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말리그넌트'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 스포일러 주의
제임스 완 감독을 떠올리면 역시 그의 영화 시작점이자 가장 잘하는 분야인 '공포'가 떠오른다. 특유의 상상력과 미장센, 그리고 점프스케어의 달인인 제임스 완 감독이 이번엔 관객들의 뒤통수를 짜릿하게 만들 '악성(惡性)'을 뜻하는 제목의 영화 '말리그넌트'로 돌아왔다.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머리를 다친 후 잠이 든 사이, 남편은 끔찍한 모습으로 죽었고 남편을 해친 것으로 보이는 괴한에게 매디슨(애나벨 월리스)도 공격당해 배 속의 아이까지 잃고 만다.
이후 매디슨에게는 누군가의 죽음이 보이는 등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알 수 없는 존재의 연쇄 살인 현장에 초대된 매디슨 앞에 어릴 적 상상 속 친구 가브리엘이 등장한다. 매디슨은 가브리엘과 자신에 얽힌 비밀에 가까이 다가가며 충격적인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외화 '말리그넌트'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정체불명의 살인마 직쏘의 잔혹한 생존 게임을 그린 공포 영화 '쏘우'로 데뷔한 후 '인시디어스' '컨저링' 등 공포 장르에서 두각을 드러낸 제임스 완 감독이 블록버스터와 프랜차이즈, 히어로 무비를 돌다 다시금 자신의 장기인 호러로 돌아왔다.
'쏘우'가 직쏘와 트랩에 갇힌 피해자들 사이 게임이었다면 제임스 완의 신작 '말리그넌트'는 감독과 관객 사이 게임이다. 공포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어딘가 비밀이 숨겨진 것 같은 병원에서 시작한 미스터리는 어딘지 음울하면서도 사연을 가진 주인공 매디슨에게 감춰진 비밀을 뒤쫓도록 만든다.
감독이 장기인 점프스케어를 비롯해 소름 끼치는 음향효과와 일부 편집 등에서는 고전적인 공포의 기운마저 풍기며 관객들에게 공포와 서스펜스를 전달한다. 여기에 제임스 완 특유의 유머 코드가 등장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의 피와 살이 난무하는 살인과 이를 뒤쫓는 형사들까지 더해지며 영화는 복합적인 장르로 나아간다. 감독이 이야기했듯이 '말리그넌트'는 서스펜스와 미스터리, 공포에 지알로 장르(이탈리아 공포 영화 장르)마저 덧대졌다.
감독은 조각 난 퍼즐들을 흩어놓은 후 관객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동시에 후반부에 등장한 반전에 충격을 더한다. 무언가 나올 것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면서도 매번 보여주지는 않으며 관객들과 밀고 당기는 과정을 거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영화 속 조각난 퍼즐들이 하나로 모여 맞춰지는 순간, 영화 내내 끔찍한 살인을 저지르는 동시에 매디슨에게 살인 과정을 보여준 괴이한 존재 가브리엘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 '말리그넌트'는 고어와 슬래셔 무비의 면모를 아낌없이 보인다.
외화 '말리그넌트'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기이하지만 빠른 움직임으로 수십 명의 사람을 다양한 방식으로 잔혹하게 살해해나가는 장면은 피와 살과 뼈의 향연 그 자체다. 정체가 밝혀지고 피의 축제가 시작되는 순간이야말로 이 영화가 다다르고자 했던 지점 중 하나다.
이처럼 자신의 주특기를 발휘하는 와중에 돋보이는 것은 여성과 가족에 관한 이야기다. 기존 질서에 대한 저항이 호러적 은유와 수사를 통해 이뤄진다는 것이 공포 영화의 장르적 재미 중 하나라는 점에서 '말리그넌트'는 여성을 향한 물리적·정신적 폭력에 저항하는 여성 캐릭터를 통해 장르의 역할을 다한다.
폭력적 남성에게서 벗어나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자유를 획득하는 여성의 모습은 영화의 주인공인 매디슨을 통해 드러난다. 임신한 아내에게도 폭력을 휘두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남편, 매디슨 주변 인물들을 잔혹하게 살해하는 가브리엘은 직간접적으로 매디슨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남성들이다.
특히 가브리엘의 경우 가스라이팅(상황을 조작해 상대방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들어 판단력을 잃게 하는 정서적 학대 행위)과 같이 정신적인 폭력과 강압을 통해 매디슨의 신체마저 자신의 의지 아래 둔다. 이는 현실 속 남성들의 폭력으로 인해 고통받는 여성들의 상황을 은유한다.
외화 '말리그넌트'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이런 차원에서 보자면 매디슨은 물리적·정신적 폭력을 휘둘러 온 남성의 억압, 특히 정신적 억압을 이겨내고 가브리엘을 가둠으로써 폭력에서 벗어난다. 매디슨은 흔히 공포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가 피해자로 그려지는 것에 남지 않고, 스스로 적극적인 행동 통해 극복한다. 다시 나타날 거라는 가브리엘의 협박에도 대비할 것임을 이야기하며 반복되는 폭력의 역사에 언제든 다시 저항할 것임을 이야기한다.
이처럼 여성이 여성으로서, 자기 자신으로서 온전한 자아를 회복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와중에 영화는 또한 가족애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가족에 관한 매디슨의 열망은 영화 초반부터 보인다. 매디슨이 영화에서 혈연으로 이어진 전통적 가족 형태를 소망했다면, 가브리엘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가족이란 단지 피만이 아닌 사랑으로 묶인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매디슨이 폭력과 억압에서 벗어나 진정한 자신을 되찾아 거듭나는 과정에서 여성이자 피로 얽혀 있진 않지만 진정한 가족인 시드니(매디 해슨)와의 연대가 빛을 발한다. 이처럼 '말리그넌트'는 피해자에 머무르지 않고 자신을 회복하는 여성, 대안 가족의 의미, 연대 등 요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변화이자 요구되는 덕목들이 공포 장르의 틀을 빌려 이야기되고 있다.
영화의 표현 수위가 걱정일 경우 평소 고어와 슬래셔 특유의 잔혹함을 잘 보지 못하는 관객들은 어느 정도 마음의 대비를 하고 보는 것이 좋지만, 이런 부류의 영화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무난하게 즐길 수 있는 수준이다.
111분 상영, 9월 15일 개봉, 청소년 관람 불가.
외화 '말리그넌트' 스틸컷. 워너브러더스 코리아㈜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