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살해된 장준하···2기 진화위 '배후' 밝혀야 ②장준하 의문사···국정원‧기무사가 숨겨온 '검은 그림자' ③장준하 장남 "마지막이란 각오로···"진상규명 호소 (계속) |
고 장준하 선생과 그의 가족들.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아버지께서 국가 공권력에 살해됐다는 사실만 밝혀지면 더는 바랄 게 없어요. 당사자 처벌은 어렵겠지만, 역사적 심판이 중요하니까…."
고(故)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장호권(72) 장준하기념사업회 회장이 2기 진화위가 장 선생의 죽음에 대한 조사를 재개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말이다.
독재정권의 감시와 보복에 시달렸던 장 회장과 유족들은 이제라도 진실이 밝혀지기만을 기대했다.
유족 겨냥한 국가의 보복…가족들 뿔뿔이
사전 구속영장 집행 직전 장호권 회장의 손을 잡고 있는 고 장준하 선생.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장 회장은 지난 1975년 8월 17일 장 선생이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죽음을 맞이한 당시 스물여섯 살 젊은 나이에 가장이 됐다. 어머니 김희숙 여사와 4명의 동생, 결혼한 지 3개월 된 아내까지 책임져야 했다.
그는 평소 아버지와 친분이 있던 기업가들을 찾아가 일자리를 청했지만, 정부 보복에 대한 두려움으로 문전박대를 당하기 일쑤였다. 우여곡절 끝에 취직한 책방도 두 달 만에 해고됐다.
장 회장은 "김옥길 이화여대 총장이 쌀가마를 가지고 와 담벼락 안으로 던지고, 법정 스님은 물을 얻어먹으러 왔다고 하고서는 돈 봉투를 놓고 갔다"며 "주변 도움이 없었다면 굶어 죽었을 수도 있었다"고 돌이켰다.
이듬해 4월에는 백기완 선생이 운영하는 백범사상연구소에 들러 아버지의 죽음을 밝혀달라는 성명서를 작성했다가 괴한 4명한테 습격을 당했다. 턱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고 3개월 간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병원 치료 도중 당시 주한미국대사관으로부터 "장준하 선생이 그토록 염원하던 민주주의가 곧 올 테니 목숨을 부지하라"는 편지를 받고는 가족들을 남기고 도망치듯 말레이시아로 떠났다.
이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장 회장은 귀국했지만, 변한 건 없었다. 그는 안기부에 체포돼 갖은 고초를 겪다 다시 싱가포르로 달아나야 했다.
동생들의 삶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둘째 남동생은 조선일보, 한국일보에서 기자로 활동하다 쫓겨났고, 셋째 여동생은 미국으로 건너가 20여년을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숨어 살았다.
허탈감만 남긴 1기 진화위…"이젠 마침표 찍어야"
고(故) 장준하 선생의 부인 김희숙 여사 빈소에서 조문객을 맞이하고 있는 장호권씨(중앙). 이한형 기자 2003년, 27년간의 떠돌이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장 회장은 정부가 의문사위를 꾸려 장 선생의 죽음을 조사한다는 소식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했다.
새로운 정부가 이전 정부의 치부를 밝혀 줄 것이라는 기대감과 아버지를 죽게 한 이들이 여전히 중추 역할을 맡고 있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까하는 걱정이 앞서면서다.
장 회장은 "대통령은 물론 모든 이들이 목숨을 걸고 임해달라고 당부했다"며 "그만한 각오가 없다면 진실이 밝혀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회상했다.
실제 1~2기 의문사위, 1기 진화위는 국정원과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비협조 때문에 장 선생의 죽음에 누가 직접 관여했는지를 밝혀내지 못하고 활동을 종료했다.
유족들은 언젠가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믿으며 2기 진화위에 기대를 걸고 있다.
장 회장은 "의문사위와 진화위, 부검을 통해 아버지가 사고사가 아닌 타살로 죽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며 "이제는 누가 이런 일을 지시했는지 밝혀낼 마지막 기회라는 각오로 조사를 진행해야 된다"고 당부했다.
이어 "어머니의 생전 소원이 가족들 모두가 함께 모이는 것이었는데, 결국 그 꿈을 이루지 못하게 됐다"며 "이제라도 제대로 조사가 이뤄져 하늘에 계신 어머니가 조금이나마 한을 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