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조현동 외교부 1차관 주재로 첫 회의가 열리는 일제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관련 민관협의회에 참석하는 강제동원 소송 피해자 대리인단과 지원단이 서울 도렴동 외교부 청사 입구에서 입장을 밝히는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일제 강제징용 배상 문제의 해법 찾기가 본격화되면서 한일관계 회복에 대한 기대감이 싹트고 있지만 동시에 속도전식 진행에 따른 우려도 제기된다.
특히 일본 전범기업의 국내 자산 매각(현금화) 시점에 너무 얽매일 경우, 자칫 굴욕적인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같은 외교참사가 되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외교부는 지난 4일 강제징용 문제 민관협의회 첫 회의에서 피해자들의 고령화와 일본 기업 자산 현금화 시점이 임박한 점을 들어 가능한 조속한 해결 방침을 강조했다.
박진 외교부 장관. 박종민 기자앞서 박진 외교부 장관도 지난달 말 방송 출연에서 "긴장감을 가지고 속도감 있게 진행하겠다"고 밝혔다.
우리 법원의 현금화 결정이 이르면 8,9월 예상되는 점으로 볼 때 남은 시한이 촉박한 것은 사실이다. 일본 측은 만약 현금화가 실현될 경우 한일관계가 파국을 면치 못할 것이라 경고하고 있다.
문제는, 그렇다고 현금화 시점을 마치 마감시한처럼 정해놓고 서두를 경우 졸속 해법을 도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2015년 위안부 합의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넘기지 않는다는 목표 하에 쫓기듯 협상에 임하다보니 스스로 협상력을 떨어뜨린 패착이 컸다.
물론 외교부는 시한과 해법을 미리 정하지 않은 채 피해자 및 각계각층의 의견을 충분히 경청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민관협의회에 참석한 피해자 측에 따르면 조현동 외교부 1차관은 4일 회의에서 "8월은 한일관계에 중요한 시기이므로 8월이 되면 의견(해법)을 발표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정부 입장이 엇갈리며 혼선과 오해를 낳는 대목이다.
민관협의회의 성격도 모호한 측면이 있다. 외교부는 위안부 합의 때와 달리 피해자들과의 투명하고 공개적인 사전소통을 홍보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위안부 합의는 기밀 유지가 필요한 정부 간 협상이었던 반면, 강제징용 해법은 사인(피해자-기업) 간의 민사소송 판결 이행을 둘러싼 문제다. 정부가 자국 국민의 권익을 위해 사전소통을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직무이다.
무엇보다 민관협의회가 단지 의견수렴 기구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역할을 할 것인지가 분명하지 않다.
외교부 당국자는 "협의회에서 어떤 방안을 마련해서 도출하기보다는 정부가 안(해법)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책 결정은 어디까지나 정부의 몫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민관협의회는 절차를 밟기 위한 들러리에 불과하다는 일각의 의구심을 뒷받침하게 된다.
박종민 기자피해자 측은, 이미 서로 다 알고 있는 입장을 또 다시 듣기 위한 목적이라면 민관협의회가 굳이 무슨 소용이냐는 주장이다.
만에 하나 정부가 민관협의는 형식적으로 거친 뒤 피해자가 수용하기 어려운 해법을 강행하려 할 경우 문제는 심각해진다.
위안부 합의에 이어 또 다시 피해자들을 기만한데 따른 후폭풍은 감당하기 힘든 수준일 것이다.
사실 강제징용 해법은 민사소송의 성격상 정부도 권한이 제한적이다. 현금화라는 '시한폭탄'을 멈춰 세울 수 있는 것은 오직 원고(피해자)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의 섣부른 해법은 사법주권 무시 등에 따른 엄청난 반발을 낳는 것은 물론 결과적으로 한일관계를 오히려 더 악화시킬 가능성이 크다.
민관협의회에서 현금화가 임박한 3건의 대법원 확정판결을 우선 논의하기로 한 것도 분란의 불씨가 될 수 있다.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나머지 67건의 관련 소송(피해자 1천여명) 해법까지 좌우하는 사실상의 선례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영환 민족문제연구소 대외협력실장은 "정부가 일단 현금화를 멈추는 것만 생각하다 보면 다른 피해자들이 반발했을 때 방법이 없다"며 "전체 피해자에 대한 종합 청사진을 세워놓고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