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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B컷]"안 된다고 하지 마세요"…'볼보 급발진' 재판과 디스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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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법정B컷]"안 된다고 하지 마세요"…'볼보 급발진' 재판과 디스커버리

    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온라인커뮤니티 캡처 온라인커뮤니티 캡처 
    2010년대 말은 자동차 산업의 '대 변혁기'로 꼽힙니다. 하이브리드 자동차를 시작으로 전기자동차, 수소전기자동차 등 새로운 형태의 자동차들이 속속 등장했죠. 기존 내연 기관 자동차 역시 각종 전자 장비가 탑재되며 고도화가 이뤄졌습니다. 자동차 부품의 고도화가 이뤄진 만큼 법정에서 늘어나고 있는 소송이 '급발진' 소송입니다. 언론 보도 등을 통해 종종 접하는 내용이기도 하죠.

    오늘 법정B컷에서 볼 재판은 최근 한창 진행 중인 '볼보 S60 급발진 소송'입니다. 급발진이라고 주장하는 운전자 측은 여러 실험을 해보자며 '증거 조사'를 신청하고 있는 반면, 외국계 자동차 회사의 변론을 맡은 대형 로펌은 '이미 여러 조사가 이뤄졌다'라며 부정적인 입장입니다.

    그렇다면 재판부는 이 증거 조사 절차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오늘 법정B컷은 볼보 급발진 소송의 진행 경과와 함께 대한민국 법원에 부는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논의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하자'는 자와 '하지 말자'는 자의 싸움… 재판부 "할 겁니다"

    먼저 간단하게 사건을 보겠습니다. 운전 경력 23년의 50대 여성 A씨는 지난 2020년 10월, 경기도 판교도서관 인근에서 간단한 업무를 본 뒤 자신의 차량에 탑승합니다. 시동이 걸려있는 상태였고, A씨는 과일을 사기 위해 다시 차에서 내립니다. 과일을 산 A씨는 통화를 하며 차량에 다시 올랐습니다. 그리고 불과 몇 초 뒤 차량은 굉음을 내며, 판교도서관 일대를 내달리기 시작합니다.

    어린이 보호구역과 3개의 사거리를 빠른 속도로 지나쳤고, 신호등과 과속방지턱을 무시한 채 주행을 이어갔습니다. A씨는 "이거 이거 안돼 안돼"라며 소리를 내질렀지만, 차량은 감속 없이 최대 120km의 속도로 500m를 달렸고 인근 국기게양대에 충돌하고서야 멈춰 섰습니다. 이 사고로 A씨는 목뼈와 얼굴뼈 등이 부러져 전치 20주가 넘는 부상을 입었습니다.

    당시 도로 폐쇄회로(CC)TV 등에 촬영된 영상을 보면 차량이 급가속을 하기 직전까지 A씨의 차량 후미등에선 빨간 불, 즉 브레이크 등이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급가속을 하며 빠른 속도로 달리는 순간에도 차량은 보행자와 다른 차를 이리저리 피하며 주행을 이어 갔습니다. 중앙선을 넘어갔다가 다시 정상 차선으로 돌아오고, 또 차선을 정확히 맞춰 주행하는 모습도 찍혔습니다.



    A씨는 급발진 결함을 주장했고, 볼보는 운전자가 개입한 실수라고 맞서면서 그렇게 볼보 급발진 손해배상 소송이 시작됐습니다. 이번 재판에서 또 흥미로운 점은 '폭스바겐 디젤게이트' 소송 때 맞붙었던 변호사들이 다시 만났다는 겁니다. A씨 측은 당시 폭스바겐 차주들을 변호했던 하종선 변호사를 선임했고, 볼보 측은 폭스바겐 변호를 맡았던 로펌 김앤장을 선임했습니다.

    급발진 여부는 '차량이 한 것이냐' 아니면 '운전자가 개입한 것이냐' 두 가지 경우의 수를 두고 싸우는, 어찌 보면 간단한 싸움이지만 사실 이를 증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 현행법상 차량 등의 결함에 대한 1차 입증 책임은 소비자에게 있습니다. 즉, 이 사고가 소비자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님을 증명해야 비로소 제조업체에게 입증 책임이 생기는 겁니다.

    이렇다 보니 이번 재판에서 A씨 측은 사고 이유를 밝혀 보자며 다양한 증거 조사를 신청합니다. △ 차량 음향 분석을 시작으로 △ 블랙박스·CCTV 영상 분석 △ 차량 부품(파킹폴)에 대한 감정 △ ASDM(Active  Safety Domain Master) 감정을 요구합니다. 볼보 측 변론을 맡은 김앤장은 재판 개시 전 준비 서면에서부터 증거 조사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보입니다. 불필요한 절차라는 겁니다.

    '하자'는 주장과 '하지 말자'는 주장 사이에서 재판을 맡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15부(최규연 부장판사)는 어떤 입장이었을까요?

    22.07.06 서울중앙지법, 볼보 상대 2억 원 손해배상 소송 첫 변론 기일 中
    재판부
    "사안과 내용 등이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내용이어서 증거 조사 신청을 되도록 채택할 것이니 '채택하면 안 된다'는 식의 의견은 내지 마세요"
    "감정이 필요하거나, 검증이 필요하다는 등의 방향으로 의견을 내는 것이 재판을 진행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날 법정에서 재판부는 증거 조사에 대한 강한 의지를 드러냈습니다. 특히 볼보 측을 향해선 증거 조사에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 달라고 요구까지 했습니다. 재판부는 사고 차량과 똑같은 모델을 법원 주차장으로 끌고 와 직접 살펴보겠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재판부의 이런 의지는 두 번째 변론이 열렸던 지난 8월 24일 재판에서도 이어졌습니다. A씨 측이 블랙박스 영상을 대법원 특수 감정인인 이철형 음향 분석가에게 감정을 맡기자고 요구했고, 볼보 측 김앤장이 이미 국과수 조사 내용이 있다며 난색을 보이자 재판부는 이렇게 말합니다.

    22.08.24 서울중앙지법, 볼보 상대 2억 원 손해배상 소송 두 번째 변론 기일 中
    재판부 "첫 번째 영상 감정은 이철형 감정인은 어떤지 확인해보겠습니다. 영상 감정은 법원에도 있을 것 같습니다. 피고(볼보) 측은 의견을 내지 않은 것 같은데요?

    볼보 측 변호인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내용을 보면 두 가지가 명백합니다. (중략) 이미 스틸 단위로 국과수가 다 해놓았습니다"

    재판부 "원고 측에서 비용을 내서 하겠다는데, 제가 굳이 안 할 이유는 없잖아요"
      

    이처럼 재판부가  증거 조사에 강한 의지를 보이자, 최근 변론에서 볼보 측도 증거 조사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다만 아직 볼보 차량 내 ASDM 감정에 대해선 의견을 좁히지 못한 상태입니다. 차량 운행 당시의 각종 데이터를 수집·처리하는 ASDM에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감정하자는 A씨 측 주장에 볼보는 해당 데이터를 추출할 장비가 국내에는 없어 볼보 스웨덴 본사로 보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A씨 측은 볼보 문제를 볼보가 감정하면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오겠냐는 입장입니다. A씨 측은 볼보 본사로부터 추출 장비를 받아 오거나, 또는 미국 등으로 보내 감정을 받자고 제안한 상태입니다.

    서울중앙지법, 볼보 상대 2억 원 손해배상 소송 양측 준비서면 中
    볼보 측 "이 사건 차량에서 데이터를 추출하거나 분석할 수 있는 장비를 보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설령 ASDM 데이터에 대해 분석하는 경우에도 원고들이 ASDM 모듈을 볼보 제조사인 Volvo Car Corporation에 보내서 분석해야 합니다"

    A씨 측 "피고의 스웨덴 본사로 ASDM을 보내게 되면 ASDM에 저장된 데이터가 손상될 수 있고 피고의 스웨덴 본사가 객관적으로 정확한 분석을 할 가능성이 전혀 담보되지 않습니다. 장비를 국내로 인도 받아 감정인에게 제공해서 감정이 신속하게 이뤄지도록 해야 합니다"

    재판부는 양측의 의견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조만간 본격적인 증거 조사 절차를 진행할 것으로 보입니다.

    디스커버리 도입 논의하는 법원…실체적 진실에 다가설까


    여느 소송처럼 급발진 소송은 양측의 의견이 첨예하게 엇갈립니다. 급발진 결론이 난 경우도 있지만, 운전자 과실로 드러난 경우도 있습니다. 수만 개의 부품이 들어간 자동차라는 제조물 특성 상 급발진 여부를 가려내는 데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합니다. 그렇다 보니 재판에서의 증거 조사는 실체적 진실에 조금이라도 다가 가기 위한 절차인 셈입니다. 자동차 회사든, 소비자든 최소한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하는 것이 재판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마침 최근 법원에도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논의에 불이 붙었습니다. '소송 전 증거 수집 제도'로도 불리는 디스커버리 제도는 쉽게 말해, 재판에 앞서 양측이 서로 필요한 자료, 증거 등을 요구하는 제도입니다. 서로 필요한 자료를 받을 수 있고, 공개되는 만큼 소송 당사자 간의 '정보 불균형'이 해소될 수 있습니다. 법관들 역시 사건을 판단하는데 있어 충분한 자료를 얻는 효과가 기대됩니다.

    법원행정처 김형두 차장과 대한변호사협회 이종엽 회장이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가운데, 법원은 최근 8월, 법관들을 상대로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에 관한 설문도 진행했습니다.

    국내에서 어느 때보다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가운데, 법조계는 그 이유 중 하나로 다른 국가와 비교해 높은 우리나라의 민사 재판 '항소율'을 꼽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1심 민사 재판 결과에 불복해 다시 소송에 나선다는 겁니다.

    실제로 법원행정처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민사 합의 1심 재판에 대한 항소율은 1991년 32.1%에서 계속 증가해 2021년 기준 43.5%에 달하고 있습니다.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1심 재판 결과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인데, 법조계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소송 당사자들이 1심 재판에서 충실한 심리가 이뤄졌지 않았다고 느낀 것"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앞서 본 볼보 급발진 손해배상 소송에선 적극적인 증거 조사 분위기가 느껴지지만, 모든 재판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한 변호사는 "법관의 의지에 따라 재판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진다"라며 "결국 운도 따라야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강력한 증거 조사를 가능케 하는 절차를 제도화해 충실한 심리를 해보자는 것이 디스커버리 도입론자들의 주된 근거입니다. 물론 우려의 목소리도 있습니다. 재판에서의 절차가 늘어나는 만큼 소송 비용, 즉 변호사들에게 지불해야 할 비용이 올라가는 것은 불가피합니다. 소송 과정에서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될 수 있다는 말도 나옵니다. 또 특허 사냥꾼, 기술 사냥꾼들의 무분별한 소송과 디스커버리 제도 악용에도 대처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디스커버리 제도 도입 논의는 그 어느 때보다 급물살을 타고 있습니다. 통계가 보여주듯 그 어느 나라보다 높고, 좀처럼 내려가지 않고 있는 우리나라의 항소율, 그리고 이에 대응해 실체적 진실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려는 움직임이 아닐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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