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 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이른바 '건폭몰이'로 연일 노조를 압박하던 정부가 이번에는 자정 이후 '야간 집회'를 금지하겠다고 나섰다. 시민사회는 근로시간제 개편 논란으로 흔들렸던 정부가 노동계를 향한 반격에 나섰다고 분석한다.
尹 "불법집회" 으름장 놓자 당정 '집시법 개정' 하루만에 발표
정부는 지난주 민주노총 건설노조의 '1박2일 노숙 집회'를 거론하며 더 이상 불법집회를 용납하지 않겠다고 경고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지난 23일 국무회의에서 "지난주 1박 2일에 걸친 민노총의 대규모 집회로 인해 서울 도심의 교통이 마비됐다"며 "집회 시위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타인의 자유와 기본권을 침해하거나 공공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까지 정당화한다는 의미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지난 정부를 언급하며 "과거 정부가 불법 집회·시위에 대해서 경찰권 발동을 사실상 포기한 결과, 확성기 소음·도로점거 등 국민들께서 불편을 감내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 있다"며 "우리 정부는 그 어떤 불법 행위도 방치하거나 용납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윤희근 경찰청장이 18일 오후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 브리핑룸에서 건설노조 집회에 대한 입장발표를 마치고 브리핑룸을 나서고 있다. 윤 청장은 "경찰은 일상의 평온을 심대하게 해친 이번 불법집회에 대해 엄중하게 책임을 묻겠다"고 발표했다. 황진환 기자다음날인 24일, 국민의힘 윤재옥 원내대표와 한동훈 법무부 장관·윤희근 경찰청장 등이 총출동해 불법시위 근절을 내세우며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집시법)' 개정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당정협의회에서 논의한 집시법 개정안은 오전 0시부터 오전 6시까지 야간 집회를 금지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다. 또 불법집회 전력이 있는 단체가 여는 집회와 시위까지 제한할 수 있다는 방침도 언급됐다.
이들은 건설노조가 지난 16일부터 1박 2일간 서울 도심에서 노숙 집회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공공장소를 점거하고 교통 정체와 소음을 유발해 야간 시간대 시민들이 불편을 겪었다고 주장했다.
윤 원내대표는 "(지난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에서) 공공장소 무단 점거, 음주·흡연·쓰레기 투기에 노상 방뇨까지 벌어졌다"며 "2023년 서울이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불법시위"라고 혹평했다.
이어 "야간 옥외 집회에 대한 법 조항이 유명무실한 상태"라며 "국회는 14년 동안 민주당의 비협조로 입법 후속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날 참석한 윤 청장도 지난주 언론 브리핑에서 건설노조를 직접 거론하며 "불법집회 전력이 있는 단체의 유사 집회에 대해서는 금지 또는 제한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경찰청은 사장됐던 불법 집회 해산 훈련까지 6년 만에 부활시켰다. 2015년 11월 고(故) 백남기 열사가 경찰의 '물대포'에 직격당해 숨진 이후 중단됐던 훈련을 25일부터 다음달 12일까지 전격 실시하겠다는 계획이다.
2015년 11월14일 집회 중 쓰러진 고(故) 백남기씨. 연합뉴스'집회 허가제'는 이미 헌법 불합치…법조계·시민사회 일제히 개정안 비판
다만 이미 헌법재판소가 집회를 허가·불허하는 법 조항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집회 및 시위의 자유에 위배된다고 판결했기 때문에 당정이 발표한 개정안이 통과될 가능성은 매우 낮다.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민변) 이창민 변호사는 '야간 집회'를 제한한다는 개정안 내용이 집회의 자유를 보호하는 헌법 가치는 물론, 판례 취지와도 부딪힌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집시법 개정안은) 2009년 헌법재판소 결정 취지와 맞지 않는다"며 "집회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거나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법 조항은 안 된다는 헌법 불합치 결정이 나온 지도 10년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특히 헌법 21조는 언론 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 집회 및 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집회와 시위의 권리는) 행복 추구권 등 다른 기본권들보다 훨씬 두텁게 보호받고 있다"며 "이러한 권리는 공권력 유지나 정권 유지를 위해서 쉽게 침해될 수 있는 권리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집시법 개정안을 추진하는 배경으로, 전문가들은 정부가 노동조합을 향한 압박 수위를 올려 근로시간제 개편 논란으로 불리해진 국면을 전환하려는 노림수라고 분석했다.
정부가 강도 높게 추진하던 '건폭' 수사가 고(故) 양회동씨의 분신으로 '열사 정국'으로 뒤바뀌면서 경찰·정부 책임론이 제기되자, 아예 '심야집회'를 문제삼으며 탈압박을 시도하는 셈이다.
16일 오후 서울 세종대로에서 열린 '열사정신 계승 전국건설노조 총파업대회'에 참가한 건설노조 조합원들이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황진환 기자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정홍준 경영학과 교수는 "(당정이) 노동조합에 대해서 굉장히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은 보수의 색채를 명확하게 하면서 보수층 결집을 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며 "대통령이 가진 개인적인 철학들이 말을 통해 나타나는 것인데, 참모들이나 당에서는 대통령의 의도를 과도하게 해석하는 것도 경계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더 나아가 노동계와 시민사회는 집시법 개정이 무산되더라도, 이번 논의 자체로 정부가 경찰에 집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라는 메시지를 주었다고 우려했다. 이 여파로 경찰과 시민사회 관계가 과거 권위주의 정부 시절로 회귀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공권력감시대응팀 랑희 활동가는 이번 개정안 추진에 대해 "법을 개정하지 않더라도 경찰이 강도 높은 통제를 할 가능성이 굉장히 커졌다"며 "과거 경찰이 물대포를 사용해서 백남기 농민이 사망하셨을 뿐 아니라 매우 많은 사람들이 체포당하고 부상을 당하고 벌금을 물었다. 그 시대로 돌아가자는 말밖에 안 된다"고 비판했다.
랑희 활동가는 "경찰이 박근혜 탄핵 이후 스스로 '인권 경찰이 되겠다"고 말했다. 집회 시위의 패러다임을 바꾸겠다고 말했다"며 "경찰이 평화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집회에 대해서는 폭넓게 권리를 보장하겠다고 경찰 먼저 얘기했다. 지금 그 약속을 버리겠다는 말밖에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과거 경찰은 고(故) 백남기 농민이 사망한 지 1년 7개월 만에 백씨에게 사과하고, 경찰의 인권개혁을 강도 높게 추진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건설노조 이윤재 정책기획실장은 "야간 집회를 하면서 물리적인 충돌이나 불상사가 단 한 건도 없었고 평화적인 행사였다"며 "정부가 국민의 목소리를 계속 억압하고 민주주의를 후퇴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있어 우려스럽다"고 비판했다.
이어 "오는 5월 31일에 민주노총 경고 파업이 있으니, 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를 계속 낼 것"이라고 예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