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노무현(1946~2009)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를 맞았습니다. 노사모(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대표,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 등을 지내면서 노 전 대통령을 겪은 시인 노혜경과의 인터뷰로 고인을 추억하고 지금 우리 사회를 돌아봅니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
[상] 꽃길 마다한 노무현, 사람을 얻다 <계속>계속> |
1988년 4월 27일 부산 동구에서 노무현 통일민주당 국회의원 당선자가 꽃목걸이를 걸고 시민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 있다. (사진=노무현재단)
시인 노혜경은 "와! 이 사람" 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을 각인한 때로 1986년 6월항쟁을 꼽았다.
"물론 부산에 살면서 1970년대부터 '판사 출신 변호사 노무현이 있다' 정도 수준으로 알고는 있었다. 실제로 이분이 머릿속에 각인된 때는 아무래도 1980년대 들어서다. 부림사건(전두환 정권 초기인 1981년 공안당국이 부산 지역 독서모임 학생 등 22명을 불법 감금하고 고문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한 용공조작사건), 부산미문화원방화사건(1982년 3월 18일 부산 고신대 학생들이 '미국 정부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 학살을 용인했다'고 비판하며 부산미문화원을 방화한 사건) 등 재판에 변호사 노무현이 학생들 변론을 맡아서 되게 잘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노혜경은 "6월항쟁 당시 부산 역시 조용하지 않았는데, 그 항쟁의 중심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두드러졌다"며 관련 일화를 하나 소개했다.
"1987년 6월 16일이나 17일로 기억한다. 제가 6월 9일까지 부산가톨릭센터에 있다가 이튿날 출산을 위해 입원했는데 난산으로 중환자실에 꽤 오래 누워 있었다. 어느날 간호사가 옛날 까만 전화기의 줄을 길게 늘어뜨리면서 빠르게 제가 오더니 건네주더라. 받아보니 가톨릭센터에 있던 천주교 부산교구 사무국 직원들이 '언니! 언니!' 부르는 소리에 이어 엄청난 소음이 밀려들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는 목소리가 '노변! 노변!' 그러더니 또다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그는 "나중에 알고 봤더니 가톨릭센터 입구에 있는 넓은 계단에서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 시민들을 모아놓고 연설을 한 것이었다"며 "이 연설이 시민 대토론회로 이어졌다고 하는데, 사무국 직원들이 건물 밖으로 몸을 내밀고 연설을 듣다가 '이건 언니(노혜경)에게도 들려줘야 해'라고 전화를 한 거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솔직히 그때는 (연설 내용을) 하나도 못 알아들었는데, 나중에 그 사실을 알고 나니까 너무도 인상적이더라"며 "'연설이 얼마나 감동적이었으면 그 친구들이 나에게도 그것을 들려주려고 했을까'라는 생각으로 기억에 남는다"고 덧붙였다.
정치인 노무현에게서 받은 특별한 인상을 묻자 노혜경은 "사실 정치를 잘 모르는 사람 입장에서는 뭐가 특별한지 잘 모른다. 그냥 노무현처럼 정치하는 것이 상식처럼, 표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현실의 다른 정치인들은 안 그러니까 역설적으로 '노무현은 특별하구나'라고 느껴졌던 면이 있다"고 회고했다.
"국회의원이 된 뒤로도 많은 일이 있었잖나. 그를 스타로 만든 '5공 청문회'도 있었고, 2000년 부산에서 출마해 낙선하기도 했다. 그러한 일련의 상황 속에서 '정치인 노무현은 일반적으로 정치권에 들어간 사람처럼 순탄하고 평탄하게, 그야말로 꽃길을 걷지 못한다'는 생각을 했다. '노무현이 잘 됐으면 좋겠는데 왜 잘 안 될까'라는 느낌이었다."
그는 "솔직히 과거에 저 역시 아이 낳고 살림하면서 자연스레 시민운동에서 멀어지다보니, 정치에 대한 이상적인 기대치는 있었으나 실제 정치인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몰랐다"며 "다만 '다른 정치인들도 노무현처럼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안 한다'는 생각은 계속 갖게 되더라"고 말했다.
◇ 인터넷서 발언권 얻기 시작한 시민들…"혼자가 아니었다는 각성"
시인 노혜경
첫 정치인 팬클럽으로 꼽히는 노사모의 대표를 지낸 노혜경은 "당시 일그러진 정치 풍토에서 정치인 노무현의 출현에 이은 노사모의 탄생은 필연적이었다"고 진단했다.
"사실 최초의 정치인 팬클럽이라는 수식어는 엄밀히 따지면 옳지 않다. 당시 노사모에 앞서 여러 정치 모임이 이미 존재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노사모를 처음이라고 여기는 데는 기존 정치 모임에 운동권 출신, 보좌관·당원 등 그나마 정치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이 참여한 것과 달리, 노사모에는 정치 초짜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노사모가 꾸려진 2000년은 시민사회가 광범위하게 구축될 수 있는 토대를 지니고 있었다"며 설명을 이어갔다.
"당시 김대중 정부가 외환위기에 따른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를 조기 졸업하면서 IT산업에 굉장히 많은 투자를 했고, 그 결과로 인터넷에 기반한 토론 문화가 굉장히 활성화됐다. 또한 IMF 체제 아래 구조조정 등을 직간접적으로 겪은 사람들은 87년 체제에 대한 커다란 회의를 느끼고 있었다. 정치적으로도 대의제에 기반한 간접 민주 정치에 다소 문제가 있다는 인식도 일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인터넷 게시판 문화가 활성화니까 사람들이 발언권을 얻기 시작했다."
노혜경은 "그때까지만 해도 신문에 글 쓰는 사람, 방송에 나오는 사람처럼 소수 엘리트가 여론을 독점하고 있었다"며 "그런데 인터넷에서 '어! 저 사람은 우리 회사 대리인데?' '저 사람은 우리 동네 구멍가게 아저씨인데?'라며 봤던 주변 사람들 글이 너무 공감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라고 전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발언권이 주어지면서 인터넷은 대안 언론 기능을 하기 시작했다. 기존 언론이 지녔던 주류적 사고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 말고도 굉장히 많다는 사실을 서로 알게 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당시 우리 사회 가장 큰 구조적 문제로 꼽힌 '호남 차별' '계급 갈등'에 대한 문제 의식을 모두 지녔던 노무현이 2000년 4월 치러진 16대 총선에서 낙선한 것이다."
그는 "당시 저 역시 노무현이라는 사람을 괜찮은 정치인으로 알고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잠재적 팬이었다"며 "그때 부산에 살고 있었기에 한 일간지에서 격전지 현장을 스케치하는 기사를 요청해 왔고 2000년 4월 총선 직전에 유세 현장을 갔는데, 너무나 끔찍했다"고 회상했다.
"취재를 위해 유세 현장을 돌아다니는데 구석구석에서 수상한 아저씨들이 '노무현이 인물은 괜찮을지 몰라도 김대중 때문에 안 된다' '노무현도 알고 보면 빨갱이다' '사실 노무현은 전라도 출신이다'라는 지역주의·색깔론에 기댄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때마침 연단에 선 상대 후보 허태열 씨도 똑같은 소리를 하더라. '너무 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정치 공작을 눈앞에서 본 것이다."
◇ "정치인 노무현 중심으로 사회 변화 염원하는 평범한 사람들 결집"
2003년 2월 25일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식에서 선서하고 있다. (사진=노무현재단)
노혜경은 "그날 유세 현장에 자녀들을 데리고 나온 노무현 지지자들이 소풍 온 것처럼 즐거워하는 모습을 봤다"고 했다.
그는 "현장을 둘러보면서 '이 선거 어렵겠다'는 직관은 있었지만 그렇게 기사를 쓰면 안 될 것 같더라. '말이 씨가 된다'는 소망적 사고에 따라 노무현 후보 당선 가능성이 있다는 기사를 써서 보냈다"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노무현 후보 낙선 결과를 확인하면서 '내 소망적 사고를 썼던 기사가 오히려 사람들 긴장을 떨어뜨리는데 조금이라도 기여한 것은 아닐까'라는 불안한 마음이 들었고, 정말 말도 못하게 창피했다. 그런 마음으로 노무현 후보 홈페이지에 들어갔는데 '부끄럽다' '화난다' '미안하다'는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더라. 지금이야 SNS가 워낙 활성화 돼 있으니까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끼리 만나는 것이 굉장히 쉽지만, 당시 부산이라는 굉장히 보수적인 환경에 둘러싸인 저 같은 사람에게는 너무도 신비로운 경험이었다"
그는 "그때 어떤 사람이 '노무현이 정치 그만 두면 어떡하냐' '그렇게 놔둬서는 안 되니 우리 팬클럽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거기에 저도 적극 동조했다"며 "그렇게 60여 명이 모여 처음으로 '노무현 팬클럽'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시작했다. 그해 6월 6일에 이르러서는 각 지역별 조직이 꾸려지면서 규모도 커졌다"고 설명했다.
"노사모는 일부러 팬클럽이라는 독특한 조직 형태를 취했다. 그렇게 정치인 노무현을 중심으로 사회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사람들이 굉장히 행복해 했다. 노무현도 노무현이지만 '나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네'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이 좋았던 것 같다. 정치인 노무현을 중심으로, 그를 응결 핵으로 삼은 정치적 개혁 움직임은 어찌 보면 필연적이었다."
대통령 자리에 오르기까지 정치인 노무현은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노사모 회원들의 기대치를 얼마나 충족시켰을까. 노혜경은 답변에 앞서 "복잡하다"고 운을 뗐다.
"사실 우리는 노무현이라는 정치인이 대통령만 되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순간적으로 확 바뀐다는 환상을 품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정치를 잘 몰랐던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노사모가 경험한 것은 한국 정치의 실제 상황이었다. 대통령 한 사람 바뀐다고 권력의 중심이 곧바로 옮겨지지 못한다는 현실 말이다."
노혜경은 "투표는 1인 1표이지만 실제 권력은 (돈) 1원 1표처럼 작동한다"며 "크게 봤을 때 같은 진영이더라도 생각이 다 같지는 않다. 각자의 계급·사회·지역적 위치에 따라 생각이 모두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각기 다른 개인이 공익적 인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공통 분모가 되는 의식과 사고를 지속적으로 학습해야 한다. 노무현과 함께하면서 노사모는 이런 것들을 점점 깨달아 갔다. 그 과정에서 우리끼리 반목도 있었고, 기대가 큰 만큼 실망하고 분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는 "결국에 얻은 큰 깨달음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권자로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며 "더 나은 세상으로 간다는 것은 나 스스로 국가의 주인이 되는 과정이라는 이치를 한 사람 한 사람이 굉장히 깊이 느껴갔던 여정"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