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버드대 캠퍼스. 연합뉴스"그렇다면 BTS도 일본 덕분에 만들어진 거였네…""한국의 모든 영화, 아티스트, 문화의 발전도 일본에서 영향을 받은 거야?""삼성이나 LG 같은 한국기업들도 사실은 일본 거야…"
세계 각국의 엘리트들이 모여 공부하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강의실에서 최근 수년 동안 오갔던 말이라고 한다.
문제의 수업 시간은 1천명에 이르는 하버드 경영대학원 1학년생들이 의무적으로 수강하는 각 나라의 '산업 발전사'다.
그 가운데 한국편의 교재는 '한국: 한강의 기적'이라는 제목의 소책자다.
대체 어떤 내용이 교재에 들어 있길래 수업 시간에 'BTS가 일본 영향을 받은 거였냐'는 탄식이 나왔을까?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재학생 정상규(우) 박사와 졸업생 김영현씨. 하버드 행정대학원(케네디스쿨)에서 수학중인 정상규 박사(역사학)와 이 대학원 졸업생 김영현씨 등이 지난해 9월 청원사이트(change.org)에 올린 글을 보자.
"이 간행물은 일본 점령 기간 동안 '한국은 점점 산업화되고 교통과 전력 인프라가 개선되었다'고 언급하며, 한국의 '교육, 행정, 금융 시스템도 현대화 되었다'는 말만 언급함으로써 여러 산업화 요인 중 하나인 해당 식민지배를 산업화 발달의 절대적이고 충분적 요소인 것처럼 기술했다." 일본 우익들의 주장인 이른바 '식민지 조선 근대화론'을 필사해놨다는 비판이다. 이들은 이런 내용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교재로 출간한 하버드대 당국도 함께 비판했다.
"오랜시간 학문적 정의와 진리를 강조해온 하버드에서 발행된 이 출판물이 산업화의 목적과 전쟁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역사적 맥락을 단 한 문장도 제시하지 않은 채 식민지 시대의 소위 일본제국의 산업화 노력을 밝게만 조명하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이들은 특히 해당 교재 집필진 6명 가운데 일본인은 포함돼 있고, 막상 한국인은 배제돼 있는 점을 지적했다.
'일본인 교수에 의해서 집필된 한국의 독립운동사',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과점에서 서술된 식민지 역사'라고 규정하면서 교재 수정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나 정 박사는16일(현지시간) CBS노컷뉴스와 통화에서 "연대를 위해 한인학생회와 구성원들도 찾아갔지만, 학생들 중에는 '교재 내용대로 일본에 의해 한국이 발전했던 게 맞지 않느냐'고 되묻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역시나 대학측은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당시 이 내용이 JTBC를 통해 기사화도 돼 국내에서는 꽤 이슈화도 됐지만, 대학측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두 사람은 이번에는 하버드 학보(하버드 크림슨)의 힘을 빌어보기로 했다.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문을 집필했던 하버드 로스쿨 마크 램지어 교수 사건도 학보에 기사화되면서 한미일은 물론 국제사회에 엄청난 후폭풍을 일으켰었다.
그러나 학보측은 교재 집필진에 대한 명예훼손이 될 수 있다며 보다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면서 기고문을 받아주지 않았다
결국 이들은 10여 차례 기고문을 보완해 지난해 11월 마침내 기고문 게재에 성공했다.
예상대로 그제서야 '수정을 검토하겠다'는 대학 당국의 반응이 나왔다.
정 박사는 "지난 7년간 문제의 교재로 수업을 들었던 한국계 학생들의 반발에도 교수들은 '토론을 원한다'는 허울 좋은 말로 넘어가곤 했었기에 수정 검토 반응으로는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집필진들에 대한 설득작업도 병행했다.
한국 역사학계에서 집필한 영어 논문을 전달하면서 교재 내용의 허구성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KOREA' 개정판에서 추가된 동해 병기 표기와 독도 표기 내용. 연합뉴스마침내 새학기 시작을 앞둔 최근 문제의 교재가 7년 만에 개정돼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집필진에 이름을 올렸던 일본인 이름도 빠졌다.
수정된 교재에는 일제 강점기에 '끔찍한 강제 노동이 포함됐다'고 새로 기술됐고,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다는 수식에는 '무력을 사용해'라는 표현이 새로 들어갔다.
또 식민지 개발은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이뤄진 것이라는 부분을 명확히 했고, 성노예 뒤에 '위안부', 일본해 앞에 '동해'가 새로 표기됐다.
정 박사는 늦게라도 교재가 수정돼 다행이라면서도 아쉬움을 나타냈다.
"하버드대 MBA과정을 거쳐 간 사람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 대부분 영향력있는 일을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지난 7년간 이 교재로 수업받은 사람들이 수천명은 될 텐데, 그들이 한국에 대한 왜곡된 지식을 자기 나라에 돌아가 전파했을 거라고 생각하면 한국은 추산하기 어려울 정도의 손실을 입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