증, 알코올 의존증 등으로 삶이 피폐해지신 분들도, 끝내 세상을 저버린 분들도 많다."
그는 "생존자들은 90년대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기 전까지, 또는 그 이후까지 진상규명을 위해 싸우느라 생업을 뒷전에 둘 수밖에 없었다"며 "이로 인해 일정한 직업을 지닌 분들이 극소수일 만큼 경제적으로도 어렵게 생활하고 있다"고 전했다.
◇ 청년 시민군 3명의 얽히고설킨 사연…"이제서야 오해 풀었다"
영화 '김군' 스틸컷(사진=영화사 풀 제공)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이뤄진 적 없는 송암동 민간인 학살 사건 현장에서 살아남은 시민군 3명의 사연은, 당대 일그러진 국가권력이 국민들 사이 반목과 적대를 어떻게 심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5·18 당시 시민군이던 이강갑·최영철·최진수 씨는 함께 트럭을 타고 송암동에 순찰을 나갔다가 11공수여단 부대원들에게 체포됐다.
강 감독은 "당시 이강갑 선생만 성인이었고 최영철 선생은 열여덟 살, 최진수 선생은 열일곱 살로 미성년자였다"며 "이로 인해 이강갑 선생이 '무기 탈취를 주도하고 선동에 앞장섰다'는 죄목으로 징역 6년이라는 중형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체포 당시 혼수상태였던 이강갑 선생은 통합병원으로, 나머지 두 분은 상무대로 곧바로 이송됐다. 나중에 교도소에 있을 때도 미성년자는 그들끼리 생활했기 때문에 이강갑 선생과 나머지 두 분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며 강 감독은 설명을 이어갔다.
"이로 인해 이강갑 선생은 지난 40년 가까이 최영철·최진수 선생이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고 먼저 출소했다고 여겼다. 반면 최영철 선생은 체포 뒤 통합병원에서 조사받던 이강갑 선생이 같이 활동했던 사람으로 자신을 지목한 데 분노해 '이강갑이 모든 것을 다했다'고 이야기했던 사연이 있다."
강 감독은 "영화 '김군'에도 나오듯이 이들 세 분이 극장에서 만나 5·18 당시 시민군들 사진을 함께 보고, 송암동 학살 장소도 가보고, 이후 음식점에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해를 푸는 과정이 있었다"며 "이렇듯 5·18 이후 광주 내부에서도 시민군들이 서로를 적대하도록 만든 가슴 아픈 상황들이 이어졌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