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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4‧3 짓밟힌 꽃망울, 다시 피어오르다

    [제주4‧3, 짓밟힌 꽃망울⑦]
    학살터서 살아남은 소녀 UN서 증언
    유족회 활동…자기 정체성 찾아
    사회 민주화되며 아픔 점차 치유

    70여 년 전 제주4‧3 당시 군‧경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만 1만4천여 명. 희생자 10명 중 2명은 아이들이었다. 한평생 숨죽여 울었던 아이들은 이제 당당히 학살의 책임을 묻고 있다. 제주CBS는 그동안 역사의 어둠 속에 묻혔던 이들의 비극을 조명한다. 6일은 일곱 번째 순서로 다시 피어오르는 꽃망울들의 이야기를 전한다.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①젖먹이‧임산부도 죽였다…제주4‧3 아동학살 '참극'
    ②제주4‧3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아이들
    ③"마구 때리고 고문"…소녀에게 제주4·3은 '악몽'이었다
    ④제주4‧3 '고난'의 피난길…여린 아이들은 죽어나갔다
    ⑤사회적 낙인 속 고통…제주4·3 학살 고아의 70년 恨
    ⑥불법 재판으로 옥살이…소년들 삶 앗아간 제주4‧3
    ⑦제주4‧3 짓밟힌 꽃망울, 다시 피어오르다
    (계속)

    재작년 6월 세계UN본부에서 열린 인권 심포지엄에서 고완순 할머니(82)가 증언하고 있다.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제주4‧3은 미군정 기간 주민에게 가해졌던 인권 유린‧학살 사건입니다. 유엔(UN)의 설립 취지에 맞게 미국이 4‧3의 진실 해결에 적극적으로 동참해 주기를 요청합니다."

    지난 2019년 6월 20일 미국 뉴욕의 세계UN본부에서 열린 '제주4‧3의 진실, 책임 그리고 화해' 인권 심포지엄에서 고완순 할머니(82)가 한 말이다. '북촌리 학살터'에서 살아남은 9살 소녀는 더는 숨어서 울지 않았다.

    ◇타인과 아픔 공유하며 고통 객관화

    1949년 1월 17일 군이 북촌리 주민 300여 명을 총살한 사건에서 살아남은 고 할머니는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4‧3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생각만으로 그날의 참상이 생생하게 떠올라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으로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 2016년 3월 제주4‧3연구소에서 진행한 '증언 본풀이 마당'에서 처음 아픔을 꺼낸 뒤로 자신의 고통을 객관화했다. 다른 사람과 아픔을 공유하며 4‧3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더 나아가 자신이 국가폭력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난 2019년 6월 세계UN본부에서 열린 '제주4‧3의 진실, 책임 그리고 화해' 인권 심포지엄 모습. 제주4·3평화재단 제공

     


    이후 고 할머니는 전국의 초‧중‧고등학교 학생들과 대학생들이 북촌리 학살터를 방문할 때마다 130여 차례 증언했다. 특히 2019년 6월에 열린 UN 인권 심포지엄에서 UN과 미 당국 관계자에게 당당히 4‧3 당시 미군정의 책임을 얘기했다.

    당시 심포지엄에는 존 메릴 전 미 국무부 동북아실장과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 유엔 외교관 등 200여 명이 참석해 고 할머니의 증언을 경청했다. 자신의 아픔을 억눌렀던 9살 소녀의 모습은 없었다.

    ◇유족회 활동…정체성 찾게 한 통로

    유족회 활동은 4‧3으로 부모를 잃고 홀로 남겨진 '아이들'이 자신의 기억을 사회화하고 자기 정체성을 찾게 하는 통로가 되고 있다.

    4‧3 당시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로 살아온 오순명 할아버지(78)는 현재 4‧3유족회 서귀포시지회장을 맡고 있다. 오 할아버지는 죽기 전까지 아버지를 비롯해 247명이 희생된 정방폭포 인근에 위령탑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서귀포시 정방폭포에서 오순명 할아버지(78)가 증언하고 있다. 고상현 기자

     


    "젊었을 때 어머니, 아버지를 무척 원망하고 미워했거든. 근데 나중에 하늘에서 부모님 만날 거 아니라. 그때 부모님이 '너 정말 그렇게까지 원망했느냐'고 하실까봐서이, 죄송하잖아. 그래서 4‧3 위해서 봉사하는 거라."

    2살의 나이에 아버지를 잃은 故 이중흥 할아버지는 생전에 자신의 대(代)에서 비극이 끝나야 한다며 유족회 결성에 힘썼다.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과 함께 행방불명인 유족회를 만들었다. 향년 71세로 작고한 2018년 6월 직전까지도 학생들을 상대로 4‧3 강의를 했다.

    이 할아버지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아버지만 해도 너무 억울한데, 자식까지 폭도로 대물림되는데 이것은 나의 대에서 정리돼야 합니다. 어머니는 한을 품고 돌아가셨어요. 내가 이 한을 풀어야 한다, 아버지 명예회복을 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사회 민주화되며 아픔도 점차 치유

    4‧3에서 살아남은 아이들은 서슬 퍼런 군사정권 시절 자신의 아픔을 주위에 얘기조차 못 했다. "시국 탓"이라 체념하며 속앓이만 했다. 하지만 지난 2000년 4‧3특별법이 만들어지고, 대통령이 국가폭력에 대해 사과하기 시작하면서 아픔도 점차 치유되고 있다.

    제71주년 4·3추념식 모습. 고상현 기자

     


    지난 2019년 김종민 전 국무총리 소속 4‧3위원회 전문위원 등이 제주연구원을 통해 내놓은 '4‧3피해자 회복탄력성 연구' 보고서를 보면 "민주화 운동은 4‧3피해자의 심리적 안정에 도움을 줬고, 심적인 아픔의 치료에도 한몫을 했다"고 평가했다.

    특히 "4‧3특별법 제정과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대통령의 사과는 4‧3피해자들의 회복 탄력에 가장 큰 긍정적 요소로 작용했다. 또한 사회 환경의 변화 특히 정치의 변화는 4‧3 피해자의 치유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강조했다.

    우리 사회가 4‧3 아동들의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70년 전 제주 땅에 벌어진 비극에 눈감지 말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북촌리 학살 사건 당시 희생된 영아들이 묻힌 너븐숭이 애기 돌무덤. 고상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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