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싱타는 여자들' 속 임미경씨. ㈜영화사 진진 제공1남 7녀 중 막내로 태어난 임미경씨는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 여자는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아버지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평화시장에 '시다'(일하는 사람의 옆에서 그 일을 거들어 주는 사람)로 들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미경씨는 초과 근무 단속을 나온 노조 언니의 소개로 노동교실을 알게 되어 근로기준법을 배우고 노조 활동을 시작했다.
당찬 성격의 미경씨는 노동 조건 개선을 위한 싸움이 있을 때마다 앞장서서 경찰을 몰아붙여 언니들 가슴을 철렁하게 하기도 했다. 그런 미경씨는 노동교실 강제 폐쇄에 항의하는 1977년 9월 9일 농성, 이른바 '9·9사건' 혹은 '9·9투쟁'으로 불리는 일로 구속돼 5개월 실형을 살았다.
지난 13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미경씨 인터뷰는 마치 '미싱타는 여자들'처럼 진행됐다. 영화에서 여성 노동자는 누군가와 마주한 채 쉽게 꺼내지 못했던 당시를 차분히 풀어놓았다. 이혁래, 김정영 감독은 이번에는 카메라를 내려놓고 미경씨 맞은편에 앉아 묵묵히 지난 시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번 어린 여성 노동자의 삶을 마주했다.
오랜 시간 치열했던 삶을 마음 한켠에 담아놓을 수밖에 없었던 미경씨를 위해, 그리고 기억해야 할 그날을 기록하기 위해 이날 인터뷰는 미경씨 이야기를 듣는 시간으로 진행됐다. 두 감독 역시 "오늘의 주인공은 선생님(미경씨)"이라며 "선생님의 이야기를 써 달라"고 부탁했다. 이야기 도중 미경씨는 종종 눈시울을 붉혔다.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임미경씨와 이혁래, 김정영 감독이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진행 중이다. ㈜영화사 진진 제공 평화시장 '시다'가 된 10대 소녀 임미경, 노동교실을 만나다
임미경씨(이하 임미경) : 초등학교를 73년도에 졸업하자마자 옆집 사는 언니를 따라 평화시장에 갔어요. 이 언니가 미싱 탈 때가 됐는데 시다가 없으면 미싱을 못 타니까. 평화시장에 갔는데, 돈을 많이 번다고 했어요. 어린데 이렇게 생각했죠. 돈 많이 벌어서 중학교 가야지. 처음엔 새로운 거에 도전하는 거라 굉장히 재미나더라고요. 시다가 기가 막히게 일을 잘해놓으면 못하는 사람도 1등을 할 수가 있었어요.
우리 '오야(두목, 우두머리) 미싱사'가 꼴등이었는데, 두 달 후 1등이 됐어요.('전태일 평전'에 따르면 오야1, 보조1, 시다2 4인 1조 작업조가 보통이었다) 시다판에서 재단판까지 뛰어가면 '미경이가 지나가면 바람이 분다'고 했어요. 정말 열심히, 죽도록 일한 거죠. 그런데 월급을 너무 조금 주는 거예요. 거기서 그만둔 언니가 거기서 나와서 여기 오면 월급을 더 주니까 오라고 해서 간 곳이 노동교실 바로 옆에 있는 공장이었어요.
거기는 아동복집이었는데, 추석이나 설을 앞두면 밤일을 한 달 이상 하는데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그날도 늦게까지 일을 하고 있는데, 노조에서 언니 2명이 왔어요. 여기 옆에 노동교실이 있으니 배우고 싶으면 오라고 했죠. 배우고 싶으니까 끝나고 노동교실에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다행히 스무 발자국만 가면 노동교실이었어요. 그곳에 가니 이소선(전태일 열사 어머니) 어머님도 계시고 사람들이 있는데 그 분위기가 너무 좋은 거예요.
엄마를 만난 것처럼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노동교실 열심히 다닐 거야' '공부해야지' 생각했죠. 그런데 우리를 가르치러 오는 선생님들이 있는데, 우리가 데모를, 그러니까 이를테면 거기서 농성을 하고 나면 선생님들도 잡혀갔어요. 그러면 선생님을 빼내야 하잖아요. 당시 중부경찰서에 제일 많이 잡혀갔는데, 여길 잡혀가기 전에 선생님을 빨리 탈출시켜야 하니까.
1973년 5월 21일 새마을노동교실 개관식. 전태일기념관 제공이혁래 감독(이하 이혁래) : 나는 잡혀 가더라도 선생님은 빼내야 한다는 건가요?
임미경 : 그렇죠. 경찰들한테 잡혀가면 우린 어리고 힘이 없으니까요. 경숙(영화 출연자 임경숙씨)이랑 나하고는 굉장히 많이 맞았어요. 나이는 어린데 깡따구는 좋고, 이를테면 선봉이었거든요.
이혁래 : 스스로 앞에 나가신 건가요?
임미경 : 어린 나이지만 정의로워야 한다고 생각한 거죠. 우리는 좀 맞더라도 선생님은 잡혀가면 안 된다고 생각했죠.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같이 잡혀가다가 두드려 맞더라도 선생님을 탈출시키고…. 이런 식으로 계속했어요. 누구 하나를 희생하면, 다른 사람이 편해져요. 너무 많이 맞아서 성모병원에 입원하기도 했어요.
80년대는 더 했다고 하는데, 80년대 후배들을 보면 눈물이 나서 미치겠어요. 우리 때도 선두에 선 사람들은 그렇게 많이 맞았는데, 80년대는 얼마나 많이 맞았겠어요. 그땐 노조가 힘도 없던 땐데…. 그때 후배들 보면 정말 미안해요. 너무 미안해요.
1975년 10월 1일 새마을노동교실 수강생 교육 계획 안내문. 전태일재단 제공노동자이자 투사가 된 임미경, 노동교실을 지키기 위해 나서다
임미경 : 그때는 어려서 그냥 '정의는 살아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이소선) 어머니는 항상 '뭉쳐야 산다, 흩어지면 죽는다'고 말씀하셨어요. 너희들이 생각해봐라, 대기업의 경우 밑에 있는 사람들이 한날한시 일을 안 하겠다고 하면 뭘로 먹고 살겠냐. 그러니까 늘 하나가 되어 싸우라고 말하셨어요. 어린 마음에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참 많이 싸웠어요. 많이 싸우고, 병원에 실려도 가고, 감옥도 가고….
감옥에서 나오고 나니까, 경숙이가 그렇게 말하더라고요. 30일 구류를 살았을 때 아무도 안 왔다고 말이죠. 걔가 잡혀간 지 아무도 모르게 다 따로따로 잡아넣었어요. 제가 중부경찰서에 딱 잡혀가니까, 우리가 시위하고 데모했던 것들이 기록이 있고 사진도 있더라고요. 근데 그 사진을 기가 막히게 찍어놨어요. 그 사진 못 찾아요? 그게 너무 궁금해요.
김정영 감독(이하 김정영) : 선생님이 옛날에도 경찰서 사진 찾아달라고 하셨잖아요. 내 젊을 때가 거기 다 있다고요.
임미경 : (경찰이) 누가 시켰냐고 매일 그랬어요. 사진을 탁 던지면서 수천 장을 펼쳐놓는데, 정말 기가 막히게 찍었더라고요. '9·9 사건' 있을 때도 착착착 찍어서 기가 막히게 해놨더라고요. 그러니 안 잡아넣으면 이상한 거죠. 거기 다섯 명이 잡혀갔을 때도 우리는 그 안에서도 단식을 했어요. 그런데 밖에서 농성하면서 단식하는 건 (당연히) 할 수 있어요.
이혁래 : 같이 있으니까요.
영화 '미싱타는 여자들'의 임미경씨가 13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CBS노컷뉴스와 인터뷰를 진행 중이다. ㈜영화사 진진 제공임미경 : 그런데 그 감옥에서 단식하는 건 정말 어렵더라고요. 우리 다섯 명이서 다 밥을 먹지 말자, 이게 재판 자체가 잘못됐다, 그랬는데 한 끼 굶고 두 끼 굶고 세 끼를 굶어야 하는데 너무 힘이 없는 거예요.
저는 7번 방에 있었는데, 그때 이화여대 등 대학생들이 엄청 많이 들어와 있었어요. 저한테 "꼬맹아, 너 왜 왔어"라고 묻길래 "데모하다 왔는데요"라고 했어요. 전 사실 데모라고 생각 안 했는데, 사람들이 데모라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언니들이 "미경아 여기서 굶으면 죽어"라고 말하는 거예요. 남자들은 굶으니까 호수로 죽 같은 걸 입에 막 넣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피가 목에서 넘어오기도 했대요. 그런데 여자들은 그렇게는 안 했어요.
감옥에 있을 때도 그랬어요. 저는 있는 동안에 하루도 안 빼놓고 사람들이 면회를 왔는데, 웃긴 건 면회하려면 옆에서 (간수가) 눈을 부라리면서 막 뭐를 써요. (그들에게) 우리는 간첩이니까요.(당시 정부는 노동운동 하던 이들을 북한 지령을 받은 간첩, 이른바 '빨갱이'로 매도했다. 노동운동가들이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이자 노동운동가인 이소선 여사를 '어머니'로 부른 것 역시 간첩으로 매도된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미경아 건강하게 잘 있어" "곧 재판하면 나오게 될 거야", 맨날 들어보면 똑같은 말로 "밥 잘 먹고 잘 있어" 이렇게 말하고 가니까….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나중에는 간수가 들어오질 않더라고요.
그리고 쫄쫄 굶은 상태에서 재판에 갔어요. 그때 순애 언니(영화 출연자이자 '전태일 평전' 속 열세 살 '시다'의 모델)가 쓰러졌을 거예요. 숙희 언니(영화 출연자이자 청계피복노동조합에서 여성으로는 처음으로 교육선전부장을 맡았던 이숙희씨)랑 나는 깡으로 좀 버텼고요.
<하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