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해피송 제공※ 스포일러 주의
우리는 우리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려 할 뿐 다른 이의 시선, 특히 나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 처음 만난 세상에서 벌어지는, 어른의 사회를 답습한 아이들의 잔혹한 폭력과 힘의 역학 속에서 방관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는 보다 많은 것을, 보다 낮고 깊숙한 시선에서 바라봐야 한다. '플레이그라운드'는 그 시선을 제공한다.
막 학교에 입학한 일곱 살 노라(마야 반데베크)는 낯선 학교가 무섭다. 아벨(군터 뒤레)은 동생 노라를 위로하지만 사실 아벨도 학교가 두렵다. 점차 친구도 사귀며 학교생활에 적응해 가는 노라는 우연히 아벨이 친구들에게 괴롭힘당하는 걸 목격한다. 노라는 어른들에게 이 사실을 알리려 하지만 아벨은 노라가 그저 침묵하길 바란다.
'플레이그라운드'는 일곱 살 노라와 오빠 아벨이 맞닥뜨리게 된 '학교'라는 세상을 아이의 눈높이와 심리 상태에 초밀착해 놀랍도록 사실적으로 담은 영화로, 제74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돼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 등 전 세계 영화제 30개의 트로피를 휩쓸었다. 또한 제94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벨기에 출품작으로 선정돼 다시 한번 주목받은 작품이다.
외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해피송 제공학교 안 폭력을 담아내려는 '플레이그라운드'의 카메라는 주인공 노라의 시선에 맞춰 시종일관 낮은 위치에서 노라의 주변을 비춘다. 물리적으로든, 정서적으로든 어른들은 자신보다 낮은 곳에 위치한 아이의 세계를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노라와 같은 시절을 거쳤음에도 이미 높은 시선을 갖게 된, 어른이 된 우리는 노라의 눈높이에 맞춘 카메라 덕분에 철저하게 노라의 시선에서 노라와 아이들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특히 영화는 극단적인 클로즈업, 핸드헬드, 그리고 얕은 피사계 심도를 통해 만들어 낸 오프스크린(off-screen, 출연자 모습이 화면에 나오지 않은 상태)를 통해 노라의 세계를 더욱더 감각적으로 관객에게 전달한다. 노라 외에 대부분의 주변 인물은 흐릿하게 보인다. 아이는 자신에게 관심 있는 것들에 초점을 맞추고, 카메라는 그런 노라의 시선을 대변한다.
영화는 '학교'라는 공간을 처음 만나게 된 노라의 모습, 아빠나 오빠와 떨어져 낯선 공간, 낯선 아이들 사이로 들어가길 꺼리는 모습으로 시작한다. 두려움으로 시작한 노라는 점점 친구들을 사귀어 가고, 신발 끈을 묶고 친구들과 함께 운동장에서 노는 시간 등을 배워간다. 그러나 오빠 아벨이 친구들에게 폭행당하고 심지어 쓰레기통에 갇히는 일을 목격하게 된다. 그렇게 운동장은 폭력이라는 힘의 역학이 존재하는 잔혹한 공간으로 변한다.
잔혹한 아이들 세계 속의 폭력과 혐오, 차별을 두고 어른들은 "그 나이엔 싸우기도 해"라며 아이들의 문제, 단순한 싸움이나 장난 정도로 치부한다. 아벨에 대한 노라의 걱정을 보편적인 문제로 뭉뚱그리며 어른들은 방관자가 되어간다. 그런 어른들 사이에서 문제의 본질과 심각성을 꿰뚫어 보는 건 노라뿐이다. 어른들은 자신들의 시선 아래에서 벌어지는 일, 즉 노라의 시선에서 바라봐야 볼 수 있는 일들과 그 사이 촘촘하게 뿌리 박혀 있는 폭력을 보지 못하고, 보지 않으려 한다.
그렇기에 이 영화에서 카메라의 시선이 갖는 의미는 매우 중요해진다. 보편적인 세상 속에 감춰진 특수한 세계가 가져오는 폭력이 어떤 비극으로 이어지는지를 진지하고 자세히, 사려 깊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외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해피송 제공노라의 친구들은 왕따 당하는 아벨을 놀리고, 말에 담긴 의미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혐오 발언을 내뱉는다. 그리고 결국 노라까지 자신들의 무리에서 배제하기 시작한다. 배제된 노라는 운동장 안에서도 구석으로 떠밀려 나게 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언어적·물리적 폭력을 당한 노라는 오빠를 부정하고 원망하는 마음을 갖게 된다.
학교에서, 운동장에서 벌어지는 세계는 어른들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잡아먹히지 않으려면 잡아먹어야 한다. 이처럼 운동장에 존재하는 힘의 역학은 부모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이야기까지 담아낸다. 노라의 아빠는 실업자고, 엄마 없이 홀로 아이들을 돌본다. 이러한 상황을 아이들은 이상하다 여기고, 그것이 학교라는 사회에서 이상한 일이라는 걸 감지한 노라는 아빠에게 왜 다른 부모들과 다른지 묻는다. 이는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 침투한 어른들이 일군 사회가 만들어낸 폭력이다.
결국 힘의 역학이 존재하는 운동장에서 차별적이고 폭력적인 행동과 언어는 아이러니하게도 폭력과 차별에서 벗어나는 수단이 된다. 폭력이라는 힘에서 우위를 점하지 않으면 폭력의 먹잇감, 즉 피해자가 된다. 노라의 오빠 아벨 역시 마음속에 폭력의 후유증과 상처를 안고 스스로가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가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아이들이 학교라는 작은 사회 안에서 어떻게 폭력을 경험하고 학습하고 휘두르게 되는지, 그리고 이를 통해 적극적인 혹은 소극적인 가해자가 될 것인지, 아니면 방관자가 될 것인지, 그도 아니면 피해자가 될 것인지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길에 놓인다.
외화 '플레이그라운드' 스틸컷. 해피송 제공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영화는 노라의 눈높이에서 모든 것을 비추고, 노라를 중심으로 보여준다. 이로 인해 관객들은 노라의 시선을 맞추지 못하는 영화 속 어른들과 달리 노라에 이입하고 공감하게 된다. 학교라는 잔혹한 정글 속에서 노라가 겪는 모든 일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노라가 상처받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해줄 수 없다는 생각에 무력감마저 느낀다.
여기서 노라의 선택은 관객들에게 수많은 감정을 전달한다. 폭력을 목격하고 유·무형의 폭력을 온몸으로 받아낸 노라는 피해자와 방관자 사이를 오가다 결국 운동장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다른 아이를 괴롭히던 아벨을 향해 달려가 꼭 끌어안는다. 상처받은 노라가 상처받은 아벨을 끌어안는 모습을 보며 스크린 밖에서 방관자로 존재했던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놀랍게도 '플레이그라운드'는 감독의 첫 작품이다. 이처럼 날카로우면서도 경이로운 데뷔작을 만든 로라 완델의 다음 행보가 기다려지고 기대된다. 또 어떤 공간을, 어떤 인물을, 어떤 상황을 어떤 시선으로 담아낼지 보고 싶다.
72분 상영, 5월 25일 개봉, 12세 관람가.
외화 '플레이그라운드' 메인 포스터. 해피송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