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김성기 기자
지난 16일 강원도 고성에서 벌어진 북한 남성 월남 사건 당시, 이미 그가 해변에 상륙한 이후 군 감시장비에 여러 차례 포착됐고 자동화시스템이 가동돼 경보가 울렸음에도 3시간 동안 아무런 대처가 이뤄지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 술 더 떠 이동 경로를 역추적하는 과정에서 군 당국이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배수로가 3개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이 가운데 하나가 월남 루트로 파악되면서 군의 인력 운용과 시설물 관리 등 경계작전 실태에 대한 비판이 제기된다.
군 감축으로 인해 과학화경계시스템 등이 도입된 직후부터 이런저런 우려가 제기됐는데도 제때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합동참모본부는 23일 오전 기자들에게 합참과 지상작전사령부 전비태세검열실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 해안에서부터 이미 5번 포착…알람 2번 울렸는데 감시병 확인 못 해 3시간 놓쳐군 당국에 따르면 해당 남성은 이날 오전 1시 5분쯤 통일전망대 근처 해안으로 올라와 1시 40분에서 50분쯤 해안철책 밑의 배수로를 통과해 철로와 7번 도로를 따라 남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 과정에서 오전 1시 5분에서 38분 사이 해변을 바라보는 군의 감시장비 4대에 이 남성이 5번 포착됐다. 그 가운데 2번은 시스템에서도 이상반응으로 인식해 알람이 울리고 팝업창이 뜨는 일(이벤트)까지 발생했지만 적절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이후 이 남성은 오전 4시 12분에서 14분쯤 남쪽에 있는 해군 1함대와 육군의 합동작전지원소 울타리 경계용 CCTV에 포착됐지만 이벤트는 발생하지 않았다. 위병소 근무자들도 이를 몰랐다.
다시 2분 정도가 지난 4시 16분에서 18분쯤 처음으로 이 남성이 민통소초의 CCTV에 2번 포착돼 식별됐고, 근무자가 상황을 보고해 조치가 이뤄졌다. 모두 합치면 10번 포착됐던 셈이지만 최초 포착으로부터 3시간 동안 군이 몰랐던 셈이다.
조사 결과, 당시 영상감시병은 감지시스템의 기준값을 맞추는 작업을 하고 있었고 경보를 울린 팝업창이 기준값을 맞추는 시스템 창 뒤에 떴다. 원래대로라면 감시병이 이 화면을 확인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았고, 한 번 더 똑같은 일이 반복됐다.
군 관계자는 "감시 범위 내에서 움직임이 있으면 이벤트가 발생하는 과학화경계시스템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며 "2번만 이벤트가 발생한 이유는 (다른 감시장비에서 해당 남성이 포착된) 거리가 너무 멀어서였고, 조사 과정에서 영상을 모두 돌려본 결과 육안으로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는 나중에 영상을 일일이 확인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드러나긴 했지만, 문제의 2번을 제외하고는 근무자가 실시간으로 수상한 점을 느끼기는 어려울 정도로 움직임이 작았다는 의미다.
군 관계자는 "팝업창이 뜨면 경고음이 나오고 경고등도 돌아가며 영상감시병도 이를 보고하고, 상황간부가 같이 확인하는 구조"라면서 "해당 시간대에 상황간부가 유선전화를 통해 부대와 관련된 전화통화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교롭게도 이렇게 됐다. 소홀함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문제의 감시병은 당시 모니터를 통해 여러 대의 카메라가 비추는 화면을 동시에 보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다만 군은 "감시병은 휴대전화를 가지고 있지 않았으며 근무 시간에는 기본적으로 간부만 휴대전화를 사용한다"고 강조했다.
◇ 파악된 배수로 45개, 실제론 48개…허술했던 바로 '그 곳' 통해 월남일대 경계를 담당하는 22보병사단은 해안 배수로가 45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 현장조사를 벌인 결과, 실제로는 부대에서 모르고 있었던 3개가 더 있었다. 군 당국은 이 3개 가운데 1개가 월남 루트가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문제의 배수로 3개 가운데 2개에는 차단물이 잘 설치돼 있었지만, 직경 90cm에 길이 26m 정도 되는 나머지 1개의 배수로에는 해안 쪽 차단물이 그전부터 고정이 잘 되어 있지 않았다. 내륙 쪽에서의 차단물은 아예 없었다.
군은 철도 관련 시설 때문에 구조적으로 사람의 눈이 닿기 어려운 곳에 배수로가 있었는데, 바로 그 배수로가 월남 루트가 됐다고 설명한다. 배수로의 존재 자체에 대해선 "과거 경계부대들은 알고 있었지만 교대를 하면서 인수인계가 제대로 되지 않은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일단 군 당국은 "물의 흐름상 배수로가 확연하게 보이는 곳도 있겠지만, 지형적으로 배수로가 보이지 않는 지역도 흐름이 있으면 배수로가 있겠다고 볼 텐데 그런 점에서 부족했던 것"이라며 실책은 인정했다.
그렇다고 해도 해안경계를 하는 부대는 해뜨기 전 항해박명 시작 시간(BMNT)을 기준삼아, 해안에 부대원들이 직접 들어가 수제선(水際線) 정밀정찰을 해 침투 흔적 등을 찾도록 하고 있다.
군 관계자는 "해당 지역은 평소 정찰하던 곳이 아니었다"며 "해류를 통해 떠내려온 물건들이 많이 쌓이는 지역이고, 이번 현장조사 과정에서도 위험한 곳이라고 판단해 지뢰탐지기를 활용해서 통로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3개의 배수로를 발견했다"고 설명했다.
◇ "상황 개선 안 됐는데 軍 똑같은 얘기 반복"…이미 했던 전수조사 또 한다?
강원도 철원의 육군 6보병사단에서 상황병이 CCTV 모니터를 보며 철책선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 연합뉴스
사실 이번에 드러난 문제점들이 완전히 새로운 사항은 아니며 군 감축 등의 영향으로 변화가 시작되거나,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어느 정도 예견된 것들이었다. 그런데도 군은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
과학화경계시스템이 도입된 뒤로 최전방에서 관련 근무를 해 본 전현직 군인들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화면을 보면서 이상한 상황을 제때 확인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문제를 제기해 왔다.
이들은 새나 동물 등이 지나가도 시스템 경보(이벤트)가 울리는 경우가 많아, 대부분의 상황을 대수롭지 않은 일로 치부했다가 정작 제대로 대처해야 할 실제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는 일들이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상식적으로 사람의 집중력에는 한계도 있기 마련이며, 22사단은 다른 부대들보다 경계선이 길고 휘하 3개 보병여단이 다른 부대 보조 없이 각자 책임구역을 맡아야 해 경계 난이도가 매우 높다.
군 안팎에서는 "지난해 7월 탈북민 월북 사건 이후로 (근무 인원이나 피로도 등의) 물리적인 상황은 전혀 개선되지 않았는데 군이 똑같은 이야기만 반복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단 군은 "과학화경계시스템도 결국 사람이 운용하고, 사람이다 보니 실수를 하게 된다"며 "인공지능(AI)을 통해 패턴을 분석, 사람을 식별하고 경계하며 사람 아닌 것(동물 등)에 대한 오경보를 줄이려 하고 있는데 육군에서 향후 발전방향으로 제시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지난해 7월 '탈북민 월북 사건' 당시 월북 루트로 사용된 인천 강화군 월곶리 근처 한 배수로의 모습. 군은 이 사건 이후 배수로 등에 대한 일제 점검을 지시했다. 이한형 기자
문제의 배수로 3개를 몰랐다는 것도 문제다. 군 관계자는 "(내륙에서 보이는) 안쪽에도 관이 있는데, 왜 못 봤는지 현장 간부들에게 물어봤더니 '길이가 26m나 되고 바다로 연결되는지 몰랐으며 상가에서 나오는 오수가 흐르는 관인 줄 알았다'고 답변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22사단이 배수로를 직접적으로 관리하면서 정체를 충분히 확인해볼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았던 것은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이번에 해당 배수로의 존재가 확인된 것이 바로 그 근거다.
합참은 일단 "합참의장 주관 작전지휘관 회의를 통해 조사 결과를 공유하고 작전기강을 확립하며, 과학화경계체계 운용 개념을 보완하고 철책 밑 배수로와 수문에 대한 전수조사를 통해 조속한 시일 내에 보완하겠다"며 "해당 부대의 임무수행 실태를 진단하고 편성, 시설, 장비 보강소요 등 임무수행 여건 보장 대책을 강구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전수조사는 이미 지난해 7월 '탈북민 월북 사건' 당시에도 지시됐었고, 그 과정에서 해당 부대는 45개의 배수로를 관리하고 있다고 상부에 보고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틀린 보고가 됐으며, 인력이나 장비 등의 보강 없이는 임무수행 여건 개선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 군 당국의 대책에 의문을 제기하는 목소리도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