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수원역광장에서 사태 원인 규명과 실효성 있는 구제대책 추진을 촉구하며 집회를 열었다. 박창주 기자"뭘 보고 임대인한테 그렇게 큰 돈을 빌려준 겁니까. 정씨 일가로 인해 저의 꿈은 무너졌습니다."
한때 은행원을 꿈꿨던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 20대 A(여)씨가 발언대에 섰다. 떨리는 손으로 마이크를 잡은 그는 전세금을 잃게 된 배경으로 '은행'을 가리켰다.
자신이 대출을 받을 땐 소득·재직증명서와 원천징수영수증 등을 제출해 까다로운 절차를 거쳤는데, 임대사업자에게도 대출심사가 제대로 이뤄졌느냐는 것.
대기업 회계업무를 담당해 온 경험으로 볼 때, 집주인이 법인 명의로 빌린 돈의 규모나 실거주지가 불분명한 점 등을 고려하면 은행 대출심사의 '사각지대'가 의심된다는 게 A씨의 물음표다.
그러면서 그는 정씨 법인의 재무제표를 근거로 들었다. 자기자본이 2%로 부채가 98%에 달할 정도로 지속적인 대규모 대출이 성사된 게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A씨는 "은행은 무엇으로 법인이 안전하다고 판단했던 것인지 의문이다"라며 "이런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문제 속에서 피해가 발생한 만큼, 은행과 중개사, 정부, 국회 등 모두가 사안을 바라봐 주길 바랄 뿐"이라고 한숨을 내쉬었다.
수원 전세사기 피해자들의 집회 현장 모습. 박창주 기자수원 전세사기 피해자들이 원인 규명과 지원책을 촉구하기 위해 또 다시 거리로 나섰다. 수원시청 앞 기자회견에 이어 두 번째다.
26일 전세사기·깡통전세 피해자 수원화성대책위원회는 수원역광장에서 집회를 열고 "전세사기는 개인 간 문제가 아니다"라고 밝혔다.
서울과 인천, 경기 등 수도권 전세사기 피해 가구가 압류와 경매로 넘어가며 금전적 피해가 확산하고 있어, 국가 차원의 피해회복 조치가 절실하다는 호소다.
이날 퇴근시간에 맞춰 저녁 7시 반쯤 시작된 집회 현장에는 빗방울이 떨어지는 가운데, 깊게 모자를 눌러 쓰거나 우산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피해자 150여 명이 차가운 바닥에 일회용 방석을 깔고 앉아 발언자들을 지켜봤다. 어린 자녀들을 품에 안거나 함께 손을 잡고 참석한 이들도 눈에 띄었다.
피해자들이 요구하는 핵심은 '선구제 후회수'와 '선별없는 피해자 지원'이다. 거주지에서 쫓겨나지 않도록 정부에서 주택을 매입해 수익금을 피해자에게 돌려주고 추후 회수하는가 하면, 피해자 인정 조건도 대폭 낮출 수 있게 '전세사기 피해자 지원과 주거안정에 관한 특별법'을 개정해 달라는 것이다.
이재호 대책위 위원장은 "가장 필요한 정책은 쓸 수도 없고, 대상 기준조차 까다로운 대출지원책이 아니다"라며 "LH매입임대, 우선매수권, 경공매 유예 등의 실효성 있는 정책으로 피해자들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이어 "전세사기는 사회적 재난으로 잘못된 정책들의 결과물"이라며 "벼랑 끝에 몰린 피해자들의 손을 잡아 달라"고 목청을 높였다.
구호 푯말을 들고 있는 전세사기 피해자들. 박창주 기자특히 이번 집회에서 대책위는 수원 전세사기 사건의 주요 피의자인 정씨와 관련, 임대사업 법인이 과도하게 대출을 받는 과정에 대해 중점적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정씨 부부 등이 여러 부동산법인을 설립해 임대사업을 확대해 왔는데, 일부 법인 자기자본 비율이 2%에 불과해 사실상 '무자본 갭투자'였다는 지적이다.
(관련기사: CBS노컷뉴스 10월 16일자 "[단독]수원 전세 법인 '자기 돈 2%뿐'…"무자본 갭투자" 의혹")실제 정씨는 부동산 시장이 오름세를 보이던 지난 2020년 5월 부동산 중개업 법인 B사를 설립, 자본금의 50배에 이르는 '빚'으로 임대업을 지속해 온 것으로 확인됐다.
이처럼 빚을 돌려가며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해 세입자들이 전세 보증금을 잃는 피해 상황을 초래했다는 게 피해자들의 판단이다.
이와 관련해 대책위 측은 피해건물 56곳 중 25곳 건물의 부동산과 대출은행 현황을 조사해 결과를 발표하기도 했다. 20건 이상 대출거래한 부동산은 5곳으로, 국민은행과 농협은행의 여러 지점에서 50건 이상 거래가 됐고 그 외 은행들은 30건 이상이라는 게 대책위 설명이다.
집회에 참석한 일부 피해자들은 어린 자녀를 품에 안거나 바닥에 함께 앉았다. 박창주 기자또한 '특정 은행 지점 관계자에게 정씨 건물 건으로 왔다고 하면 대출이 될 것이다'라는 권유를 받았다는 임차인 증언을 비롯해, 은행이 아닌 공인중개사 사무실에서 대출 서류 등을 작성하고 대출 상담 과정에서 은행원이 이미 매물의 위험성을 암시하는 언급을 하는 등 불합리한 대출 정황도 공개했다.
대책위 관계자는 "모든 위험과 책임을 임차인이 책임지게 됐다"며 "은행은 국민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왜 노력을 하지 않았느냐"고 따져 물었다.
이 외에도 대책위는 임차인들에 대한 선구제 후회수를 현실화하기 위해 이른바 '악성 임대인'의 범죄수익을 정부 차원에서 회수하는 방안을 강구해줄 것을 요구했다.
앞서 대책위는 지난 13일 수원시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하게 된 실태를 고발하며, 당국에 조속한 전수조사와 긴급대책 마련을 요구한 바 있다. 이들의 자체 집계에 따르면 총 피해 예상액은 800억 원대로 추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