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글 싣는 순서 |
①살해된 장준하···2기 진화위 '배후' 밝혀야 ②장준하 의문사···국정원‧기무사가 숨겨온 '검은 그림자' ③장준하 장남 "마지막이란 각오로···"진상규명 호소 (계속) |
고 장준하 선생이 환하게 웃고 있는 모습.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지난 3월 고 장준하 선생 유족들은 진상규명 요구서를 2기 진화위에 접수했다. 46년 동안 네 번째 국가기구를 상대로 한 조사 요구다.
접수 당시 장 선생의 장남 장호권씨는 "1기 의문사위, 2기 의문사위, 1기 진실화해위에서 모두 진상규명에 실패했다"며 "우리는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믿는다. 그래서 마음이 더욱 초조하고 불안하다"고 심정을 밝혔다.
다행히 2기 진화위는 '장준하 사건'에 대해 22일 조사 개시를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진화위는 조사 개시 이유로 크게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하나는 2013년 3월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가 발표한 유골 감식 결과를 이유로 들었다. 또 하나는 국가정보원의 자료 제공에 협조하겠다는 약속이다.
진화위측은 "장준하 의문사 사건을 비롯해 국정원이 중요 자료를 제공하지 않아 진실규명이 좌절된 사건들의 재조사에 긍정적 영향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히고 있다.
외부 가격 후 추락…사실상 타살 결론
장준하 선생은 해방 전에는 광복군으로 그리고 해방 후에는 백범 선생의 비서로 활동했다. 이후 백범 서거 후에는 <사상계> 사장으로 언론 운동을 했으며, 훗날에는 국회의원으로서 또 재야인사로 박정희 독재와 맞섰던 '민주주의자'였다.
그런 그가 1975년 8월17일 포천시 이동면 약사봉에 올랐다가 하산하던 중 벼랑 아래로 떨어져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당시 경찰과 검찰은 유일한 목격자였던 김용환씨의 진술을 바탕으로 '실족사'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장준하 선생 사인 진상조사 공동위원회'는 지난 2013년 장 선생 유골에 대해 처음으로 과학적 감식을 진행했다. 결과는 실족사에서 타살로 사인이 바뀌었다. 장 선생이 숨진 지 38년만이었다.
지난 2012년 8월 고 장준하 선생 묘소 이장 당시 장 선생의 유해 모습.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당시 감식을 주도한 이정빈 서울대 의대 명예교수(법의학자)는 "장준하 선생의 머리뼈 함몰은 외부 가격에 의한 것"이라며 "가격을 당해 즉사한 이후 추락해 엉덩이뼈가 손상된 것으로 보인다"고 소견을 밝혔다.
외부 가격 후 추락. 사실상 타살이 입증된 셈이다.
이와 관련해서 장준하기념사업회측은 2기 진화위 조사가 시작되면 장 선생 유골에 대한 검안보고서를 제출해 공식화하겠다는 입장이다.
장준하기념사업회 이준영 진실규명담당은 "실족이 아닌 외부 가격에 의한 사망임을 증명하는 법의학감식 증거 등 과학적 증거가 200여 개나 된다"며 "(진화위의) 조사가 개시되면 타살 증거로 제출해 공신력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D-day 3일 전 사망…누가 죽였나
장 선생이 암살된 것이라면 '누가 왜 죽였을까, 배후는 누구인가'가 의문으로 남는다. 베일에 가려져 온 진실을 밝혀낼 수 있느냐가 2기 진화위의 성패를 가를 것으로 보인다.
앞서 2기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2003년 7월1일~2004년 6월30일까지 활동)의 조사 내용을 종합해 보면, 장 선생은 숨지기 직전 '2차 유신개헌 100만인 서명운동'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장 선생은 1974년 1월 '유신개헌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다 군사법정에서 15년 형을 선고받았다가 10개월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음에도 뜻을 굽히지 않았다.
2기 의문사위 조사팀은 그 증거를 찾기 위해 병보석으로 석방돼 병원에 입원한 장 선생을 만났던 법정 스님을 인터뷰했다. 법정 스님에 따르면 장 선생이 서류 뭉치를 주며 "누구누구를 만나 서명을 받아달라"고 했다고 했다. 또 그는 뭉치가 '2차 유신개헌 100만인 서명운동'이었다고 증언했다.
조사팀은 또 1975년 7월 29일 자택에서 장 선생을 만났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증언도 장 선생이 준비한 '거사의 실체'가 서명운동을 가리키고 있다고 판단했다.
김 전 대통령은 당시 만남에서 "내가 어떤 희생을 당하더라도 민주 회복을 위해서 싸우겠다. 당신이 움직일 수 없으니 나라도 움직여서 내가 하겠다"는 장 선생의 말을 기억했다.
장 선생인 준비하던 거사의 실행 예정일은 1975년 8월20일로 알려져 있다. 이날을 3일 남겨두고 장 선생은 예정에 없던 산행을 떠났다가 화를 당했다.
2기 진화위, 국정원‧기무사 협조 기대
1기 의문사위 현판 제막식 모습. 장준하기념사업회 제공
이같은 사실들은 두 번의 1‧2기 의문사위와 1기 진화위 활동을 통해 드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사건의 배후는 드러나지 않고 있다. 당시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국정원과 국군 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의 비협조 때문이었다.
2기 의문사위 고상만 장준하 사건 조사팀장은 "2018년 국방부 적폐청산위원회 간사 위원으로 기무사령부 문서고에 들어가 장준하 선생 관련 사실 관계를 확인했다"며 "기무사령부에 요청하면 이제는 관련 자료 확인이 가능하지 않을까 기대한다"고 조언했다.
2기 진화위도 이번 조사에 국정원 등 관계기관들이 적극적으로 협조해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앞서 국정원은 지난 7일 1960~1980년대 중앙정보부‧안전기획부의 수사과정에서 인권침해를 당한 피해자들에게 공개 사과했다.
국정원은 사과문에서 "2기 진화위에 충실하게 자료를 제공해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에 적극 협조하는 것이 진정한 사과를 완성하는 길"이라고 밝힌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