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 인천시 옹진군 대연평도에서 바라본 북한 개머리해안 포문이 열려있다. (사진=연합뉴스)
북한은 탈북민의 대북전단 살포를 최고 존엄의 모독으로 규정하면서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와 총참모부의 군사계획 발표등 초강경 대응을 이어가고 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이 17일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한 막말 담화에서 "우리 존엄의 대표자이신 위원장 동지를 감히 모독한 것은 우리 인민의 정신적 핵을 건드린 것이며 그가 누구이든 이것만은 절대로 추호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전 인민적인 사상 감정이고 우리의 국풍"이라고 말했다.
북한은 과거에도 최고 존엄 모독 사건을 들고 나와 대규모 군중집회를 여는 등 강력한 체제 결속을 꾀한 적이 있다. 그 뒤에는 북한 역사에서 획을 그을 정도로 중요 사건이나 정책 결정이 이뤄진 만큼, 이번 대북전단 살포 사태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1차 최고존엄 모독사건, 김씨 3대 얼굴사진 표적지 사용→권력승계 체제결속
(사진=자료사진)
지난 2011년 5월 우리 일부 예비군 훈련장에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의 얼굴 사진을 사격 표적지로 사용한 것에 대한 북한 반응은 이번 대북전단 살포와 비견된다.
북한은 지난 2011년 5월 30일 국방위원회 대변인 성명을 통해 표적지 사건을 최고 존엄 모독으로 규정하고 "(남한 정부와) 더 이상 상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고, 이어 6월 1일에는 국방위 대변인 문답을 통해 "남측이 돈 봉투를 건네며 정상회담을 애걸했다"며 당시 '북경 비밀접촉'을 폭로했다.
이어 3일에는 총참모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김관진 당시 국방부 장관을 겨냥해 "주모자 처형과 사죄 조치를 세울 때까지 실제적이고 전면적인 군사적 보복 대응 도수를 계단식으로 높일 것"이라고 밝혔다.
남한 정부와의 결별 선언, 군사 분야의 단계적 대응 경고, 특사파견 제안 폭로, 대규모 대남 삐라 살포 예고 등 북한이 최근 보이고 있는 행동 양태와 상당히 유사함을 알 수 있다.
북한은 당시에도 관련 성명을 노동신문과 조선중앙방송 등 내부 매체에 게재한 뒤 대대적인 여론몰이와 대규모 군중집회를 이어갔다.
단계적 군사 보복을 경고한 북한은 이명박 당시 대통령의 얼굴 사진을 사격 표적지로 사용하는 대응은 했지만, 결과적으로 2010년의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포격과 같은 특대형 도발은 없었다.
그 해 12월 17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고 후계자인 김정은이 권력을 성공적으로 승계함에 따라 3대 세습이 이뤄지게 됐다.
북한이 '사격 표적지 사건'을 최고 존엄 모독 사건으로 키우며 군사 대응을 강조한 것은 김정은 후계체제 구축을 위한 대내외 긴장 조성, 이를 통한 내부 결속을 꾀하기 위한 의도가 컸다는 사후적 해석이 나왔다.
◇2차 최고 존엄 모독 사건, 김일성 동상 까기→핵 문제의 전면 재검토 선언
(사진=연합뉴스/자료사진)
김정은 체체가 출범한 2012년에도 북한이 '최고 존엄 모독'으로 규정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김일성 동상을 까는 모임'(동까모) 사건이었다.
북한은 2012년 7월 20일 평양에서 재입북 탈북자 전영철씨의 기자회견을 열고 김일성 동상 폭파 작전 계획을 언급하며 배후에 미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외무성은 이 때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특대형 적대행위에 미국이 개입되었다고 강력비난하면서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 비핵화는 요원해지고 "제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핵 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고 밝혔다.
북한은 한미 양국을 동시에 비난했으나 그 중에서도 미국의 적대시 정책에 초점을 맞췄고 결국 '핵 억제력을 포함한 자위적 군사력 전반을 끊임없이 강화'할 것을 공언하고 나섰다.
이는 그 다음해인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 3월 31일 핵·경제 병진 노선 채택을 거쳐, 결국 2017년 11월 29일 신형 ICBM '화성-15형' 발사 성공과 '핵 무력 완성' 선언으로 이어졌다.
북한의 핵개발 역사를 복기해보면 북한이 2012년 핵 문제의 전면적 재검토를 선언하며 그 이유로 내세운 '동까모' 사건이 중요한 계기가 됐음을 알 수 있다.
북한이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동까모' 사건을 최고 존엄 모독 사건으로 키워, 핵 문제의 전면적 재검토라는 결정을 이끌어내고 이후 핵 개발의 명분과 동력으로 삼은 셈이다.
◇3차 최고 존엄 모독 사건, 대북전단살포→무엇을 위한 명분·동력 확보?
(사진=연합뉴스)
북한은 '사격 표적지 사건' 이후 9년 만에 다시 최고 존엄 모독으로 규정하는 사건, 즉 대북 전단 살포 문제를 꺼내들고 있다.
김여정 제1부부장이 지난 달 31일 이뤄진 탈북민의 전단 살포를 문제 삼는 첫 담화를 발표해 불을 당 긴 뒤 각종 대남 공세와 함께 강력한 체제 결속을 꾀하고 있다.
북한의 대응양태는 9년 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조건이 있다. 핵 무력의 고도화와 이에 따른 자신감이다.
2017년 11월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북한은 지난해 연말 전원회의에서 '새로운 전략무기'의 출현을 언급했고, 이후 지난달 24일 김정은 위원장 주재로 열린 당중앙 군사위원회의 확대회의에서는 "나라의 핵전쟁 억제력을 한층 강화하고 전략무력을 고도의 격동상태에서 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방침이 제시됐다"고 밝힌 바 있다.
여기서 고도의 격동상태(on a high alert)라는 표현은 핵 억제력의 실전 배치에 사용하는 용례라는 해석이 있다. 즉 실전 배치 상태에서 핵 무력을 관리·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방침을 채택했다는 분석인 것이다.
박형중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북한이 2012년 7월 최고 존엄 모독과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을 이유로 선언한 '핵정책 전면 재검토'에 기반해 이후 핵·경제 병진노선, 2017년 '국가 핵무력 완성'에 까지 이르는 플랜이 완성되었을 것"이라며, "최근 대북전단 살포를 최고 존엄 모독으로 연결시키는 상황에서 열린 당 중앙군사위원회 확대회의에서도 현 단계에 부합하는 새로운 플랜을 제시했을 가능성이 크고, 따라서 앞으로 1,2년은 북한이 이런 플랜을 실천하기 위한 전략적 기회로 삼을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일정한 분기점을 넘고 있다면, 과거 최고 존엄 모독 사건 때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 벌어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북한이 미국에 대한 핵 억제력을 갖췄다고 판단한다면, 핵 보유 국가 간 전면전은 불가능하다는 확신과 자신감에 따라 오히려 재래식 분쟁과 도발은 더욱 자주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정철 숭실대 교수는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이 양적으로 일정한 분기점을 넘었다면,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는다는 확신 때문에 소규모 재래식 분쟁은 오히려 더 자주 일어난다는 역설(안보-안보 부재 패러독스)이 우려 된다"며, "북한은 현 시점에서 재래식 분쟁이 자신에 불리하지 않다는 판단 하에 대남공세를 진행 중인 것으로 판단 된다"고 말했다.
이정철 교수는 "북한이 지난 3월 21일 미사일 시험 발사 직후 영토 밖에서 적을 타격할 수 있는 '역외타격능력'을 언급했는데, 이는 북한이 스스로를 핵 보유 국가라는 전제에서 북한식 반접근 전략을 준비 중인 인상"이라며, "전면전으로의 비화를 전제하지 않고 벌어지는 다양한 분쟁에서 우리가 얼마나 효과적으로 북한을 다룰 수 있는가 하는 점이 확실치 않다는 점에서 안보 리스크가 존재 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