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미성년자 시절 사촌오빠에게 수차례 강제추행을 당한 여성이 법의 심판을 내려달라고 나섰지만 법은 결국 심판하지 못했습니다. 1심 재판부가 강제추행 사실을 인정했고, 2심 재판부도 원심 판단에 문제가 없다고 봤지만 '공소시효'가 처벌을 가로막았습니다.
오늘 '법정B컷'은 지난해 7월 저희가 전해드린 기사 '친족 성폭력 피해자가 재판에서 겪은 일'(2021년7월18일자)의 후속 이야기인 2심 재판 장면을 전해드리겠습니다. 악몽과도 같았던, 그래서 해외로 갈 수밖에 없었던 피해자가 가해자 처벌을 위해 십수년 간의 싸움을 이어왔지만, 결국 공소시효란 벽 앞에서 좌절된 그의 분투를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친족 성범죄 공소시효에 대한 비판 목소리와, 이 공소시효를 폐지하기 위한 국회의 움직임을 함께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는 왜 강제추행과 강제추행치상 두 가지 모두 제소해야 했나
피해자 A씨는 지난 2005년 1월부터 사촌오빠에게 강제추행 피해를 당합니다. 당시 A씨의 나이는 만 13세였습니다. 범행은 2007년 8월까지, 확인된 것만 10회에 걸쳐 지속적으로 이어졌습니다. A씨는 2007년부터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는 등 의학적 치료를 받았지만, 적응과 생활에 어려움을 겪다 결국 해외로 나갑니다.
그러던 중 2017년 전 세계적으로 미투(Me Too)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소송을 결심했고, 스스로 경제적 여력을 갖추게 된 2020년 '강제추행'과 '강제추행 치상' 혐의로 사촌오빠를 고소합니다.
그가 두 가지 혐의로 사촌오빠를 고소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공소시효 때문입니다. 현행법 상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력 범죄는 해당 미성년자가 성년이 된 직후부터 공소시효가 적용됩니다. 쉽게 말해 만 15세에 피해를 입어도 해당 범죄의 공소시효는 피해자가 만 19세가 되는 날부터 적용되는 것이죠.
하지만 여기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A씨가 사촌오빠를 고소한 2020년은 이미 강제추행 혐의에 대해선 공소시효가 완성된 시점이었습니다.
A씨가 성년이 된 2010년부터 공소시효가 적용됐지만, 구 형사소송법에서 정한 강제추행의 공소시효 7년은 이미 2017년에 완성됐습니다. 결국 고소가 늦어 처벌할 수 없는 것이죠. A씨와 변호인도 소송 전부터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소시효가 더 긴 강제추행 치상 혐의까지 함께 고소하게 된 겁니다.
하지만 '강제추행으로 인해 내가 정신적 피해 등 상해를 입었다'는 강제추행 치상 혐의를 인정받기엔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고, 피해자가 우려한 대로 법원도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사촌오빠에 대해 1심, 2심 재판부 모두 강제추행 혐의는 면소, 강제추행 치상 혐의는 무죄를 선고합니다.
2022.12.08 서울고법 형사10부 '강제추행 치상' 혐의 항소심 선고 中 |
재판부 "이 사건은 공소시효가 걸려있어서 피고인이 피해자를 추행했는지 여부보다도 피해자가 입었다는 상해가 피고인의 추행 여부와 인과관계가 있는지가 핵심입니다"
"하지만 마지막 추행 행위와 공황 증상 사이에 11년의 시간 간격이 존재합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피해자에게 공황 장애가 생기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이고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중략) 과거 추행과 충분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검사의 항소를 모두 기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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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재판을 맡은 서울고법 형사10부(이재희 부장판사)는 1심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강제추행에 대해선 공소시효 완료에 따라 면소를, 강제추행 치상에 대해선 인과관계 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합니다.
A씨를 향해 '왜 10년이나 넘어서 고소에 나섰느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친족 성범죄는 대개 고소가 이뤄지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특징을 보입니다. 한 지붕 아래 사는 가족, 혹은 피를 나눈 친척을 상대로 법정 다툼을 결심하기엔 상당한 시간과 그 사이 가족의 만류 등 많은 장애가 존재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제 한국성폭력상담소가 2019년 진행한 상담을 분석한 결과 친족 성범죄 피해 이후 상담까지 진행하는데 10년 이상의 시간이 걸린 피해자가 55.2%에 달했습니다.
A씨가 고소를 마음먹고, 소송을 위한 경제적 자립을 이루는데 쏟았던 시간이 결국 결과적으로 가해자에게 '면죄의 시간'을 벌어준 것일지도 모릅니다.
공소시효가 지났음을 이미 알았던 피해자가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강제추행 치상 혐의도 결국 시간이 오래 지난 탓에 인과관계 입증에 실패했습니다. 피해자와 검찰 측은 2007년부터 2019년까지 받은 기면증, 우울증, 공황장애 등의 진단서를 내는 등 상해 입증에 주력했지만 재판부는 "오랜 시간이 지나 증상이 나타났고, 추행 만으로 증상이 일어난 것이라 보기 어렵다"라고 판단했습니다.
2022.12.08 서울고법 형사10부 '강제추행 치상' 혐의 항소심 선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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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이것은(기면증, 수면장애) 피해자가 흔히 청소년기에 생기는 증상으로 보이고, 피고인의 추행 행위와 의학적 연관성 드러나지 않고 있습니다. 주요 우울장애를 보면 이 같은 진단을 받을 때 피해자는 의사에게 성추행 사실을 이야기한 바 없습니다. 인과관계가 있는 상해로 보기 어렵다고 원심이 판단했습니다" (중략)
"현재도 피해자가 상당한 우울장애 상태로 고통을 받는 것으로 보이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공황이 나타났고 이 사건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면서 감정이 심화돼 우울 장애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가 새롭게 나타났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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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과정에서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말도 합니다. 강제추행 피해 이후 외국으로 떠나 외국에서 가정까지 꾸린 피해자에게 현재의 증상이 외국에서의 결혼 생활 탓일 수도 있다는 말을 한겁니다.
2022.12.08 서울고법 형사10부 '강제추행 치상' 혐의 항소심 선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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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그 뭐 아시는 것처럼 외국 생활 자체가 통상보다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는 사정이 있습니다. 일반 성인 모두에게도 결혼이라는 것 자체가 상당한 스트레스를 주는 사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피해자가) 외국에서 결혼까지 하면서 그 직후 공황장애가 생긴 것을 보면 추행 행위에 따른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물론 이 사건 소송 절차에서 전문 심의위원이나 감정의들이 피해자가 겪는 정신 질환과 추행이 연관 가능성이 있다고는 했지만, 그 반대 가능성과 다른 원인을 배제할 수 있다는 의견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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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심 많았던 재판부… 국회, 이번엔 친족 성폭력 공소시효 손 볼까?
범행과 증상 발현 사이의 시간 차이를 고려하면 강제추행 치상 혐의를 유죄로 판단하는 것도 재판부에겐 부담이었을 겁니다. 그 사이 다른 요소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0%라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이번 사건 판결문에서도 재판부가 고심한 흔적이 보입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확실하지 않다면 피고인의 이익'이라는 현대 사법 체계가 마련한 대원칙을 언급합니다.
2022.12.08 서울고법 형사10부 '강제추행 치상' 혐의 항소심 판결문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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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형사재판에서 공소가 제기된 범죄사실에 대한 입증책임은 검사에게 있고,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진실한 것이란 확신을 갖게 하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해야 한다. 그와 같은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간다 하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 밖에 없다" |
물론 최근 대법원을 포함한 일부 법원에서는 성범죄 피해자마다 각기 다르게 나타나는 모습을 이해해야 하고, '피해자라면 이런 모습이어야 했다'는 편견에서 벗어나 판단해야 한다는 판결도 자주 나오고 있습니다.
22.08.19 대법원 제3부, 강제추행 상고심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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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부 "성폭력 범죄는 성별에 따라 차별적으로 구조화된 성을 기반으로 지극히 사적인 영역에서 발생하므로, 피해자라도 본격적으로 문제 제기 전까지는 피해 사실이 알려지기를 원치 않고, 가해자와 종전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경우도 적지 않고, 피해 상황에서도 가해자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을 느끼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성폭력 피해자의 대처 양상은 피해자의 나이, 성별, 지능이나 성정, 사회적 지위와 가해자와의 관계 등 구체적인 처지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사정을 충분히 고려하지 아니한 채 통상의 성폭력 피해자라면 마땅히 보여야 할 반응을 상정해 두고 이러한 통념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는 이유로 섣불리 경험칙에 어긋난다거나 합리성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정의와 형평의 이념에 입각하여 논리와 경험의 법칙에 따른 증거판단이라고 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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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심 재판이 끝난 뒤 피해자 측 변호사는 CBS노컷뉴스에 "친족 성범죄의 공소시효 폐지를 다시 논의할 때가 아닌가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 사건에서 피해자는 공소시효가 완성된 강제추행으로 유죄를 이끌어낼 수 없다 보니, 더 어려운 길인 강제추행 치상으로 법정 다툼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강제추행에 대한 공소시효가 남아 있었다면, 먼 길을 돌아가지 않아도 됐을지 모릅니다.
현재 21대 국회에는 친족 성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법안이 발의된 상황입니다. 지난 7월 20일 더불어민주당 소병철 의원을 포함한 10명의 의원이 친족 성범죄의 공소시효 폐지를 담은 '아동·청소년 성보호에 관한 법률 일부개정안'을 발의했지만, 여전히 위원회 심사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법정B컷: 뉴스가 놓친 법정의 하이라이트 |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 CBS노컷뉴스 법조팀 기자들이 전하는 살아 숨 쉬는 법정 이야기 '법정 B컷'이 책으로 나왔습니다. ☞법정B컷: 뉴스가 놓친 법정의 하이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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