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용호 전 북한 외무상. 연합뉴스리용호와 최선희는 북한 외무상과 외무성 부상으로 지난 2018년과 2019년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주요 외교 일정에서 마치 한 세트처럼 움직였다.
두 사람은 2018년 6월 싱가포르 1차 북미정상회담과 2019년 2월 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같은 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 북러정상회담과 베이징 북중정상회담 등 김 위원장의 모든 해외 정상 외교 일정을 함께 수행했다.
그런데 리용호는 이후 숙청됐고 최선희는 여전히 건재하다.
국정원은 5일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리용호 전 외무상의 숙청을 확인했다. 다만 일본 요미우리신문이 보도한 '처형 여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리용호의 숙청 이유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지난 2016년 5월 외무상에 오른 리용호는 2019년 2월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 사태 이후 같은 해 12월 당 정치국 위원에서 '소환'됐다.
외무상에서도 이 때 물러나 대외 강경 이미지의 리선권이 자리를 이었다. 리용호는 그 다음해인 2020년 4월 국무위원회 위원에서도 소환됐다.
소환은 '선거한 사람들이 선거 받은 사람을 그 직무에서 떼어 내는 것', 즉 해임을 뜻한다. 그런데 국정원은 리용호의 소환을 단순 해임이나 은퇴가 아니라 '숙청'으로 파악했다.
주요 당직에서 숙청된 관료가 가는 길은 협동농장 노역 등 '혁명화'를 생각할 수 있다. 혁명화를 거쳐 사상과 태도를 정돈한 뒤 당직으로 복귀하는 경우는 북한에서 비일비재하다.
그런데 리용호는 2020년 4월 소환 이후 3년 가까이 북한 매체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다. 그의 모습이 포착된 적도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혁명화를 거쳐 다시 복귀하는 경로와는 다른 유형으로 분석된다.
요미우리신문이 인용한 소식통에 따르면 리용호가 처형된 시기는 '작년 여름부터 가을 경'이고, 이 때를 전후해 다른 외무성 관계자 4, 5인이 처형된 정보도 있다고 전했다.
지난달 29일에 진행된 전원회의 4일차 회의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보고'에 제시된 강령적 과업들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부문별분과연구 및 협의회들을 열고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서 초안을 작성하기 위한 사업이 진행됐다고 조선중앙TV가 30일 보도했다. 좌측부터 리선권 통일전선부장, 최선희 외무상, 김성남 당 국제부장이 회의를 지도하고 있다. 연합뉴스'작년 여름'이라고 하면 최선희가 외무상으로 발탁된 2022년 6월 이후의 일이다. 요미우리의 보도가 사실이라면 한 사람은 처형되고 한 사람은 외무상에 오르는 운명의 갈림길이 바로 이 때였던 셈이다.
최선희도 숙청설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북한 전문 매체 데일리NK는 지난 2020년 10월 27일 자로 최선희 제1부상이 그 해 7월부터 3개월 동안 혁명화 조치로 평양 형제산 구역 협동농장에서 3개월간 노역을 한 뒤 복귀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최선희의 혁명화 노역이 공식 확인되지는 않았다. 다만 북한 매체 보도에서 최선희는 2020년 7월 4일 "미국과는 마주앉을 필요가 없다"며, 북미정상회담 가능성을 일축하는 담화를 낸 뒤 한 동안 동향 파악이 되지 않았다. 2021년 1월 8차 당 대회에서는 당 중앙위원회 위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2021년 3월 17일 8개월 만에 자신 명의의 대미 담화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재개했다. 2022년 6월 리선권 대신 외무상에 오른 최선희는 최근 연말 전원회의의 분과별 협의회에서도 모습을 드러내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리용호의 숙청과 최선희의 부침을 설명할 수 있는 정확한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하노이 노딜 사태에 대한 책임 문제, 하노이 노딜 이후의 대미·대남 등 정책방향 정립과도 관련됐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평양외국어대학 8년 선후배 관계인 리용호와 최선희는 공통점이 있다. 이른바 조선노동당 본부청사 3층에 근무하는 이른바 '3층 서기실' 엘리트들과의 관련성이다. 김정은을 직접 보좌하는 '3층 서기실'의 구성원들은 사상이 확실한 각 분야의 전문가로 1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지난 2018년 4월 1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리용호(뒷줄 오른쪽). 연합뉴스먼저 리용호는 김정일 시대 당 조직지도부 부부장과 3층 서기실 실장을 맡은 리명제의 아들이다.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은 "리명제 실장은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와 연고가 깊었고 김정은을 어릴 때부터 돌봐주었다"며, "리용호가 외무상으로까지 승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아버지와 고용희와의 연고도 관계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배경 때문에 일각에서는 리용호가 숙청은 몰라도 처형까지 가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는 상황이다.
최선희는 김정은의 정상회담 외교 일정이 본격화된 2018년부터 3층 서기실 구성원들과 가까워졌다고 한다.
마키노 요시히로 아사히신문 전 서울지국장은 최근 국내에도 번역 출판된 자신의 책 "김정은과 김여정"에서 하노이 노딜에도 불구하고 '숙청되지 않은 마담 최'에 대해 설명했다. 그 이유는 미국 정부의 판단이기도 하지만 "3층 서기실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마키노 요시히로 전 지국장은 "그녀가 권력의 자리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김정은과 3층 서기실의 '붉은 귀족'들이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웅변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노이 북미 비핵화 협상이 결렬된 북한 측의 구조적 원인을 김정은과 엘리트 특권층의 공생 관계에서 찾은 것이다.
북미 합의로 북한이 국제사회에 편입되면 동독처럼 북한 특권층의 이권을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최선희와 서기실로 대표되는 북한 특권층은 북미관계 정상화를 원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분석이다.
태영호 의원은 리용호에 대해 "북한과 미국의 모든 협상에서 브레인 역할을 수행했다"며, "미국을 알고 세상을 아는 몇 안 되는 북한 외교관"이라고까지 평가했다. 반면 "최선희는 대미 분야에서 오랜 기간 일했지만 협상과 전략의 브레인은 아니"라고 말했다.
태 의원은 "리용호가 워낙 신망이 높고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 때문에 처형까지 가지 않고 숙청된 사실만으로도 북한 외교관들의 심리적 동요가 클 것이고, 이제 새롭게 일 한 번 해보겠다고 할 사람이 외무성에 없을 것"이라며, "리용호의 숙청은 곧 김정은 정권 내에서 협상파들의 입지가 더욱 좁아졌다는 의미"이라고 설명했다.
반면 최선희는 상대적으로 3층 서기실 구성원들로 대표 되는 북한 특권층의 이해와 입장을 보다 충실하게 반영하고 신임을 받는 인물로 관측된다.
최선희가 지난 2021년 3월 8개월의 공백을 마치고 발표한 대미 담화에서 "(앞으로) 싱가포르나 하노이에서와 같은 기회를 다시는 주지 않을 것임을 명백히 한다"고 강조한 대목은 최선희의 신상만이 아니라 여러 가지 맥락에서 함의 하는 바가 큰 것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