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남편이 아내를 죽였습니다. 좀처럼 강력사건은 일어나지 않는 서울 한강변 아파트촌에서 벌어진 일이었습니다. 남편은 업계에서 실력을 인정받은 건축가였고, 부부는 꽤 오랫동안 안락하게 살았습니다. 아내가 폐암 말기 진단을 받기 전까지는요.
남편의 항변은 "사랑해서 죽였다"였습니다. 이 말만큼 황당한 거짓말이 또 있을까 싶지만, 배우자가 간병인 노릇까지 했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제로 이 남편은 부동산 등 아내 앞으로 된 재산을 모두 포기했고 범행 직후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이번주 법정B컷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를 차마 요양병원에 보낼 수 없어 범행을 저지른 남자의 이야기를 들려드립니다.
"죽고 싶다"는 아내…지쳐가는 남편
남편이 폐암 4기 진단을 받은 아내를 간병한 시간은 무려 6년. 그 사이 아내는 호전되지 않았습니다. 암세포는 이미 온몸의 뼈와 뇌로 전이된 상태였죠. 항암 치료를 받던 중 아내에게는 파킨슨병과 뇌전증, 간질, 치매가 찾아왔습니다. 아내는 종양내과 등 10여개 과목에서 진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아내가 보인 증상은 그야말로 처참했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 없었고 잇몸이 괴사해 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왼쪽 눈의 시력도 거의 잃었습니다. 결국 남편은 회사를 휴직했고 간호에만 전념했습니다. 24시간 아내의 고통을 온전히 지켜봐야 하는 그에게 아내는 "죽고 싶다"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2023. 9. 6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 치매 아내 살인 공판 中 |
변호인: 아내는 여러 차례 "죽고 싶다"고 말했죠
피고인: 예. 여러 번 얘기했습니다.
변호인: 2, 3년 전 아내는 자기 스위스로 보내 안락사 시켜달라고 했죠?
피고인: 예.
변호인: 그때 아내는 스위스에 있는 안락사 조력 단체를 알아봤죠?
피고인: 네, 그때 심각하다는 생각은 안 했습니다.
변호인: 나중엔 인지장애로 인해 안락사 조력단체를 이용하지 못하게 된 걸 알고 후회했죠?
피고인: 그 후 아내가 낙심했습니다. 저는 고민했고요.
변호인: 고민이라는 게 뭐죠?
피고인: 집사람이 혼자 죽으면 저 혼자 남게 되는 게 두려웠고 싫었습니다.
변호인: 피고인도 같이 죽을 결심을 했죠?
피고인: 예.
변호인: 스위스에서 안락사를 하면…
피고인: 나중에라도 따라가서… (말을 잇지 못함)
변호인: 우리나라에서 안락사가 허용되면 둘 다 사용 했을 거죠?
피고인: 기본적으로는, 네.
변호인: 인지장애는 아내가 가장 두려워하던 증세죠? 피고인에게 "여보, 난 암으로 죽고 싶지 않아"라고 말하며 흐느끼곤 했죠?
피고인: 서너번 그런 말을 했고 그 말 듣는 게 제일 괴로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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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이미지 제공어느 순간엔 아내가 남편을 알아보지 못할 때가 있었을 겁니다. 어느새 그런 순간은 더 자주 찾아왔을 겁니다. 사랑하는 사람한테 내가 잊힌다는 고통은 어떤 걸까요? 어제 처음 만난 사람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으로도 서운한 감정이 드는 게 인간입니다.
나는 그 사람을 먹이고 재우고 입히는데, 그런데 그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 못할 때도 있고 정신이 들면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고 싶다고 합니다. 아무리 사랑하는 부부라고 하더라도 한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고통의 범위는 넘어선 것 같습니다. 주변에서도 요양병원 입원을 권유합니다. 그런데 왜 이 남편은 간호를 고집했을까요?
2023. 9. 6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 치매 아내 살인 공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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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주치의를 비롯해 가족들도 이구동성으로 피고인 현재 상황에서 한걸음 빠져나와야 한다고 했죠?
피고인: 네.
변호인: 치매요양병원을 서너 군데, 시설 서비스를 문의했지만 모두 회의적이었죠?
피고인: 그렇습니다.
변호인: 아내는 치매·망상 증상이 심하고 피고인 외 누구의 수발도 거부했는데 그런 아내가 24시간 간병인을 참아낼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죠?
피고인: 예, 장모 수발도 거부했습니다.
변호인: 치매요양병원에 보내는 것은 아내를 포기하고 버리는 거라고 생각했죠?
피고인: 네, 장인어른이 돌아가셨을 때 시설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이 생겼습니다. 집사람 을 그런 곳에 보내면, (아내가) 너무 불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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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멀다 하고 요양병원 학대 사건이 보도되는 세상입니다. 요양병원에 가족을 보내는 순간 수명이 2년은 줄어든다는 말도 있을 지경이죠. 이미 장인어른을 '안 좋게' 보낸 기억이 있는 그로서는 아내마저 그런 식으로 잃을 순 없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내가 너무 보고 싶습니다"…피고인 구명 나선 아내 친구들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을 '죽일 결심'부터 직접 실행에 옮기기까지, 임계점을 넘어서는 순간이 있었을 겁니다. 남편은 아내가 가장 덜 고통스러운 방법으로 죽을 수 있도록 검색도 했고요.
2023. 9. 6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 치매 아내 살인 공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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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인: 피고인을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한 것은 매일 더해가는 아내의 고통을 바라봐야 하는 것이었죠?
피고인: 네.
변호인: 아내는 파킨슨병이 악화되면서 체력 저하로 매일 넘어졌죠? 아내 다리와 무릎 아래는 멍투성이였고, 매일 붉은색 새 멍이 들었죠. 새 멍을 볼 때마다 너무 슬프고 화났죠?
피고인: 네.
변호인: 절망감 때문에 같이 죽을 생각으로 이번 범행 일주일 전부터 유서를 작성해 조금씩 수정하고 아내 옆에서 읽어준 적이 있죠? 아내는 아무 말 없이 눈물을 흘렸죠?
피고인: 네, 말은 안 하고 하염없이 눈물만…
변호인: 피고인 유서는 썼지만 범행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마지막날 아침 아내가 넘어져서 혹이 난 것을 보는 순간 이성을 상실해서 범행에 이르렀죠?
피고인: 네, 확 도는 느낌이었습니다.
변호인: 4월 26일 범행 당일 아침 아내가 침대에서 일어나다가 피고인 눈앞에서 넘어졌고, 눈가에 혹이 생겼죠? 피고인이 아프지 않냐고 물었는데 아내는 아무 소리를 내지 않았죠?
피고인: 그래서 너무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났습니다.
변호인: 피고인은 이성의 끈이 끊어져서 아내가 고통을 겪는 일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고 결심했죠?
피고인: 네.
변호인: 아내의 숨이 끊어질 때 안으면서 "여보, 미안해. 하지만 더 이상 아프지 않을 거야. 사랑해"라고 속삭였죠? 아내의 고통을 멈추게 하는 거였고, 아내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결코 벌이지 않을 짓이었죠?
피고인: 당시엔 그랬습니다.
변호인: 그 방법이 그릇됐다는 것은 나중에 깨달았죠?
피고인: 한참 뒤에야 깨닫게 됐습니다. 한동안 같이 따라가 죽을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변호인: 아내가 보고 싶죠?
피고인: (말을 잇지 못하다가) 네,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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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행 직후 남편은 두 시간 넘게 자살을 시도하다가 친구의 119 신고로 살아남았습니다. 아내의 친구들은 상속을 포기한 채 구속된 피고인의 선처를 구하는 탄원서를 법원에 제출했고, 장모님은 증인으로 나서 피고인의 구명을 도우려다 장남의 반대로 그러지 못한 상황입니다.
검사는 결심공판에서 피고인에게 "피해자의 동의 없이 살해했다"면서 징역 8년을 구형했습니다.
2023. 9. 6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33부 치매 아내 살인 공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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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피고인은 범행 일주일 전부터 유서를 작성하고 그 사이 수차례 유서 내용을 고치면서 범행 결심을 다진 걸로 보여 계획 범행입니다. 피해자가 죽여달라거나 명시적으로 죽이는 것에 동의한 사실은 확인되지 않고, 어머니와 두 명의 오빠, 가족들, 지인이 있었음에도 피고인은 오로지 본인의 주관적 판단만으로 가족과 친구들로부터 피해자를 빼앗았습니다.
피해자 오빠들을 비롯한 가족들은 피고인이 누구에게 상의하지 않고 피해자 동의 없이 본인 판단만으로 살해한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입장을 밝혔습니다. 다만 피고인이 초범이고 본인의 범행을 자백, 반성하고 있습니다. 피해자가 6년간 투병생활을 했고 최근 들어 갑작스레 건강상태가 악화되어 증세가 심해지자 정신적으로 지쳐서 본건 범행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이는 점, 피고인 신고로 이 사건이 밝혀지게 된 점, 양형 사유를 종합하여 피곤에게 징역 8년 선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변호인: 피고인이 피해자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주변 권유대로 피해자를 간병 치매요양병원에 맡기고 피고인은 피해자 곁에서 한 발 떨어져 지냈을 겁니다. 피고인은 범행 며칠 전 유서를 썼지만 실행에 옮기지 못했는데 마지막날 아침 아내가 낙상해서 눈가에 혹이 생긴 걸 보면서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어버리고 아내의 고통을 더 지속해선 안되겠다고 잘못된 판단을 하고 말았습니다.
피해자의 친구 분들이 탄원서를 여러 명한테 받아냈습니다. 피해자가 스스로 죽여달라고 명시적 의사 표시를 하지 않았지만 피고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피고인의 수감생활을 안타까워할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사랑스러운 망인이 비참하게 망가지는 것을 보면서 피고인도 죽고싶을 만큼 괴로웠을 거다, 피고인이 범행을 저지르는 게 망인 고통 줄여주는 길이고 다른 사람 손에 맡겨져서 남은 시간 고통 받게 되는 걸 피고인이 참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취지로 탄원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유족들 중에도 그런 말씀 하시는 분이 있으시지만 유족들이 의견 통일하기로 하셨기 때문에 (증언에 나서지 않았다). 이 사건은 수사기록을 보셔서 아시겠습니다만 피고인이 정말 피해자를 너무너무 사랑한 나머지 한 행동이기도 하고 피고인이 스스로 지쳐서 바른 판단을 하지 못한 정신 상태에 있지 않았나. 이런 점을 참작해주셔서 피고인에 대해 선처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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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인지장애가 찾아온 아내, 안락사도 불가능한 상태에서 이성을 잃어버린 남편. 재판 내내 차분하게 답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삶과 죽음 그 어떤 것에도 의욕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 느껴졌다면 과장일까요? 아내 없이 남은 시간을 살아내는 것이 그에게는 이미 형기이고 복역 중인 것 같았습니다.
영미권 사람들은 '치매'를 '롱 굿바이(the long good by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헤어짐을 오랫동안 준비한다는 의미로, 가슴이 참 먹먹해지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작별 인사가 길어지는 동안 상처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집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상처 주고 못되게 행동합니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치매'라는 병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도, 간병하는 가족은 무너지기 마련입니다. 이 사건 남편의 경우엔 오롯이 혼자 이 고통을 견뎌야 했습니다. 사회제도도, 다른 가족도 남편이 만족할 만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지 못했습니다.
'간병 살인'이 화두가 된 지 꽤 오래지만, 보건당국이나 경찰은 '살인'과 다른 범죄로 구분해 통계를 갖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검찰은 여러 사정을 양형에 반영해 8년을 구형했는데 사법부의 판단은 어떨까요? 1심 판결은 이달 12일 오후 2시에 선고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