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서초구에서 소속 직원들에게 구청장 예비후보자들의 공약을 전달하며 "실행계획 및 공약에 포함되지 않은 신규 사업을 제출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구청장 후보가 확정되지도 않았는데 공약을 검토하라고 하는 것의 배경에는 현직 공무원을 선거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구에서는 "구청장 업무보고를 미리 준비하기 위한 차원"이라고 해명했지만, 직원들이 "예비후보에게 가져다주고 줄 서려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 나오자 뒤늦게 '취소' 한다는 공지를 내렸다. 하지만 여러 후보 중 국민의힘 예비후보들의 공약만 전달된 것으로 드러나면서 공정성 시비까지 불거졌다.
지난 12일 서초구 공무원들에게 내려온 업무지시 쪽지. 전국공무원노조 서초구지부 제공24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서초구 소속 공무원들은 지난 12일 한 업무지시 쪽지를 받았다. 여기엔 서초구청장 예비후보들의 공약사항을 정리한 파일이 함께 첨부돼 있었다. 쪽지에는 부서별로 '공약 실행계획'과 '공약에 포함되지 않은 신규 사업'을 제출하라는 지시 사항이 담겨 있었다.
더불어 '현안사항'으로 각 팀별 이전 구청장 시기에 진행한 사업에 대한 평가 및 발전방안과 팀별 당면 현안도 1개 이상씩 제출하라는 지시도 있었다. 쪽지엔 "현재 4.6 기준으로 공약사항 보내드리며 추후 공약사항 추가될 때마다 다시 안내드리겠다"며 "13일까지 기한에 맞춰 팀별 제출 부탁드린다"고 적혀 있었다.
이 같은 지시가 내려오자 구 직원들은 '왜 우리가 예비후보의 공약을 검토해야 하느냐'며 반발했다. 통상 선거가 끝난 뒤부터 새 구청장의 공약에 대한 검토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정당별 후보자도 확정되지 않았는데 예비후보의 공약을 검토하라고 지시하자 내부에서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일각에서는 '정치 공무원이 캠프에 줄 서기 하려는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각 후보 캠프에 소속된 퇴직 공무원이 현직 고위 공무원에게 공약사항을 전달하면, 고위 공무원이 부하 직원들을 시켜 실행계획 및 신규사업을 작성하게 한 뒤 다시 전달한다는 것이다.
출마자의 공약을 제시하고 가다듬는 데 현직 공무원이 이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추후 선거운동이나 공약집 제작 등에 사용될 경우 선거법에서 규정한 '공무원 등의 선거 관여 금지' 위반에 해당할 수 있다.
서초구에서 각 부서별로 작성하라고 보낸 서식. 전국공무원노조 서초구지부 제공실제 해당 지시 이후 전국공무원노조 서초구지부 게시판에는 성토하는 글들이 올라왔다. 게시판에는 "가서 먼저 줄대려고 공약 검토해달라고 퇴직 간부가 시켰나", "국힘판이라고 너무 대놓고 하는 것 아니냐", "공약사항 이거 선거법 검토부터 하라", "OOO 후보님 공약사항이 내가 연초 제출했던 신규 사업, 발전 보완사업 제출하라고 했던 제목하고 싱크로율 100%다. 이게 우연일까" 등의 글이 올라왔다.
또 "잘 보이려고 다른 과 직원들 이용하려는 건 지금 시대 분위기에 안 맞다", "경찰에 고발해야 하지 않을까. 이런 건 뿌리 뽑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아직 정당 후보자가 결정되지도 않았는데, 그 정당의 예비후보자 공약을 검토하고 제출하면 무엇에 어디에 쓸까" 등 불만 섞인 글도 게재됐다.
더 큰 문제는 취재진이 각 부서에 전달된 첨부파일을 살펴본 결과 전부 국민의힘 예비후보자들의 공약사항뿐이었다는 점이다. 업무지시가 내려온 12일 기준 서초구 예비후보로 등록한 이는 국민의힘 6명, 더불어민주당 1명, 무소속 1명이었지만, 검토하라고 내려보낸 것은 국민의힘 후보 중 5명의 공약사항 뿐이었다.
선관위 관계자는 "누가 지시했는지, 공약 실행계획을 취합한 보고서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려고 했는지 등이 중요해 보인다"면서도 "특정 정당 후보자들의 공약에 대해서만 실행계획을 가져오라고 지시한 부분은 선거법 위반 논란이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서초구 내부에서 '선거법 위반' 논란이 일자 14일 보낸 '취소' 쪽지. 전국공무원노조 서초구지부 제공논란이 일자 서초구는 다시 '취소' 공문을 내렸다. 지난 14일 구청은 직원들에게 "현재 각 부서에서는 모든 예비후보자의 공약 사항에 대한 검토 등으로 업무 부담을 호소하는 직원들이 많다는 의견을 전달받은 바, 예비후보자들의 공약사항은 참고만 하시고 향후 후보자 확정 시 해당 후보자의 공약사항만 검토해 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의 쪽지를 보냈다. 뒤늦게 무마하려고 한 셈이다.
이후 CBS노컷뉴스 취재가 시작되자 서초구는 "새 구청장 업무보고를 미리 준비하기 위한 차원에서 최초 지시가 내려졌던 것"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구 관계자는 "선거가 끝나고 바로 당선인한테 업무보고를 해야하는데, 이를 미리 대비하기 위해 담당인 기획예산과에서 추진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비후보가 마구 나오는 상황에서 직원들이 해당 공약이 어디 소관인지 헷갈릴 수 있으니, 예산과에서 분류한 뒤 '너희 과 소관이다'라고 알려줘 직원들이 업무보고를 미리 준비할 수 있게끔 도와주려고 한 것"이라며 "직원들에게 편하고 여유롭게 업무보고를 준비하라는 의도로 참고 자료를 보낸 건데 의도와 다르게 받아들여진 것 같다"라고 설명했다.
국민의힘 후보 공약사항만 전달된 것에 대해서는 "(해당 지시가 내려진) 국 서무 회의가 6일 있었는데 그때까지 공약을 발표한 사람은 국민의힘 예비후보자 2명 뿐이었다"며 "이후 각 부서에 지시가 내려진 12일까지도 더불어민주당이나 무소속 예비후보자는 공약을 발표하지 않았기 때문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고 해명했다.
'정식 후보가 아직 정해지지도 않았는데 예비후보 공약을 모두 검토하라고 한 이유는 뭔가'라는 질문에는 "예비후보 단계에서부터 공약을 미리 인지해 업무보고 준비를 열심히 하자는 의도였다"며 "지금까지 서초구는 구청장이 전략 공천이 돼 왔는데, 예비후보가 나와 경선하는 경우가 처음이라 미리미리 준비하자는 차원이었다"고 답했다.
또 '13일까지 제출하라고 한 것은 이를 참고만 하고 여유롭게 업무 보고를 준비하라는 해명과는 배치되는 것 아니냐'고 묻자 "최초 기획예산과에서는 기한을 명시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각 부서와 각 과를 통해 전달되면서 부서별로 제출기한을 정해 생긴 오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하지만 최초 지시 사항에는 예비후보의 공약 실행계획과 공약에 없는 신규사업을 작성하라고 했다가, 취소 쪽지를 통해 '예비후보 공약은 참고만 하라'고 말을 바꾼 상황이라 처음부터 참고만 하려는 의도였다는 해명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구 관계자는 이번 사안은 소관인 기획예산과에서 추진한 것이고, 구청장 권한대행인 부구청장은 개입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현재 서초구는 구청장이었던 국민의힘 조은희 의원이 국회의원 보궐 선거 출마로 사퇴하면서 공석인 상태로 천정욱 부구청장이 권한 대행을 맡고 있다.
반면 공무원 노조 측은 이 같은 지시가 과장 선에서 내려졌을 리가 없다며 어느 선에서 지시가 있었는지 밝혀야 한다고 촉구했다. 전국공무원노조 서초구지부장은 "구청 윗선이나 각 캠프 관계자가 이 같은 일을 기획, 지시한 것은 아닌지 합리적 의심이 든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기준 선관위에 등록한 서초구청장 예비후보자는 국민의힘 소속으론 조소현, 황인식, 전성수, 노태욱, 유정현, 신효정 등이고 더불어민주당은 최은상, 무소속은 조용기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