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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기자의 슬리퍼와 도어스테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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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시론/칼럼

    [칼럼]기자의 슬리퍼와 도어스테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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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십년 전에나 가능했던 기자들의 슬리퍼 차림
    MBC 기자의 선명한 '삼선 슬리퍼'가 주는 불편함
    그렇다고 단번에 도어스테핑을 중단하다니
    윤석열 대통령의 적대적 언론관으로 이어지면 안돼
    '슬리퍼가 윤 대통령 시대 상징을 없애버렸다'는 평가 없기를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해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하는 모습. 연합뉴스
    부끄러운 고백 하나. 지난 주말 MBC 기자와 대통령실의 충돌을 보니 호랑이 담배먹던 시절 기억이 났다.
     
    30여년 전 경찰 출입기자 시절 기자실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먹다남은 김치찌개와 자장면을 덮어높은 신문 쪼가리들에 수북한 담배꽁초들, 여기저기 벗어놓은 옷가지에 나뒹구는 세면도구들이 마치 난민 수용소를 방불케했다.
     
    실내금연이 당연한 요즘 후배 기자들은 이 보다는 더 정돈된 환경에서 일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시 경찰출입 기자들의 복장은 또 어떠했을까? 서울역 노숙자가 취재기자를 같은 노숙자로 알고 무료급식소를 친절히 안내해줬다는 소설같은 실화도 있었다.
     
    새벽부터 사건·사고를 찾아 헤매는 경찰 출입기자들 중 상당수는 기자실에 들어오면 추리닝으로 갈아입었다. 신발은 편한 슬리퍼가 대세였다.
     
    그러다보니, 형사계는 물론 정보과, 경무과 등 경찰서 내를 가끔 슬리퍼 차림으로 돌아다니곤 했다.
     
    픽사베이 제공픽사베이 제공
    필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필자에게 슬리퍼가 사라진 것은 이른바 '시경캡'이라고 불리는 서울경찰청 출입기자 때였다.
     
    새벽보고를 마치면 아침식사를 위해 무궁화식당이라고 불리는 간부식당에 아침식사를 하러 가곤했는데, 항상 서울청 로비 정면 의경 초소를 지나야했다.
     
    언제부터인가 몇몇 젊은 의경의 기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곱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서울치안의 사령부인 엄숙한 서울경찰청을 추리닝 차림에 슬리퍼를 질질 끌고 다니는 기자가 못마땅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마음. 의경의 그런 따가운 시선을 느낀 이후, 기자는 추리링과 작별했고 슬리퍼는 기자실 내부로 한정했다.
     
    지난 18일 MBC 이 모 기자와 대통령실 이기정 홍보기획비서관 사이에 벌어진 설전의 여파가 작지 않다.
     
    이 기자는 최근 MBC의 최근 보도를 "악의적"이라고 규정한 윤석열 대통령의 발언에 "뭐가 악의적이란 거냐?"며 항의성 질문을 던졌다.
     
    이기정 비서관이 이를 가로막자 언론자유까지 언급되는 거친 언쟁으로 확산됐다. 같은 기자 출신인 이기정 비서관과 MBC 기자 사이에 반말과 쌍욕이 나오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로 험악했다.
     
    대통령실은 이를 "심각한 사안"이라고 규정했고 급기야 21일 윤 대통령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도어스테핑(출근길 문답)이 중단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대통령실 청사 1층 로비에는 대통령의 동선을 가리는 가림막까지 등장했다.
     
    MBC 기자와 비서관 간의 설전 동영상은 유투브 등으로 퍼지면서 주말 사이 논란이 됐다.
     
    국민의힘 김종혁 비대위원 페이스북 캡처국민의힘 김종혁 비대위원 페이스북 캡처
    여권 인사들은 하나같이 MBC 기자의 무례함을 지적했다. "기자라기보다 주총장을 망가뜨릴 기회를 찾는 총회꾼 같다" "슬리퍼로 대한민국 언론 수준을 한 큐에 날려버렸다" "대통령 회견장에서 슬리퍼 신고 팔짱 끼고 시비걸듯 질문하고 소리지르는 기자를 보고 깜짝 놀랐다. 난생 처음 봤다"라는 맹비난이 쏟아졌다.
     
    동영상을 다시 보니 MBC 기자의 '삼선 슬리퍼'가 유난히 선명해보였다. '대통령 출근길 취재에 슬리퍼라니?'라는 아연실색에 필자의 초년병 시절 슬리퍼가 오버랩됐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과거 검찰 경찰 출입기자 시절에는 급한 일이 발생하면 기자실에서 슬리퍼 차림으로 달려나가곤 했다. MBC 기자를 맹비난한 기자 출신 정치인들도 그 옛날 기자 시절 추리닝에 슬리퍼 차림으로 함께 돌아다닌 기억이 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었다. 과거나 지금이나 슬리퍼 취재기자는 용납되지 않는다.
     
    대통령의 뒤통수에 고함을 친 것보다 국민들의 시선이 곱지 않은 이유다.
     
    그렇다고 윤석열 대통령의 도어스테핑을 단번에 중단한 것은 너무 성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마친 뒤 집무실로 향하는 모습. 연합뉴스윤석열 대통령이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로 출근, 기자들과 질의응답을 마친 뒤 집무실로 향하는 모습. 연합뉴스
    도어스테핑은 과거 구중궁궐에 갖혀있던 대통령들의 불통을 깨는 윤 대통령의 소통 의지이자 용산시대의 의미이기도 하다.
     
    또, MBC 기자의 교체를 요구하거나 출입 징계를 주겠다는 대통령실의 거론도 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이번 MBC 기자의 태도불량이 나비효과처럼 윤 대통령의 적대적인 언론관으로 이어질까 우려된다.
     
    지난 주말 한국갤럽의 여론조사에서 대통령 지지율은 다시 20%대로 떨어졌고 21일 리얼미터 여론조사도 1.2% 하락한 33.4%에 그쳤다.
     
    역대 대통령 중에서 언론과 싸워서 득을 본 대통령은 없다. 언론은 국민과 소통하는 창구이자 국정의 동반자이자 훌륭한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존재다.
     
    윤 대통령으로서는 국민과 소통하는 자리가 절실하고 많을수록 좋다. 그 매개 역할을 하는 것이 언론이다.
     
    훗날 '슬리퍼 하나로 윤석열 시대 소통의 상징이 사라져버렸다'는 해학적 평가가 나오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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