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28일 오후 청와대에서 스테판 반셀 모더나 최고경영자와 화상 통화하고 있다. 연합뉴스
청와대는 지난 29일 코로나19 백신 개발사인 미국의 모더나와 백신 2천만명분 도입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모더나의 백신은 지금까지 개발된 코로나19 백신 가운데 가장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되는데다 국내 도입 시기도 당초 3분기에서 2분기로 앞당기기로 해 '한국만 백신 도입이 너무 늦는 것 아니냐'는 걱정을 적지 않게 해소했다.
하지만 '백신 도입 늑장론'은 사그라 들지 않았고 더 나아가 '모더나는 백신 공급에 합의한 적이 없는데도 청와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혹이 계속 해서 제기되고 있다.
이같은 주장은 청와대 발표 이후 모더나가 배포한 보도자료를 바탕으로 우익 인터넷 매체와 보수 유튜버들을 중심으로 퍼져 나가고 있다.
이들은 "모더나의 보도 자료를 보면 '한국 정부와 논의는 약속도, 보장도 아니며 보도 내용을 과신하지 말라'고 돼 있다"며 "청와대가 거짓말 한 것 아니냐"고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이들의 주장처럼 모더나는 한국에 백신을 공급하겠다는 합의를 부인하는 보도자료를 냈을까?
모더나 백신. 연합뉴스
모더나는 미국 현지시각으로 29일 '한국에 4천만회(2천만명 분) 분량의 백신을 공급하기로 한국 정부와 논의했다'는 내용의 보도 자료를 배포했다.
해당 보도자료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한국 정부와 논의했다는 본문 부분과 모더나 소개 및 주의 사항을 표시하는 부수적 부분이다.
본문 부분에서 모더나는 "최대한 빨리 국민들에게 백신을 공급하고자 하는 한국 정부의 목표를 지원하기 위해 잠정적으로(potentially) 4천만회 이상의 백신을 공급하기 위한 대화를 가졌다는 사실을 확인(confirm)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제시된 합의(proposed agreement)에 따라 백신 배분은 2021년 2분기가 될 것(would)"이라고 밝혔다.
백신 공급 규모와 시기 등 핵심 내용은 청와대 발표와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일부 우익 진영은 부수적 부분을 문제 삼고 있다.
특히 부수적 부분 가운데 'Forward Looking Statements (예정형 진술)' 조항에 집중하고 있다. 이 조항에서 모더나는 "이 보도자료 상의 예정형 진술 내용은 약속이나 보장이 아니기 때문에 예정형 진술에 부주의하게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러면서 "모더나의 통제 범위 밖에 있는 여러 위험성과 불확실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모더나 최고 경영자와 화상통화 중인 문재인 대통령. 청와대 제공
이를 놓고 일부 우익 매체와 인사들은 '모더나가 한국 정부와 백신 공급을 약속하지도, 보장하지도 않았다는 보도자료를 냈다'며 '청와대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이들이 올린 글과 동영상에는 수백~수천개의 댓글이 달리며 '문○○은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한다' '문○○을 탄핵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모더나가 그동안 발표했던 보도 자료를 훑어보면 이같은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백신과 관련된 대부분의 보도자료에 '약속도, 보장도 아니다'는 '예정형 진술' 주의 사항이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캐나다 정부가 모더나의 백신을 승인했다는 23일자 보도자료에도 "이 보도자료 상의 예정형 진술 내용은 약속이나 보장이 아니기 때문에 예정형 진술에 부주의하게 의존해서는 안된다"는 똑같은 문구가 부수적 부분에 들어있다.
또한 지난 19일 미 질병통제예방센터 백신자문위원회가 모더나 백신의 사용을 권고했다는 보도자료에도 역시 똑같은 '예정형 진술' 관련 주의 문구가 있다.
모더나 코로나19 백신 FDA 승인. 연합뉴스
모더나 백신이 미 FDA의 승인을 받았다는 18일자 보도자료와 같은 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모더나 백신 8천만회 분량을 구매하기로 했다는 보도자료도 역시 마찬가지 문구를 집어 넣었다.
즉 모더나의 보도자료는 확정된 사실에도 '예정형 진술은 약속도, 보장도 아니다'라는 주의 문구를 '기계적'으로 집어 넣고 있는 셈이다.
거꾸로 얘기하면 '약속도, 보장도 아니다'는 문구가 들어갔다고 해서 모더나와 상대방의 논의를 사실무근이라고 치부해서는 안된다는 것.
이처럼 모더나가 '예정형 진술' 주의 표기를 일괄적으로 하는 것은 지난 1995년 수정된 '증권소송개혁법'에 따른 것이다. 이 법은 기업들의 투자 정보 제공 활동을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기업이 예정형 진술을 하고, 변동사항이 발생할 수 있는 요소를 적시하거나 제공된 정보가 잘못됐다는 것을 진정으로 몰랐다면 예정과 다른 결과가 발생하더라도 면책되는 이른바 '안전항' 조항을 두고 있다. 당시 빌 클린턴 대통령은 이 수정법안에 대해 거부권을 행사했지만 미 연방 상하원이 '기업의 자유를 촉진해야 한다'는 이유로 표결을 밀어부쳐 시행되고 있다.
기업으로서는 집단소송을 초기에 봉쇄할 수 있기 때문에 이같은 배경에서 탄생한 '면책법'을 이용하지 않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
결국 모더나가 한국 관련 보도자료에 적시한 '약속도, 보장도 아니다'는 내용은 청와대의 발표가 사실과 다르기 때문에 이를 부인하기 위해 집어 넣은 문구가 아니라 '투자 주의'를 촉구하는 한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기계적' 문구인 셈이다.
이를 두고 '청와대가 거짓말 하고 있다'거나 '모더나가 청와대 발표를 부인했다'는 식으로 보도하는 것은 의도했던 하지 않았건 '가짜 뉴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