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은 존 볼턴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 출판을 막기 위해 소송을 냈지만 법원은 지난 20일 이를 기각했다. 사진은 백악관이 회고록 수정·삭제 요구를 정리해 법원에 제출한 17쪽짜리 서류. (사진=연합뉴스)
23일(현지시간) 출간 예정인 존 볼턴 전 백악관국가안보보좌관의 회고록에는 남북한 관련 내용이 상당부분을 차지한다.
그가 쓴 글의 신뢰성 여부를 떠나 이미 국내에서는 보수언론 중심으로 현 정부 비판 소재로 십분 활용됐다.
그렇다면 이 회고록이 앞으로 한반도 운명에 어떤 파장을 몰고올까. 특히 트럼프 또는 미국의 향후 대북 정책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이를 위해서는 지난 2년간 트럼프 대북정책, 그 중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과정을 짚을 필요가 있다.
볼턴도 자신의 회고록에 하노이회담 전후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글을 해독하다보면 볼턴 스스로 하노이 회담 결렬의 소위 'X맨' 역할을 다름 아닌 자신이 했다고 사실상 실토한 것으로 읽힌다.
그는 애초부터 북미정상회담에 반대했으나, 김정은과의 만남을 항상 고대해 온 트럼프 앞에서는 내놓고 자신의 속내를 밝히진 못했다고 했다.
다만 회담의 결실만을 막기위해 (트럼프 몰래) 백방으로 뛴 모습이 회고록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그는 우선 실무협상을 총괄하던 스티븐 비건 대북특별대표가 만든 북미정상 합의문 초안을 하노이로 가는 도중 받아보고 문제를 삼기 시작했다.
그는 합의문 초안에 미국의 양보만 나열돼 있다는 꼬리표를 달아 이를 펜스 부통령, 폼페이오 국무장관, 멀베이니 백악관비서실장과 공유한다.
초안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사실상 '바람잡이' 역할을 한 것으로 돼 있다.
트럼프 대통령에게는 특별히 마련한 동영상을 보도록 해서 사실상 '사전 정신교육'까지 한 것으로 묘사돼 있다.
레이건 대통령이 1986년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공산당 서기장과 레이캬비크 회담에서 회담장을 박차고 나온 영상으로, 트럼프에게 하노이에서도 레이건처럼 하라는 최면을 걸기 위해서 보여준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협상 전술의 하나로 '플러스 알파'를 끝까지 요구할 것을 폼페이오에게 설득한다.
'플러스 알파'는 다름 아닌 영변 핵시설 외 북한의 추가 양보건이다.
실제로 트럼프와 김정은은 회담 막바지에 볼턴이 쳐놓은 '플러스 알파'라는 덫에 걸려든다.
트럼프가 영변 핵시설 외에 추가로 내놓을 게 없는지를 묻기에 이르고, 김정은은 영변 핵시설이 북한에 얼마나 큰 의미인지 적극 방어하는 상황에 다다른다.
회고록에는 두 사람이 같은 질문과 답변을 반복했다고 기록돼 있다.
김정은의 저항에 트럼프는 '플러스 알파'로 장거리 미사일 제거 방안을 역제안 하기도 했다.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볼턴은 두 사람의 밀당에 끼어든다.
장거리 미사일 제거 외에도 핵·탄도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전부를 기본적으로 신고부터 해야한다며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사진=연합뉴스)
하노이 정상회담 이후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볼턴에게 "영변 핵시설 폐기는 북한이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의 단계로 들어가는 첫 조치가 될 수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고 회고록에 기록돼 있는 것을 볼 때, 그 동안 한국정부로부터 북미협상의 실익에 대해 줄곧 이야기 들어왔을 김정은에게 볼턴의 도발적 요구는 벽처럼 다가왔을 개연성이 높다.
영변 핵시설 폐기와 부분적 제재완화라는 행동 대 행동을 담은 스몰딜 서명 여부만을 결정하면 되는 단순한 상황에서 논의의 초점이 급격히 분산되며 복잡한 상황으로 전개되는 단초를 마련한 장본인이 바로 볼턴이었던 것이다.
하노이 회담 결렬은 당시에는 마이클 코언 변호사 청문회로 국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린 트럼프 대통령이 스몰딜 체결의 후폭풍을 감내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우세했다.
하지만 각론에서는 이렇게 회담의 결실을 어떻게든 막아보려는 볼턴의 집요한 훼방작전이 곳곳에서 빛을 발한 것으로 회고록에 기록돼 있다.
회고록에는 하노이 노딜 선언 이후 트럼프에 대한 관찰기도 들어있다.
한 달 쯤 지난 뒤부터 트럼프가 하노이에서 너무 강하게 나갔던 것은 아닌지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볼턴이 주장한 '한 달 쯤 지난 뒤'부터는 시기적으로 2019년 4월부터를 말한다.
그 때부터 트럼프가 하노이 회담 결과에 후회했다는 것은 그런 하노이 회담을 사실상 빚어 낸 볼턴에 대한 불만을 품었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다시 그로부터 2개월 뒤에 열린 판문점 3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볼턴이 배제된 점, 그로부터 다시 3개월 뒤 볼턴이 트럼프에 의해 이른바 '트윗 경질' 된 점을 반추해보면 그렇게 보는 게 자연스럽다.
트럼프는 이번 볼턴의 회고록이 출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접한 지난 18일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글을 올렸다.
"김정은은 볼턴이 옆에 있는 것을 원치 않았다. 볼턴의 멍청하기 짝이 없는 모든 주장이 북한과 우리를 형편없이 후퇴시켰고 지금까지도 그렇다. 나는 (볼턴에게)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냐고 물어봤다. 그는 답이 없었고 그저 사과했다. 처음부터 그랬다. 바로 그 때 그 곳에서 해임했어야 했다!"
트럼프가 말한 '바로 그 때 그 곳'이란 맥락상 하노이를 언급한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만약 트럼프가 볼턴의 뜻과 달리 11월 재선에 성공한다면 볼턴은 4차 트럼프-김정은 정상회담의 고사에 제물로 올라갈 공산이 크다.
물론 북한 문제를 당초 재선 성공의 불쏘시개로 활용하려 했다는 트럼프의 계산상 4차 북미 정상회담을 상정하는 것이 무의미할 수도 있다.
김정은으로선 이번 회고록을 통해 하노이의 이면을 명확히 꿰뚫고 나아가 미국의 대북정책 결정과정을 더욱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선 회고록은 북한에게도 판문점 회담 이후를 준비할 훌륭한 지침서가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