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에 방문한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 연합뉴스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지난 12일과 13일 양일간 베트남 국빈 방문을 다녀왔다. 올해 3월 3기 집권체제를 공식 시작한 이후 시 주석이 해외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4번째다.
현 시점에서 중국과 가장 밀착해있는 러시아, 그리고 우군 확보의 교두보 역할을 하는 브릭스(BRICS) 정상회의가 열린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리고 1년만의 미중 정상회의가 열린 미국 등 이전 방문국은 어느하나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외교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찾은 곳이다.
베트남도 중국의 이웃국가인데다 주요 교역국가라는 점에서 중요한 외교 일정으로 꼽을 수 있지만 앞선 국가 방문과 비교해서는 무게감이 떨어진다.
또, 세계 2위 경제대국 중국의 최고지도자 방문을 원하는 국가가 줄을 섰다는 점에서 왜 이 시점에 베트남 방문인가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시 주석이 베트남을 방문한 12일은 내년도 경제운용 방향의 큰 틀을 결정하는 중앙경제공작회의가 열린 날이었다. 올해 중앙경제공작회의는 11일부터 이틀간 열렸는데, 베트남 도착 시간을 고려하면 시 주석은 사실상 둘째날 일정을 빼먹은 셈이다.
얼마나 급한 일이기에 시 주석은 전세계가 주목하는 중앙경제공작회의까지 제쳐두고 베트남으로 달려갔을까?
베트남 놓고 벌이는 美.中 구애작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연합뉴스그 해답은 바로 지난 9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베트남 방문에 있다. 당시 바이든 대통령과 베트남 서열 1위 응우옌푸쫑 공산당 서기장은 양국 관계를 '포괄적 전략 동반자'로 격상하기로 합의했다.
미국과 베트남은 1975년 베트남의 공산화로 관계가 단절된 이후 1995년 7월 국교를 정상화했고, 버락 오바마 대통령 시절인 2013년에는 '포괄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그런데 이번에 만 10년 만에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건너뛰고 바로 양국 관계를 두단계 격상시킨 것. 이에따라 미국은 한국, 인도, 러시아, 중국, 일본에 이어 베트남과 포괄적 전략 동반자 관계를 맺은 6번째 국가가 됐다.
여기다 양국은 탄력적인 반도체 공급망 구축에 합의했고, 첨단 제품에 쓰이는 희토류 공급 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베트남은 중국에 이은 세계 2위 희토류 보유국이다.
누가봐도 중국을 견제하는 합의를 이뤄낸 뒤 바이든 대통령은 기자회견을 통해 "현재 시진핑 주석이 경제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중국이 경제적으로 성공하기를 바란다"며 대놓고 시 주석의 신경을 긁어놨다.
미국과 베트남이 급격히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며 중국은 속달을 수밖에 없다. 시 주석이 다른 주요 국가들을 제치고 이번에 베트남을 직접 찾은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시 주석은 베트남 방문 전부터 양국간 '운명 공동체' 구축을 강조했다. 운명 공동체는 중국을 중심으로 미국의 패권에 맞선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서 베트남을 확실히 우리편으로 끌어들이겠다는 포석이 깔려있다.
이를 위해 시 주석은 철도를 비롯한 인프라 구축을 지원하기로 하는 등 베트남에 선사할 선물보따리를 한가득 들고갔다.
그러나 베트남은 정상회담 이후 양국 관계를 '미래공동체'로 정의했다. 중국 측은 이를 운명공동체와 같은 표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영문 보도자료에 등장한 표현도 'community with a shared future'으로 운명공동체와는 거리가 있다.
캐스팅보트 역할 스스로 포기한 한국?
윤석열 대통령. 연합뉴스미국과 중국 모두가 베트남에 공을 들이는 이유는 베트남은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양측간 대립구도 속 '캐스팅보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입장에서 베트남은 중국을 대체할 공급망으로서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데다, 안보 측면에서도 미국이 공을 들이고 있는 인도.태평양에서의 세력 확장을 위한 핵심 지정학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중국 입장에서도 베트남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이웃국가로의 지정학적 가치 뿐만 아니라, 같은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몇 안되는 국가 가운데 하나이다.
베트남은 이런 양대 강국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쪽을 선택하기 보다는 양국 모두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면서 경제적 실리는 빼먹는 '국익'의 관점에서 외교전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베트남을 놓고 벌이는 미중 양국의 힘겨루기와 베트남의 외교술을 구구절절 언급한 이유는 현 정부들어 철저하게 미국과 밀착외교를 펴고 있는 한국 외교와 비교되기 때문이다.
윤석열 대통령 취임 이후 한국 정부는 한미일 공조 강화에 외교적 총력을 다했다. 그 결과 이전 어느 정부와 비교해도 북핵 대응을 위한 3국간 공조가 잘 이뤄지고 있다는 점은 성과로 꼽을만 하다.
그러나 미국과 밀착할수록 대척점에 서있는 중국과의 관계는 악화되고 있다. 최근 요소 사태에서도 당장 중국내 공급부족이 발생하지도 않았는데 요소 수출을 제한한 것은 양국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다분히 정치적 의도가 어느정도는 깔려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합리적이다.
실제로 중국 외교 분야 싱크탱크인 국제문제연구원의 한 연구원조차 "요소 부족 자체엔 정치적인 이유가 전혀 없다"면서도 "다만 현재 세계가 직면한 진영 대결, 지정학적 충돌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것은 결코 아니다"라고 실토할 정도다.
중국의 조치가 위협적이라는 이유로 중국에 굽신굽신할 이유는 없다. 그렇다고 양대 강국의 대립구도 속에서 한쪽 편에 줄을서 스스로의 가치를 떨어뜨릴 이유도 없다.
한중관계를 잘아는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반도체와 2차전지 등 첨단 산업에서 세계 최고의 기술력과 기업을 보유한 한국만큼 미중 양국 모두에게 필요한 국가도 없다"면서 "하지만 이를 협상의 지렛대로 사용하지 못하고 처음부터 미국에 줄서면서 스스로 협상력을 낮췄고, 그 결과 양측 모두로부터 푸대접을 받고 있는건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