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정부의 공공의료 축소 추진 규탄 기자회견에서 좋은공공병원만들기운동본부와 무상의료운동본부 관계자들이 손팻말을 들고 있다. 연합뉴스국립중앙의료원(NMC)의 신축·이전 예산이 당초 계획보다 크게 삭감된 가운데 의료계의 반발이 거세다. '경제 논리'로 사업 축소를 결정한 기획재정부(기재부)의 통보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감염병 재난을 겪으며
'공공의료 확충'을 공언한 정부가 약속을 저버렸다는 배신감도 읽힌다.
설립된 지 60년이 넘은 국립중앙의료원은 최근 인프라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는 필수중증의료의 '컨트롤 타워'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병상·인력 등
모든 역량을 감염병 대응에 쏟아 왔지만, 노후화된 시설로 본 기능을 온전히 수행하기에 부족하다는 목소리가 많았다.
국립중앙의료원 등에 따르면, 기재부는 이달 초
복지부·중앙의료원의 요청안보다 290병상이 적은 '760병상'을 신축·이전 규모로 결정했다고 알려왔다. 각각 △본원 526병상 △중앙감염병병원 134병상 △중앙외상센터 100병상 등이다. 앞서 의료원 측은 모(母)병원(본원) 800병상을 비롯해 중앙감염병병원 150병상 등 1050병상을 요구했었다.
지난 12일 문제 제기를 위해 긴급기자회견까지 예고했다가 취소한 의료원 내부의 반발은 더 커지고 있다. 국립중앙의료원 전문의협의회는 17일 '국립중앙의료원 신축 이전, 제대로 지어야 합니다'란 제목의 대국민 호소문을 내고
"전날 임시총회를 개최해 의견 수렴 결과, 98%의 압도적인 비율로 기재부 결정을 불수용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물러설 수 없다고도 했다.
지난 2003년부터 20년간 품어온 숙원이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전문의협의회는 기재부의 결정을 두고
"현재의 병원 규모로 건물만 새로 지으라는 통보"라고 규정했다. 무엇보다 외상, 응급, 감염병, 심뇌혈관질환, 모자의료 등 국민 생명과 직결되는 필수중증의료의 사명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게 된다는 점에서 절대 '수용 불가'라는 입장이다.
연합뉴스전문의협의회는 "그간 정부는 시장 논리로 충족되지 않아 국민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는 필수중증의료 분야에 대해 중앙의료원 기능 강화를 통해 인프라를 마련하겠다고 국민들에게 약속해 왔다"며 "그러나
본원(모병원)의 규모를 늘리지 않고 감염과 외상 병동만 추가로 얹는다고 필수의료 기능이 강화되는 것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모병원 자체에 다양한 분야의 의료진, 우수한 진료 역량이 상시 구축돼 있어야 비상 상황에서도 적시에 적절한 의료대응이 가능하다는 취지다. NMC가 "감염병 위기 등의 재난상황 시에 필수의료 및 의료안전망 역할을 지속적으로 수행하고 필수의료의 국가중앙병원으로서 임상적 리더십을 발휘하며 지방 의료격차를 해소하는 중심기관으로 높은 수준의 의료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총 1000병상(본원 800병상)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게 협의회의 주장이다.
해외 유수의 감염병병원 사례도 인용했다. 코로나 같은 감염병 재난과 평상시 의료수요에 함께 대응하려면
일정 규모의 병상을 남겨둘 수 있는 대규모 모병원이 필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모병원만 1700여 병상에 달하는 싱가포르의 탄톡생병원(별도 음압격리병상 330개)과 홍콩 감염병센터(음압격리병상 108개), 독일 샤리떼 병원(모병원 3001병상·음압 격리병상 20개)을 꼽았다.
전문의들은 특히 이같은 예산 축소가 의료취약계층의 피해를 부를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협의회는
"국립중앙의료원 전체 내원환자 중 의료급여환자 등 취약계층이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상급종합병원 대비 월등하게 높다"며 "복합적 질환과 임상적 난이도가 높은 질환을 가진 취약계층 환자에 대한 적정한 진료는 중앙의료원의 중요한 역할"이라고 짚었다.
그러면서 "중앙의료원 전문의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사회적 약자에게 적정진료를 제공하고자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있다"면서도
"새로 짓는 병원마저 병원 규모의 한계로 인해 취약계층에게 적정진료를 할 수 없다면 우리나라 공공의료의 안전망은 포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재부는 최근 예산 축소가 도마에 오르자, 의료원 이전이 예정된 중구 방산동 일대에 병상이 초과 공급되고 있다며 'NMC의 낮은 병상이용률을 고려했다'고 해명한 바 있다. 전문의협의회는 이에 대해 "국가 공공의료 중추 의료기관은 중앙의료원의 발전을 위한 계획이 과연 있는지 묻고 싶다"고 날을 세웠다. NMC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단순히 '진료권 내 병상 수'라는 산술적 기준을 들이대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인천=황진환 기자코로나 유행 고비마다 '병상 대란'을 겪었던 3년간 얻은 교훈이 없는지도 반문했다. 전문의협의회는 "지금 우리나라엔 기존 의료기관과 비슷한 또 하나의 상급종합병원이 아니라 그동안 없었던 제대로 된 국가 병원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와 미래 세대를 위해 '지금' 만들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저조한 병상 이용률을 문제삼은 데 대해서는 "신축 이전 논의가 20년 넘게 지지부진한 가운데 제대로 된 투자도 없었던 것,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와 코로나19 사태를 맞아 입원해 있는 기존 환자들을 억지로 내보내가며 감염병 대응을 하게 한 요인을 고려했는지 궁금하다"고 반박했다.
협의회는 "의료기술은 날로 고도화되고 있고
공공의료의 중추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적정 투자가 반드시 필요하다"며 "현재 수준의 규모와 기능으로 중앙의료원 현대화 사업이 진행되면 국가가 기대하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할 것이 명백하고 이는 고스란히 국민의 피해로 이어지게 된다"고 호소했다.
노조와 정치권도 비판에 가세했다. 이날 오전 서울 중구 중앙의료원 본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연 정의당 강은미 의원과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은 기재부가 신축·이전 축소 결정을 즉각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윤석열 정부가 공공의료를 말살하려 한다'는 격앙된 반응도 나왔다.
이들은 "(기재부 주장대로)
수도권에 병상 과잉이 되었다면 왜 코로나19에 감염된 국민들이 여전히 입원조차 하지 못한 채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단 말인가"라며 "민간 영역에서 기피하는 필수의료를 공공의료가 담보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찾아올 감염병 재난 상황에서 국민들의 생명이 다시금 위협받을 것이 자명하다"고 밝혔다.
보건의료노조 장원석 수석부위원장은 "전문가의 우려와 노정합의를 무시하고 20년 동안 방치된 중앙의료원이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든 윤석열 정부의 보건의료 분야의 천박한 인식을 규탄한다"며 다시 머리띠를 묶고 지난 시간 방호복 속에 고여 있는 우리의 땀과 눈물이 헛되지 않게 끝까지 투쟁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