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일 오후 '금연구역 지정' 현수막이 걸려있는 서울 중구 금융사박물관 사잇길에 흡연자들이 모여 담배를 피고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서울 중구의 한국금융사박물관 사잇길은 이 일대 회사원들의 암묵적인 흡연구역이다. 점심시간만 되면 너구리굴이 돼 주변 상인들이 환풍기까지 사비로 마련할 정도다.
양천구 목동 41타워 앞에도 '암묵적 흡연구역'이 존재한다. 흡연자를 찾기 어려운 인근 골목과 달리 20m 정도의 보행 도로 양 옆으로 단체로 흡연을 하고 있었다. 건물 관리인과 청소부들이 "이곳에서 담배를 피우면 안 된다"며 경고했지만, 흡연자들은 아랑곳 않고 담배에 불을 붙였다.
금연 구역임을 알리는 스티커도 벽과 바닥에 여러 개 붙어 있었지만, 흡연자들은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모여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흡연자 박 모 씨(27)는 "담배꽁초 전용 쓰레기통이 있어 흡연자들이 모이게 된 것 같다"고 했다.
상인들은 환풍기까지 살 정도로 피해가 심각하다. 이 길을 지나는 보행자들은 "간접흡연이 걱정된다"며 코를 막고 빠르게 발걸음을 옮긴다.
나 몰라라 단체 흡연에 상인들 "환풍기까지 샀다"
6일 오후 '금연구역 지정' 현수막이 걸려있는 서울 중구 금융사박물관 사잇길에 흡연자들이 모여 담배를 피고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상인과 보행자들의 민원이 잇따르자 지난달 서울 중구청이 한국금융사박물관 사잇길을 금연 구역으로 지정했다. 두 달간의 계도 기간을 거쳐 내년 1월 1일부터는 흡연 행위 적발 시 과태료 10만 원을 부과한다. 담벼락과 바닥 곳곳에 '금연구역. 흡연 시 과태료 10만 원'이라는 표지판이 붙여져 있었다.
하지만 과태료 경고 표시도 모두 무용지물이다. 지난 6일 오후 기자가 이 골목을 둘러보러 갔을 때 10명 남짓한 직장인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었고, 5분간 30여명의 흡연자가 이곳을 다녀갔다.
계도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여전히 무분별한 흡연이 계속돼 인근 상인들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골목에 자리 잡은 치과에서 일하는 직원 김 모 씨(30)는 "담배 연기가 문 사이로 새어 들어와서 우리 병원은 환풍기까지 샀다"며 "병원에 들어오면서 '담배 냄새가 너무 많이 난다'고 인상을 찌푸리는 환자도 많아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 골목에서 복어집을 운영하는 박 모 씨(40)는 "담배 냄새 때문에 손님들이 주차장 쪽으로 빙 둘러 오기도 하고, 화단에 담배꽁초를 버리거나 침을 뱉는 사람도 많아 힘들다"며 "장사하는 입장에서 담배 피우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라고 말하며 긴 한숨을 내 쉬었다.
'암묵적 흡연공간' 생기는 이유
11일 오후 양천구 목동 41타워 골목에서 흡연자들이 모여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흡연자들도 할 말은 있다. 이들이 이 골목에 모이는 이유를 금연 구역이 계속 증가하는 반면 흡연 구역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근처 은행에서 일한다는 이 모 씨(36)는 "주변 상인이나 행인에 피해를 준다는 게 죄송하지만, 주변에 흡연구역이 없다"며 "그나마 사람이 덜 다니는 길목이라 오게 된다"고 했다.
현재 서울 중구에 설치된 흡연부스는 총 6개. 너구리굴이 된 한국금융사박물관 골목에서 가장 가까운 흡연부스는 지하철과 도보를 통해 8분이 걸린다. 가장 먼 곳은 19분이 걸린다. 점심 시간을 이용한다고 해도 담배 한 대 피우러 흡연부스에 다녀오기엔 너무 먼 거리다.
흡연자 최 모 씨(53)는 "이 골목의 금연구역 계도기간(24년 1월 1일)이 끝나면 근처 다른 골목에서 담배를 피울 것 같다"며 "걸어서 5분 이내에 흡연부스가 생기지 않는 이상 점심시간이나 근무 중에 거기를 찾아가는 건 어렵지 않겠냐"고 했다.
한 곳을 막으면 다른 곳으로 몰려가고, 그 곳을 금지하면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이른바 풍선효과가 금연구역에서도 나타나는 것이다.
목동 중심축을 중심으로 방송국, 공공기관, 사무공간이 많아 직장인들이 많은 양천구에는 흡연부스가 아예 없다. 이러다보니 애연가들이나 상습 흡연자들 사이에서 이심전심 통하는 흡연구역이 있는데 이 주변 상인들이나 이 곳을 지나는 시민들은 거짓말 조금 보태 '죽을 맛'이다.
목동 현대41 타워 앞에서 만난 흡연자 장 모 씨(27)는 "이 주변엔 지정 흡연 구역이 없다. 금연구역만 지정하지 말고 흡연구역도 함께 정해주면 그리로 갈테니 만들어 달라"며 할 말이 많다는 표정을 지었다.
서울시 내 흡연부스 103개 뿐…자치구 별로 들쭉날쭉
서울시 실외흡연 시설 현황윤석열 대통령은 지난해 대선 후보 시절 흡연자들이 담배를 구입할 때 포함돼 있는 담뱃세 일부(국민건강증진부담금)를 이용해 흡연부스 등 흡연구역을 확충하겠다는 공약을 발표한 바 있다. 흡연자와 비흡연자의 공간을 분리해 사회 갈등을 줄이겠다는 목표였다.
하지만 정부 출범 이후 관련 대책이나 구체적인 정책 수립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
서울시에 따르면 서울시 내 흡연부스는 총 103개다. 이 중 한강공원에 운영 중인 37개를 제외하면 일반 도로에 놓인 부스는 66개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양재1·2동 전체가 금연구역으로 지정된 서초구(77개)에 흡연부스가 몰려있다. 영등포구 10개, 중구에 6개가 있고, 성동구 4개 노원구 3개의 흡연부스가 있다. 광진·마포·구로·동작구는 1개씩 있다. 양천구, 동대문구, 관악구 등 나머지 16개 구엔 흡연부스가 아예 없다.
"금연구역 지정 능사 아냐…흡연부스라도 설치해달라"
흡연부스가 턱없이 부족한 배경에는 현행법과 WHO의 FCTC(담배규제기본협약)가 있다.
국민건강증진법에 따르면 '국가 및 지자체는 국민에게 직접흡연 또는 간접흡연이 국민건강에 해롭다는 것을 교육·홍보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흡연부스를 설치하는 것은 건강증진법 취지에 반한다.
우리나라가 당사국 이행 의무를 지니는 WHO FCTC 제8조도 "협약국이 실내 근무공간, 대중교통, 공공장소에서 시민들이 담배 연기에 노출되는 것을 보호하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하지만 현행법과 WHO 규정으로 도심 번화가 내 금연구역이 확대되면서 골목이나 특정 점포 앞에 흡연자들이 모여 또 다른 피해를 양산하는 상황에서 대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금융사박물관 옆 골목에서 양갈비 식당을 운영하는 김 모 씨(70)는 "환풍기를 쓸 정도로 담배 냄새가 심하다"면서 "이 골목만 금연구역으로 지정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흡연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골목 몇개 금연구역으로 정한다고 담배 피우는 사람을 막을 수 있겠냐. 정부가 흡연부스를 설치하든가 해서 대책을 세워야 한다"고 덧붙였다.
담배를 안피운다는 유 모 씨(33)도 "여기가 아니더라도 흡연자들은 또 다른 곳에 가서 흡연을 할 텐데 그걸 일일이 단속할 수는 없지 않냐"며 "흡연부스를 만들어서 간접흡연을 막았으면 한다"는 입장을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