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사건을 수임한 변호사들이 구치소에서 피의자들에게 가장 자주 듣는 말이라고 합니다. 구치소 안 피의자들끼리 'A판사는 집행유예를 잘 주고, B판사는 거의 실형이다. 무조건 피해야 한다. C판사는 얘기는 잘 들어주는데 종잡을 수가 없다' 이런 식의 정보를 교환한다는 거죠.
언젠가부터 언론도 아무렇지 않게 'A판사가 그 재벌총수 사건을 맡았으니, 아무래도 집행유예가 유력하다'는 식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생각해보면 판사가 누구냐에 따라서 집행유예와 실형 여부가 갈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데, 그런 예측이 꽤 많이 들어맞는 것을 확인하곤 합니다.
'작량감경'이란 생소한 단어를 만난 것은 바로 그 지점이었습니다. 판사의 양형재량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작량감경을 통해 베일에 쌓인 양형관행이란 것을 한번 들여다보고자 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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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벌주의 파도 속 깊어지는 판사들의 고민'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
형법 제53조 작량감경 조항은 다른 법률상 감경들처럼 구체적인 사유가 명시되어 있지 않고, 오로지 판사가 판단한 '정상참작 사유'에 따라 법정형을 반토막 낼 수 있도록 규정합니다. CBS노컷뉴스가 판결문 전산등록이 의무화된 2007년부터 2019년까지 '작량감경'이 적용된 판결을 찾아보니, 중범죄(합의부) 사건의 평균 50%에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작량감경 대해부' 기획기사가 나간 후 큰 재량이 너무 남용되고 있다는 비판이 일며 "작량감경을 폐지해 달라"는 국민청원이 올라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비슷한 문제의식을 갖고 취재를 하면서도 가장 고민스러웠던 지점은 현행 법체계가 작량감경을 단번에 폐지하거나 판사의 재량을 모두 없애라고 할 수는 없는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법정형이 '7년 이상'인 주요 범죄 |
△군형법 제5조(반란) △군형법 제20조(불법 진퇴) △군형법 제45조(집단 항명) △군형법 제52조의3(상관에 대한 집단상해 등) △군형법 제58조의3(초병에 대한 집단상해 등) △방사성폐기물관리법 제39조 △산림보호법 제53조 △산림자원법 제71조 △성폭력처벌법 제4조(특수강간 등) △성폭력처벌법 제6조(장애인에 대한 강간·강제추행 등) △방사능방재법 제47조 △의무경찰대 설치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제9조 △재래식무기법 제10조 △특정경제범죄법 제5조(수재 등의 죄)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2조(뇌물죄의 가중처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5조의2(약취·유인죄의 가중처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6조(「관세법」 위반행위의 가중처벌) △특정범죄가중처벌법 제11조(마약사범 등의 가중처벌) 등…. |
여러분의 머릿속에 '가장 중한 죄'를 떠올려보라 한다면 대부분은 살인을 생각하실 겁니다. 살인죄의 법정형은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징역형'입니다. 사형이나 무기징역이 아닌 유기징역을 택할 경우 5년 이상부터 선고하도록 돼 있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법에는 이 살인죄보다 하한이 높은 범죄들이 꽤 많습니다. 법정형 하한이 7년 이상인 범죄만 꼽아도 위와 같습니다. 1억원 이상 뇌물죄처럼 하한이 10년 이상인 범죄도 있습니다. 매일 법정에서 다양한 범죄자들을 보고 이들의 죄의 무게를 재는 판사들은 이 지점에서 혼란을 호소합니다. 쉽게 말하면, 아동성착취범과 살인범을 동급으로 혹은, 전자를 더 세게 처벌하는 것이 맞냐는 것이죠.
여론은 둘 다 엄벌에 처하면 되지 않냐고 합니다. 그러나 근대 형법은 죄를 지은만큼 갚아준다는 응보적 관점이 아니라 범죄자 교화와 사회일반의 범죄예방을 주된 목적으로 둡니다. 범죄자에게 가장 극단의 벌인 사형을 선고한다고 해서 비슷한 범죄가 소탕되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의 역사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자극적인 사건이 발생할 때마다 국회는 획일적으로 법정형을 높이고, 구체적인 정의는 법원에 떠넘겨버리는 일이 반복된다는 게 법원 내부의 시각입니다. 판사들은 "일부 사건에서 형성된 굉장히 높아진 준법의식, 엄벌 태도를 판사들은 물론 수범자들도 실제로 못 따라간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결국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엄벌 여론과 법정형이 크게 높아지더라도, 판사들은 기존에 해오던 선고형량을 확 높이지 못하고 작량감경 등을 통해 비슷한 수준을 맞춘다는 겁니다.
이 과정에서 양형이유가 상세히 기재된다면 그나마 납득할 수 있겠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습니다. 밀려드는 사건에 비해 판사 수는 턱없이 부족하고, 현재 재판 시스템상 양형심리를 충분히 하기 어려운 점도 한 이윱니다. 장시간 법정에 앉아 피고인의 이야기를 듣고, 교화가능성을 꼼꼼히 따져보려 노력하는 판사도 상당수지만, 늘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고 말합니다. 이에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말을 차용해, 줄 수 있는 최하한의 형을 줘 마음의 짐을 더는 경우도 많다고 합니다.
재경지법의 한 판사는 "아닌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양형기준과 기존 판례들에 따라 형량을 정하고 양형이유를 적당히 갖다 붙인다"라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황당하게 여겼던 '진지한 반성', '중고초범', '사회적 기여' 등의 양형이유가 실은 대단한 고심 끝에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여러 현실적인 상황 상 부득이 적은 것에 불과할 때도 있다는 것이죠.
◇'어쩔 수 없는 상황' 타개하려 법원은 무슨 노력 했나'작량감경을 할 수밖에 없는', '양형이유를 길게 쓸 수 없는' 판사 개개인의 여러 불가피한 사정들이 정당하다 볼 순 없어도 처지가 이해가는 면이 없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판사 1인이 처리해야하는 엄청난 소송량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애시당초 이 문제는 판사 개인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법부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개선시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왔는지 물을 수 밖에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사법부의 답변은 여전히 입법부의 잘못을 지적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2011년 작량감경에 구체적인 사유를 붙여 재량행사에 제한을 두려는 정부 개정안이 발의되자 대법원은 "먼저 법정형의 하한을 2배 가까이 낮추어야 하고 구체적 감경사유를 더 늘려야 하며 감경의 폭도 넓혀야 한다"고 의견을 냈습니다. 작량감경에 제한을 걸기 전에 현재 법체계부터 바꾸는 것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후 법원이 문제의 법체계를 개선하기 위해 어떤 목소리를 내왔는지는 쉽게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양승태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은 상고법원 도입이라는 목표에 말 그대로 '올인'하다가 사상 초유의 '사법농단' 스캔들로 휘청거려야 했습니다. 역대 대법원장들과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에 쏟아넣은 열정의 절반만이라도 형법 정상화 작업에 투자했다면 어땠을까요? 형법 개정까지는 아니더라도 판사정원이라도 확대했다면 개개 사건에 더 충실한 양형심리를 할 수 있는 배경이 갖춰지지 않았을까요?
판사의 현장은 법정이고 입법은 국회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연히 사법부에는 법원행정처가 있고, 이러한 문제를 검토하고 개선하는 것은 사법행정의 역할이기도 합니다. 또, 국가의 3대 권력인 사법부가 입법부를 견제하는 방식이 재판에서 자신들의 재량권을 더 크게 행사하는 게 전부라고 한다면, 양자간 힘자랑 속에서 국민의 지위는 더 불안정해질 수 밖에 없을 겁니다.
◇"사법부, 이미 국민에게 제압당했다"…OECD 신뢰도 꼴찌CBS노컷뉴스와 만난 한 전직 판사는 "사법부는 이미 제압당했다"고 표현했습니다. 단순히 사법농단 사태 이후의 일이 아니라 벌써 20~30년 전부터 진행되고 있는 일이라고 말이죠. 선거도 아닌 시험으로 선발된, 얼굴도 평판도 모르는 판사가 내 사건을 가장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결할 것이라는 신뢰가 사법부를 지탱하는데, 국민이 이를 버린지 오래라는 겁니다.
2019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회원국 37곳의 사법시스템 신뢰도를 조사한 결과 한국이 37등. 꼴찌였습니다. 내내 하위권이긴 했지만 꼴찌는 처음이었죠. 당시 대법원은 그 결과를 직면하기 보다는, '사법시스템'에는 사법부만이 아닌 검찰과 교정당국 등도 포함된 것이라며 엉뚱한 문제를 제기하는 데 그쳤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현 정부 유력 인사들의 변론을 주로 맡아온 한 대형 로펌의 전관 변호사가 "형량 1년 차이는 재판부 재량이다. 내가 담당 판사와 가족같은 사이다"라는 말로 의뢰인에게 영업을 한 정황이 최근 언론에 보도되고 있습니다.
2017년에는 피고인이 선고에 불만을 품고 법정에서 난동을 부리자 판사가 징역 1년에서 3년으로, 그 자리에서 형량을 바꿔버린 사건도 있었죠. 1~2년 정도는 구체적인 이유 없이 깎을 수도, 늘릴 수도 있는 것이 판사의 권력인데 국민은 그저 하염없이 신뢰를 보내야 하는 걸까요.
위의 전직 판사는 "사람들이 하급심 선고를 믿지 못하니 굳이 소송비용을 써가며 대법원에 상고를 하는데, 사법부는 하급심의 신뢰를 확보하는 문제보단 상고제도 개선에만 열을 낸다"며 "완전히 잘못된 처방을 하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양형위 출범 후 14년 만에…"1심 양형이유 불충분" 항소심서 첫 지적그나마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은 최근 법원 내에서도 기존의 양형관행에 제동을 거는 시도가 등장했다는 겁니다. 2007년 대법원 양형위원회 출범 후 14년 만에 처음으로 불충분한 양형이유를 지적하는 항소심 법원의 판단이 나온 겁니다.
법원조직법 제87조의7은 양형기준 자체는 법적 구속력을 갖지 않는 권고사항으로 규정하면서도, 양형기준을 벗어난 판결을 할 때는 판결문에 양형이유를 기재하도록 의무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태까지 단 한 번도, 그 양형이유가 불충분하거나 부적절하다고 해서 원심 판결이 파기되거나 지적당한 적이 없었습니다.
2021.3.25. 선고 서울중앙지법 마약류관리법위반(향정) 사건 1심 판결문 |
-법률상 처단형 범위: 징역 1월~30년 -양형기준 권고형 범위: 징역 1년~5년 -최종 선고형: 징역 10월 -유리한 양형이유: 피고인이 범행을 자백하며 반성하고 있는 점. |
이달 10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항소9부(부장판사 장재윤·오현석·최선상)는 1심에서 양형기준 권고범위를 이탈하면서도 부실하게 이유를 기재한 판결에 대해 "법원조직법 제87조의7을 위반했다"며 처음 위법성을 인정했습니다. (다만, 부실한 양형이유가 판결 자체에 영향을 미친 정도는 아니라고 보고 직권으로 파기하지는 않았습니다.)
동종 실형 전과가 있는 마약사범인 피고인에게 양형기준은 최소 1년 이상의 징역형을 권고했지만, 징역 10월이 선고된 사건입니다. 1심 재판부는 양형기준을 이탈한 사유로 "피고인이 범행을 자백하며 반성하고 있다"고 한 줄을 적는 데 그쳤습니다.
이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는 "법에서 요구하는 이유의 기재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재의 충실성과 구체성을 갖춘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지적했습니다.
2021.6.10. 선고 서울중앙지법 마약류관리법위반(향정) 사건 2심 판결문 |
"첫째, 양형이유는 피고인의 구체적 사정을 들어 설득력 있게 기재해야 바람직한데, 양형기준을 벗어난 판결을 하는 경우에는 그러한 기재가 바람직한 차원을 넘어 법원조직법 제81조의7이 특별히 요구하는 바에 따라 반드시 그렇게 기재해야 비로소 적법하다. 둘째, 자백하고 반성하는 다른 많은 피고인들과 이 사건 피고인은 무엇이 다른지가 판결에 기록되지 않았다. … 양형이유 기재의 길고 짧음을 떠나서 적어도 원심 판결의 기재보다는 더 구체적이고 충실하다고 볼 수 있게끔, 피고인의 개별적인 감경사유가 무엇인지 추가로 제시했어야 한다. … 단순히 '양형기준 권고범위를 이탈하는 이유'라고 명시해서 쓸 것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양형기준 개정 필요성 등의 다른 이유라면, 그 또한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게 표현하는 방식으로 적을 수도 있을 것이다." |
모든 약에는 부작용이 있습니다. 부작용이 있다고 약을 없앤다면 병의 치료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현실 세계에서 냉정한 법이 채우지 못하는 빈 곳을 대신할 판사의 재량권은 어떤 형식으로든 존재해야 합니다. 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법원에는 아직도 무엇이 정의인지 성찰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고뇌하는 판사들이 훨씬 많습니다. 이 판사들이 국민 앞에 당당히 등을 펴고 서려 해도 기울대로 기울어진 작량감경 제도, 현재의 양형관행 아래에서는 쉽지 않아 보입니다. 판사들 그리고 사법부의 긍지를 되살리기 위해서라도 70년 가까이 방치돼 온 작량감경 제도의 정비가 시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