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약국에 마스크 구매 기준을 알리는 안내문이 게시됐다. (사진=박하얀 기자)
정부의 '마스크 5부제' 시행에도 현장에서는 혼란이 이어졌다. 5부제로 구매 기준이 까다로워졌지만 수요를 따라잡지 못해 마스크 품귀 현상은 여전했다.
약국 곳곳엔 아침 일찍부터 '공적 마스크 품절' 안내문이 붙었고 시민들은 분통을 터뜨리며 발길을 돌렸다. 약사들은 일반 조제 업무마저 어려워졌다며 스트레스를 호소했다.동거인이 없는 독거노인이나 장애인, 기저질환자 등 마스크 구매가 어려운 '사각지대'도 생겼다.
◇ 마스크 5부제 첫날…시민들, 여전히 마스크 찾아 '약국 대장정'정부는 9일부터 출생연도에 따라 요일별로 마스크를 1인당 2매씩 구매하고, 평일에 구매하지 못한 이들은 주말에 살 수 있도록 했다. 본인이 구매할 경우 신분증을 지참해야 하고 대리 구매 시 주민등록등본, 신분증 등을 지참해야 한다. 등본 발급 탓인지 정부 민원처리사이트인 '민원24'는 접속 폭주로 지연되기도 했다. 하지만 5부제 시행도 현장의 마스크 수요를 잠재우긴 역부족이었다.
'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오전 8시 50분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약국거리에는 약국 불이 켜지기도 전에 마스크를 낀 '패딩 부대' 수십명이 신분증을 들고 줄을 서 있었다. 모두 마스크를 구매하기 위에 달려온 이들이었다.
오전 9시가 되자 문이 열렸지만 약사는 기다리는 손님들에게 "마스크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손님들이 "오늘부터 5부제라고 해서 아침 일찍 왔는데 왜 없냐"고 항의하자 약사는 유통업자와 나눈 문자 메시지를 직접 보여주며 "언제 올지 알 수 없다, 여기서 마냥 기다리시라고 할 수 없다"고 답했다.
마스크 상자를 실은 한 배송업자가 옆 약국에 들어가자 시민들이 일제히 뛰어가 다시 줄을 섰다. 순식간에 대기 줄에는 50여명이 채워졌다. 이날 이 약국에 들어온 마스크는 180개. 이중 30개는 소형 마스크다.
약사가 박스를 뜯은지 불과 30분만에 마스크는 동이 났다. 같은 시각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한 약국에서도 1시간 만에 125명분 마스크가 '완판'됐다.
약사가 마스크 품절을 알리는 안내문을 문 앞에 붙였지만 마스크를 찾는 시민들의 발길은 이어졌다. 끊임없는 문의에 약사는 조제실에 있다가 수차례 밖으로 나와 다 팔렸다는 말을 반복했다. 몇시간씩 줄을 서던 때보다 구매가 쉬워졌다는 시민들도 있었지만 현장에서의 마스크 혼선은 여전해 보였다.
'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경기도 고양시의 한 약국 앞에서 시민들이 마스크를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서 대기하고 있다. (사진=박하얀 기자)
'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약국에 마스크 품절을 알리는 안내문이 게시됐다. (사진=박하얀 기자)
◇ "등본 없어서" 90대 노모가 마스크 구매, "가족 없어서" 약국 직접 찾은 천식 환자94세 시어머니를 대신해 마스크를 구매하려 했지만 주민등록 등본이 없어 시어머니와 함께 약국을 찾은 며느리도 있었다. 김모(57)씨는 "등본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어머니를 모시고 왔다"며 "어머니가 장애인 4급에 귀도 안 들리시고 다리도 아프셔서 약사와 소통이 안 돼 함께 왔다"고 말했다. 연신 시계를 쳐다보던 김씨는 출근 시간이 다가오자 결국 자리를 떠났고 90대 노모만 남아 자리를 지켰다.
△2010년 포함 그 이후 출생 어린이 △1940년 포함 그 이전 출생 노인 △장애인 △장기요양급여 수급자 등은 동거 가족 등 대리인이 주민등록등본과 본인 신분증을 지참하면 대신 구매할 수 있지만, 혼자 사는 노인들에겐 해당사항이 없다.
기초생활수급자인 이모(84)씨는 "혼자 살다 보니 대신 사줄 이도 없다"며 "지난해 정부에서 미세먼지 대책으로 기초수급자들에게 나눠준 마스크 4장을 아껴 쓰다가 다 써서 왔다"고 토로했다. 천식, 당뇨, 심혈관질환 등을 앓고 있는 이씨는 기다리는 동안 몇 번이나 숨이 차다고 말했다.
갓난아이인 손자를 재우고 마스크를 사러 온 할머니도 있었다. A씨는 "딸 부부가 맞벌이를 하다 보니 마스크 살 시간이 있는 것 나밖에 없어서 왔다"며 "손자를 재워놓고 왔는데 불안해죽겠다. 빨리 사고 가야겠다"며 초조해했다.
본인이 구매할 수 있는 요일을 착각해 헛걸음을 한 이들도 있었다. 전동 휠체어를 타고 약국을 찾은 조모(75)씨는 1945년생으로 금요일이나 주말에 마스크를 살 수 있지만 요일을 착각해 발길을 돌려야했다. 약사는 "다른 날 오면 (약국 시스템에) 코드 입력 자체가 되지 않는다"며 양해를 구했다. 조씨는 "5부제를 한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무슨 요일에 하는지 몰랐다"며 "장애 3급인데 혼자 살다 보니 매번 마스크 2장을 사려 밖을 나서야 한다. 힘들다"고 토로했다.
마스크를 사러 온 인근 병원의 재활치료사들도 발길을 돌렸다. 마스크 구매에 실패한 이들은 "5부제를 하면 마스크를 쉽게 구할 줄 알았는데 하나도 못 구했다. 도대체 언제 살 수 있는 거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약국에 이날 구매가 가능한 출생연도를 설명하는 안내문이 게시됐다. (사진=서민선 기자)
'마스크 5부제' 시행 첫날인 9일,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약국에 마스크 '선착순 예약 판매'를 알리는 안내문이 게시됐다. (사진=박하얀 기자)
◇ 정부 '오락가락' 조치에 자구책 찾아나선 약국들…'마스크 사각지대' 개선 필요"13년 약국 영업하며 처음 겪는 일입니다"경기도 고양시에서 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B씨가 공적마스크 판매로 인한 업무 가중에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손님들에게 번호표를 지급하지 않아 혼란이 빚어진 약국도 있었고, 직원 없이 혼자 운영하는 약국은 판매가 더 어렵다고 호소했다. 신분증 등 서류 확인, 수납, 구매자 정보 시스템 입력까지 모두 약사의 몫이기 때문이다.
한 약사는 "일반 조제 업무가 불가능하다. 마스크 하나 팔 때 마진이 200~300원 정도인데 좋은 마음으로 판매하고 있지만 오히려 일반 매출은 더 떨어졌다"고 말했다.
현장에서 만난 약사들은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했다. 한 약사는 "초반에는 수면제에 의존해 잠을 청할 정도로 스트레스를 받았다. 동료 여성 약사는 마스크를 숨겨놓은 것 아니냐며 욕하는 손님 때문에 청심환을 먹었다고 한다"며 "손님들의 불편, 불안도 이해한다. 하지만 정부의 정책 보완이 필요해보인다"고 말했다.
정부의 '오락가락' 마스크 정책에 자구책을 찾아나선 약국들도 있다. 서울 영등포구의 한 약국은 매일 오전 8시에 선착순으로 예약을 받은 뒤 오후 2시부터 마스크를 찾아갈 수 있도록 했다. 마스크 입고 시간이 공지되지 않아 시민들이 불편을 겪자 한 약국은 "매일 오전 10시, 정해진 시간에 75명분을 판매할 수 있도록 조금씩 마스크를 비축해 두려고 한다"고 밝혔다. 약사는 "아침 일찍 와도 헛걸음하는 손님들을 위해 고심 끝에 생각한 방안"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일부 약국들의 자구책에도 정부의 마스크 5부제는 독거노인· 장애인, 기저질환 보유자 등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천식, 당뇨 등을 앓고 있지만 홀로 사는 이모(84)씨는 "우리 같은 기초수급자, 혼자 사는 노인들에게는 보건소나 주민센터에서 나눠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토로했다.
마스크 5부제 소식을 알리는 한 기사에는 "12세 아이가 모야모야병을 앓고 있는데, 이 같은 병을 앓는 이들은 장애인 등록증이 따로 없다"며 "면역력이 약한 아이를 데리고 나가서 마스크를 구입해야 하냐"고 호소하는 어머니의 댓글이 달렸다. 어머니는 "기저질환을 증명하는 서류라도 가져가면 대리 구매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