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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의 대립에 희생된 울산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울산

    이념의 대립에 희생된 울산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울산CBS '시사팩토리 100.3 금요판'×울청넷 '나울통’

    -대한민국 독립 위해 앞장 선 학암 이관술
    -'광주학생독립운동', 그의 삶을 변화시켜
    -일본제국주의 맞서 경성반제동맹 결성해
    -이관술, 해방 직후 유명한 정치인 중 한 명
    -여운형,이승만,김구,박헌영 다음으로 꼽혀
    -한국전쟁 직후 대전형무소에서 처형당해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라는 이유로 잊혀져
    -이관술 외에 잊혀진 울산 독립운동가 많아
    -청년세대, 그리고 울산시민 관심 필요해
    -광복 75주년, 우리 사회 차별 여전히 존재

    ■ 방 송 : 울산CBS FM 100.3
    ■ 방송일 : 2020년 8월 14일 오후 5:05~5:30
    ■ 진 행 : 조강래, 이승우, 이태인
    ■ 출 연 : 배문석
    ■ 음 악 : 길기판
    ■ 기 술 : 이창수
    ■ 조연출 : 엄유미
    ■ 연 출 : 김성광

    울산시청자미디어센터의 제작 지원을 받아 울산 CBS와 울산청년네트워크가 공동으로 제작하는 ‘시사팩토리 100.3 금요판’이 돌아왔습니다. 라디오 주파수 FM100.3으로 방송된 이 내용은 팟빵과 유튜브에서 ‘나울통’을 검색해 다시 들으실 수 있습니다.



    ◇조강래> 청취자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시사팩토리 100.3 금요판과 팟캐스트 나울통 진행을 맡은 조강래입니다. 8월 15일인 내일은 광복 75주년을 맞이합니다. 되찾은 빛, 광복. 듣기만 해도 가슴 한쪽이 뭉클해지는 감격스러운 단어인 것 같습니다. 모두가 그날을 염원하던 일제강점기, 광복이라는 두 글자를 가슴에 품고 일제에 맞서 온 생을 던졌던 사람들이 있었죠. 우리는 그들을 독립운동가라 부릅니다. 오늘은 광복절 75주년 특집으로 우리에게 잊혀진 울산의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을 알아보기 위해 파워인터뷰 준비했습니다.

    ◇이태인> 안녕하세요, 완벽정치해설가 이태인입니다. 저는 울산에서 나고 자랐지만, 한 번도 ‘이관술’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는 울주군 태생으로, 일제강점기 당시에는 이름을 날린 걸출한 독립운동가라 하는데, 저뿐만 아니라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승우> 안녕하세요, 공동진행자 이승우입니다. 공산주의자였던 학암 이관술은 광복 후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이념의 대립이 극에 달했던 1950년 여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가는 이관술을 법적 절차와 상관없이 속전속결로 총살했습니다. 결국, 첨예한 이념대립의 결과로 남과 북은 분단되었고 자본주의 진형인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자 이관술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비단 이관술 뿐만 아니라 많은 좌익진형의 독립운동가들이 모두에게 잊혀졌습니다.

    ◇조강래> 단지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조국을 위해 희생했던 독립운동가의 업적을 외면하고 부정해야만 할까요? 이 질문과 관련해 배문석 울산 노동역사관 사무국장과 함께 파워인터뷰 준비했습니다. 먼저 노래 듣고 돌아오겠습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OST죠. 박효신이 부릅니다. ‘그날’

     



    ◇조강래> 네, 박효신의 ‘그날’ 듣고 돌아왔습니다. 오늘, 광복 75주년을 하루 앞두고, ‘이념의 대립에 희생된 울산의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을 주제로 파워인터뷰 준비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배문석 울산 노동역사관 사무국장을 스튜디오로 모셨습니다. 안녕하세요.

    ◆배문석> 네, 반갑습니다.

    ◇조강래> 먼저 저희 ‘시사팩토리 100.3 금요판’ 청취자들께 간단한 소개 부탁드리겠습니다.

    ◆배문석> 앞서 소개받은 울산노동역사관 사무국장 배문석입니다. 그리고 저는 학암이관술기념사업회에서 감사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관술 선생님을 알게 된 것은 2006년에 안재성 작가가 <이관술 1902-1950="">이라고 하는 평전을 냈었는데요, 그 평전을 읽고 2007년도에 저는 처음 알게 됐어요. 평전에 소개된 이관술 선생님 생가가 바로 저희 인근에 울주군 범서읍 입암마을에 있거든요. 거기를 직접 찾아가게 됐고, 매년 수차례 역사기행으로 그곳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찾아가는 사업들을 진행했던 바가 있습니다. 그 와중에 이관술 선생님과 관련된 일제강점기 신문자료나 각종 연구 자료들을 수집하게 됐고, 나름대로 그것들을 정리하는 작업들을 가졌고요. 이관술기념사업회는 2013년에 한차례 제가 준비하고 추진하려고 노력을 했었는데, 그때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작년 4월 달에 공식적으로 출범을 했고, 작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토론회를 가지면서 이관술 선생에 대해서 지역에 또한 전국에 그 내용들을 알리는 작업들을 진행해왔습니다.

    ◇조강래> 네, 잘 들었습니다. 이관술 선생을 꽤 오래 연구하셨군요. 오늘은 광복절을 하루 앞둔 시점에서 학암 이관술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하는데, 저는 이분의 이름을 이번에 처음 들었습니다. 그래서 방송 전에 취재를 해봤는데, 광복 이후 정부 구성에 있어서 주요 인물로 오를 만큼 인지도가 꽤 있는 인물이더라고요. 저뿐만 아니라 모르는 분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인 것 같습니다. 어떻게 된 건가요?

    ◆배문석> 1945년 8월 15일 저희가 광복이라고 하는, 바로 해방을 맞이했을 때 한반도에서는 가장 유명한 정치인 중에 한 사람이 바로 이관술 선생님이셨어요. 우리나라의 최초의 여론조사라고 할 수 있는 선구회라고 하는 중도단체에서 1945년 10월 달부터 11월 달까지 한 달여 동안 전체 여론조사를 진행할 때 “가장 역량 있고 양심적인 정치인은 누구냐”고 물었어요. 물었을 때 가장 많은 지목을 받았던 사람은 여운형, 여운형 선생이 33%정도, 그다음에 이승만, 김구, 박헌영 이런 분들이 있었는데, 이관술 선생님은 다섯 손가락 안에, 다섯 번째였고요. 그래서 당시에 대중들로부터 상당히 많은 인지도를 가지고 있었던 울산 지역의 정치인으로서는 가장 이름을 날렸던 분이었던 거죠. 하지만, 이분이 오랜 시간동안 역사 속에서 잊혀졌던 것은 일제강점기에 사회주의 계열에 독립운동을 하셨던 것이었고, 사회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후에 남과 북으로 이념적으로 저희가 원치 않게 나눠진 거잖아요. 남쪽으로 미국이 진주하고 북쪽으로는 소련군이 진주해서 38도 위도를 경계로 저희가 원치 않게 나눠지는 과정에 남쪽에 있었던 이관술 선생은 여러 가지 탄압을 받게도 되고, 그리고 뒤에 다시 한 번 언급을 하겠지만 저희가 거짓으로 조직됐다거나 그런 의혹들이 많이 있는 정판사 위폐사건으로 사실은 감옥에 수감되게 되고, 또한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1950년에 총살당하시게 되면서 역사 속에 아예 지워버리는 인물이 돼서 뒤늦게 다시 주목하고 언급이 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태인> 저는 울주군 군민인데, 우리 울주에 이렇게 대단한 독립운동가가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배문석 사무국장께서 학암 이관술 선생에 대한 설명을 너무 짧게 한 것 같아 제가 좀 아쉬운데요, 좀 더 자세히 설명을 듣고 싶네요. 그래서 말하자면, 독립운동가 학암 이관술 선생의 생애를 간략하지만, 자세히. 세 가지 포인트로 이야기 부탁드릴게요.

    ◇조강래> 간략하지만, 자세히. 좀 어려운 부탁이긴 한데요.

    ◆배문석> 네, 쉽지 않은 질문이신 것 같네요.

    ◇조강래> 저희가 방송 전체 시간이 24분 55초라서 좀 양해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배문석> 이관술 선생은 사실은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아온,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우리 사회에 아주 큰 인물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실은 이분이 울산에 시조가 있는 본관 학성 이씨에 농소파에 입암문중, 그러니까 입암으로 들어간 문중에 자손으로 태어나셨는데, 1902년이니까 국권을 잃어가는 시기에 태어나신 거죠. 어린시절에 또 총명했다고 해요. 그래서 서울에 중동고등보통학교 졸업이후에 수재들만 들어간다고 하는 동경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됩니다. 그중에 조선인들은 특히나 적었을 거예요. 그래서 이분이 그만큼 총명했던 거죠. 유력한 가문이죠. 지역에서는 학성 이씨가 유력한 가문이고, 집안도 여유가 있었어요. 유력한 가문에 여유 있는, 부가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동경으로 유학 간, 지금으로 치면 엄청난 엘리트로서 자신의 삶이 열릴 수 있었던 거죠.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해서는 서울 종로에 있었던 동덕여고보에 지리와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놓여 졌던 탄탄한 길이 거기서 시작되는 건데, 1929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이라고 한 번씩 들어보셨을 겁니다. 크게 일어났던 학생만세운동이 서울로 번졌고, 서울로 번진 상태에 자신의 제자들이 거리에 나가는 과정들을 목격하고, 이것을 말리는 다른 민족주의 계열에 독립운동을 한다는 분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슬슬 마음을 굳혀먹습니다. 탄탄했던 길, 안정적인 보장됐던 길을 버리고 아주 가시밭길 같은 험난한 길을 택하게 되는 거죠. 그때 자신이 멀리했던, 거리를 뒀던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으로 자신의 방향을 정하게 되고, 그때부터 그 부분에 매진하게 됩니다. 1932년에 경성반제동맹이라고 하는 단체를 결성하는데 참게하게 되고요, 그때 첫 옥고를 겪게 됩니다. 옥고를 겪고 난 다음에 나와서는 스스로가 어설프게 독립운동을 해서는 안 되겠구나 사상적인 부분만 가지고는 안 되는구나. 그래서 철저하게 변신하게 됐던 과정이 바로 이관술 선생의 첫 번째 포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강래> 네, 첫 번째 포인트를 한마디로 축약하신다면 어떤 걸로 좀 표현할 수 있을까요? 생애를 말씀을 해주셨는데.

    ◆배문석> 사실은 사자성어로 얘기하면, 멸사봉공(滅私奉公)이라는 단어도 쓰일 수 있을 것 같고, 심계천하(心系天下)는 약간 낯선 단어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서양 말로 하면 ‘노블리스 오블리주’라고 하죠. 그래서 자신의 지위라는 부분들을 누리기보다는 책무를 다하는, 낮은 곳을 임하는 그러한 자신들의 정의로운 길을 택했던 과정들이 있습니다.

    ◇조강래> 심계천하, 노블리스 오블리주. 두 번째 포인트는 어떤 게 있을까요?

    ◆배문석> 두 번째는 이분에 관련된 여러 가지 기사들이 있어요. 재미나고 호기심 가는 부분인데, 아까 첫 번째 옥고를 치르시고 나오고 난 다음에는 철저하게 스스로의 독립운동에 매진하시게 되는 과정에 일제경찰이 끊임없이 체포망을 조여옵니다. 이분의 활동에 대해서. 그렇게 되는 과정들을 피하기 위해서 스스로를 변장하기도 하고, 수배상태에서 홍길동처럼 되는 거예요.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이관술이 나타났다. 그런데 이것을 체포하려고 경찰망이 조여졌다. 라는 기사가 떠요. 그런데 그 다음 기사에 보면, 경찰이 허탕을 쳤다. 라는 것이 뜨는 거죠. 그리고 갑자기 대구에서 나타났다는 기사가 뜨고 난 다음에는, 며칠 뒤에 보면 광주에 나타났다는 기사가 떠요. 그만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홍길동 같은 모습을 보이는 거죠. 이 기사를 접한 조선인들, 바로 이제 일반 대중들은 아주 통쾌했을 겁니다. 일제의 경찰망을 유유히 피해 다니는 유유자적 피해 다니는 이관술 모습에 짜릿한, 지금 같으면 사이다 같은 그런 느낌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 이제 다시 한 번 체포되셨던 게 1943년이었는데, 43년에 체포됐을 때 아주 큰 고문을 당해서 병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병보석으로 3개월 동안 요양기간이 주어져서 가석방이 되는데, 그때 이제 울산 고향에 와서 머물게 돼요. 매일 아침마다 경찰이 와서 체크합니다. 늘 감시합니다. 그런데 가석방 기간이 끝날 즈음에 홀연히 사라진 거예요. 흔적도 없이. 경찰이 탐문수사를 했겠죠. 어딜 갔나했더니 이관술이 지난밤에 빗자루를 타고 선바위를 넘어서 저쪽 산으로 날아갔다는 거예요. 어? 나는 아니다. 저쪽 만송 지역으로 날아가던데? 이관술의 빗자루 전설이 그때 나오는 거예요. 그만큼 사람들은 감정을 이입해서 이관술의 독립운동, 일제경찰에 잡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 그리고 독립운동을 계속 이어가기를 바라는 마음들이 그렇게 투영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부분은 신출귀몰(神出鬼沒)했던 이런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거 같아요.

    ◇조강래> 두 번째 포인트는 ‘신출귀몰’

    ◇이태인> 제가 아는 영화 <암살>보다 더 영화 같은.

    ◇조강래> 굉장히 영화 같은, 드라마틱하네요. 마지막 포인트는 어떤 게 있을까요? 조금 짧게 말씀 부탁드릴게요.

    ◆배문석> 마지막은 굳이 붙인다면 오호통재(嗚呼痛哉)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해방 후에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이분의 공적이나 이분이 수고했던 부분을 대중들은 인정했지만, 미군정 하에서는 사회주의 계열은 핍박받는 거였고, 억울할 수 있는 누명의 부분들이 지금 학계에서는 그렇게 많은 부분들이 이야기 나오고 있습니다. 그 과정에 무기징역 형을 받고 대전형무소에 수감돼 있다가 한국전쟁이 벌어지자 남침한 북한군이 밀려올 때 철수하는 국군이 후퇴하는 과정에서 대전형무소에 수감돼있던 좌익사범들, 좌익계열의 사상범들을 끌고나가서 총살시키거든요. 그때 맨 먼저 죽은 게 이관술이었고.

    ◇조강래> 가장 먼저?

    ◆배문석> 그렇죠. 왜냐하면 당시 사상범 중에는 첫손가락에 꼽을 만큼 영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겠죠. 결국은 스스로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했던 것이 자신의 명, 그리고 그 이후에 자신의 명예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하는, 안타까운 쪽으로 이어졌으니 오호통재라 할 만한 거 같습니다.

    ◇조강래> 이관술 선생의 생애를 제가 좀 듣다 보니까 경성 트로이카, 경성 콤그룹 등 이런 명칭들이 자주 등장하는데요, 청취자들을 위해서 이관술 선생의 생애에서 중요하게 역할을 했던 반제동맹부터 경성 콤그룹까지 짧게 말씀을, 한번 소개를 부탁드리겠습니다.

    ◆배문석> 1919년 3‧1만세운동 이후에 독립운동사에 대해서 좀 고민을 가지시는 분들은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이 아주 크게 확장됐다는 걸 보시거나 알고계신 분들도 있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926년에 있었던 6‧10만세운동이나 아까 말씀드렸던 1929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주도했던 것이 사회주의 계열이었고요, 1930년 이후가 되면 일제의 압박 때문에 민족주의 계열 내에서 춘원 이광수처럼 변절하거나 전향자들이 속출하게 되는데, 사회주의 계열은 적색노조나 농민조합을 기반으로 해서 비타협적으로 지하로 들어가거나 끊임없이 항쟁을 하게 돼요. 그것이 해방 때까지 이어졌었고, 사실 그러한 공들이 바로 사회주의 계열들의 끈질긴 항쟁에 대한 부분들이 해방 후에 더 주목을 받았었고,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냈다라고 볼 수 있습니다.

    ◇조강래> 그러면 사회주의, 공산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있는 명칭이라고 할 수 있는데, 항일운동 당시 이관술은 정확히 어떤 이념을 지향한 인물이었습니까?

    ◆배문석> 본인이 사실은 일본 유학기간에 이미 일본 유학생들 대부분이 사회주의 사상을 접합니다. 그래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부분에 독립을 하려고 했을 때 자신의 방향을 사회주의 쪽으로 택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거죠. 그렇게 됐지만, 이관술은 유학기간에는 사회주의하고는 거리를 뒀다고 합니다. 그중에 일부만 자신의 민족계몽이라고 하는 민족주의 사상가로서 취할 부분만 취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아까 말씀드렸던 1929년, 30년이 경과하면서는 사회주의에 관련돼서 가장 첨예하게, 그리고 가장 적극적으로 그 사상을 구현하기 위해 경성 콤그룹이나 경성트로이카, 그리고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기 위한 활동에 매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우> 처음 3가지 포인트로 학암 이관술 선생님에 대해 설명을 해주셨는데요, 저는 ‘오호통재’라는 사자성어가 인상이 참 깊습니다. 이관술이란 인물은 결국 이념 대립에 의해 희생됐다고 보는데, 우리가 지금도 사실 정치적인 갈등이 이데올로기에서 연결된 정치 갈등이 지금도 심화되고 있고, 우리나라는 그게 굉장히 심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현재 시점에서 반면교사로 삼아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이 있을까요?

    ◆배문석> 올해가 한국전쟁이 발발했던 바로 70년이 되는 해인데요, 사실은 1945년 해방 공간이 세계사적으로는 첫 냉전이 벌어진 장소가 됐던 거고, 저희 민족은 원치 않게 그 냉전의 바로 한복판에 놓여져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를 겨눠야했던 그로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피를 흘려야 했던 그런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데 이념의 대립이라고 하는 아픈 역사 또 이면에는 그 그림자에는 청산되지 못했던 친일파와 부역자들이 존재해요. 친일파와 부역자들이 바로 독립운동가들이 자신의 정적이나 라이벌이 되는 거죠. 해방공간에 독립운동가들을 핍박하는 맨 앞장을 서게 됩니다.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사실 울산 출신의 부끄러운 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노덕술 같은 친일악덕경찰이었던 노덕술 같은 사람이 있겠죠. 해방 후 경찰이나 군인 중에 고위관료 중에서 70% 이상이 일제강점기 친일경력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했던 우리 현대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과정에 사실은 이념에 대한 부분에서의 빨갱이 사냥, 레드헌트라고 보통 얘기하는데, 이런 것이 현대 45년 이후에 순차적으로 일어나죠. 제주 4.3 항쟁, 그다음에 여순사건, 그리고 1949년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고 이끌겠다고 해서 만든 보도연맹이 실제로 한국전쟁 벌어지자마자 학살의 대상이 돼서 울산 같은 경우에도 870명이상이 거기에서 학살됐다라고 하는 정부에서 조사한 겁니다.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 조사결과에 있으니까 그런 이념의 과정에서 이관술도 학살당했고 이관술의 동생, 이관술의 큰사위도 그렇게 보도연맹으로 학살당했으니 집안 전체가, 그리고 울산의 많은 독립운동가 본인이거나 당사자거나 그 가족이 희생된 사례들이 여러 차례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태인> 이관술 선생이 어쨌든 사회주의 계열이라는 이유로 사위, 동생, 그리고 가족이 희생당하기도 했습니다. 저희가 취재를 해보니, 가족 모두가 희생당하지는 않고 일부가 살아계시더라고요. 지난해 이관술 선생의 막내딸인 이경환 씨가 아버지의 죽음을 놓고 억울함을 호소하기도 했었죠. 이에 앞서 2012년도에는 이관술 선생의 외손녀인 손옥회 씨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진행했다고 하더라고요. 70년 전 일을 가지고 소송을 했다는 것. 좀 주목할 만한 일인 것 같은데,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보십니까?

    ◆배문석> 방금 전에 말씀드렸던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 위원회’의 조사결과가 있었어요. 그 조사결과 속에서 이관술 선생님이 대전형무소에서 불법적인 처형이 이루어졌다. 정당한 법적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고 하는 부분들이 과거사 위원회 조사결과로 나왔고, 그것을 근거로 2012년에 소송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3 년여의 시간을 거쳐서 대법원까지 가서 국가의 배상이 필요하다 그것은 부당한 처벌이었다라고 하는 판결을 받게 되는 거죠. 이 부분이 그나마 유가족들에게는 유족들에게는 그 아픔을 달래는 위로가 됐을 것이고, 이관술 선생님에 대한 명예가 그나마 부분적이나마 회복될 수 있는 단초가 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조강래> 그러고 보면 이관술 선생님은 민족의 해방뿐 아니라 노동자, 농민 등 약자를 위해, 그리고 다양성과 연대의 가치를 위해 최선을 다한 듯 보입니다. 2020년인 지금도 여전히 다양성과 연대의 가치를 지켜야할 순간들이 종종 보입니다. 학암 이관술 선생이 추구한 가치를 오래 생각하고 연구하신 배문석 사무국장께서 보시기에 2020년 오늘, 어떤 이슈에 주목을 해야 할까요?

    ◆배문석> 사실은 우리 사회가 정치적인 이념의 갈등뿐만 아니라 사실은 새로운 전환 시기, 그다음에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기로 가는 과정에 여러 진통들을 겪고 있어요. 사실은 각종 혐오들이 있고, 또 그 혐오를 막기 위해서 개선하기 위한 사람들의 노력들이 지금 상충하는 시기가 저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이관술 선생은 먼저 참교육자였거든요. 그리고 본인 스스로가 자신의 출세가 아니라 자신의 제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독립운동에 자신의 방향을 바꿨던 과정을 본다고 하면 지금의 청년세대에 대한 걱정과 그리고 청년세대들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귀를 열고 그것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들을 분명히 하셨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리고 다양한 갈등이나 혐오를 넘어서서 보다 나은 세상에 대해서 스스로가 움츠려있기 보다는 먼저 해안을 가지고 나서지 않으셨을까. 특히 사회적 약자라고 할 수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 말고도 여러 가지 사회적 약자들이 존재하잖아요.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하기 위한 부분에 나서지 않으셨을까. 제가 조심스럽게 가정법상에서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이승우> 학암 이관술 선생 말고도 우리가 재조명하고 기억해야 하는 울산의 독립운동가들이 더 있을 것 같습니다. 혹시 배문석 사무국장께서 소개하고 싶은 독립운동가가 있으신가요?

    ◆배문석> 여러 분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기존에 언론에서도 많이 다뤄지고 있는 동구에서 민족사립보성학교라고 해서 항일운동에 터전을 일구었던 성세빈 선생님도 있을 거고, 여러 분들이 계실 거예요. 그런데 저는 그분들 말고도 여성독립운동가에 주목할 필요가 있겠다. 울산은 100분 정도가 국가유공자로 서훈을 받으셨는데, 그중에 두 분만 여성분이에요. 전국적으로도 2~3%를 넘지 못하고 있어요. 그래서 언양만세운동 때 3‧1운동 때 총탄에 맞아서 순국하셨던 손입분 여사나, 다리에 관통상의 중상을 입었던 김길천 여사나, 이런 분들은 그렇게 산화하시고 중상을 입었지만 서훈을 받지 못했어요. 여성에 대한 인식이 과거에 여성독립운동가에 대해서 많이 외면하거나 발굴을 꺼려했던 부분이 있었던 걸 수도 있을 거예요. 그래서 이 부분은 지금의 사회적으로 중요하게 하는 젠더적 가치도 있을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가에 남녀에 대한 부분은 없는 거거든요.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청년세대도 그리고 우리 울산시민들도 큰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조강래> 네, 오늘 파워인터뷰는 시간관계상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 될 것 같고요. 배문석 사무국장님 오늘 나와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배문석> 감사합니다.

    ◇조강래> 시사팩토리 100.3 금요판은 여기서 마무리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기술에 이창수 엔지니어, 음악에 길기판, 진행에 조강래, 이승우, 이태인, 조연출에 엄유미, 연출에 김성광이었습니다. 다음주 이 시간에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제가 ‘모두’라고 말하면, 다들 ‘안녕’이라고 외쳐주세요. 모두,

    ◇진행자, 출연자>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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