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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2 군사반란 단죄는 어떻게 이뤄졌을까?[권영철의 Why뉴스]

정치 일반

    12.12 군사반란 단죄는 어떻게 이뤄졌을까?[권영철의 Why뉴스]

    CBS 정다운의 뉴스톡 530

    ■ 방송 : CBS 라디오 '정다운의 뉴스톡 530'
    ■ 채널 : 표준FM 98.1 (17:30~18:00)
    ■ 진행 : 정다운 앵커
    ■ 출연 : 권영철 대기자

    12.12 군사반란, 사법적 단죄는 1993년 문민정부 출범이후 이뤄져.
    검찰 12.12는 '군사반란'이라고 결론내리고도 불기소 결정,
    5. 18에 이후 내란 인정하면서도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결론
    국민적 비판 여론과 YS의 역사바로세우기로 재수사 착수해서 전.노 구속기소
    전두환 무기징역, 노태우 17년형이 확정됐지만, 8개월 만에 특별사면으로 석방.



    1979년 12.12 군사반란 사건을 다룬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돌파했습니다. 이 군사반란 자체는 물론이고 이후 내란세력 처리과정에 대해서도 관심들이 많으실텐데요. 당시 사건을 직접 취재하기도 한 권영철 대기자에게 생생한 이야기 들어보겠습니다.
       
    ◇정다운> 12.12 군사반란의 핵심주역인 전두환 노태우 두 피고인이 대통령직을 이어 받았으니까 사법적 단죄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렸지 않습니까? 어떻게 사법적인 단죄를 받게 됐는지 처음부터 풀어가볼게요.

    영화 '서울의 봄' 속 한 장면. 연합뉴스영화 '서울의 봄' 속 한 장면. 연합뉴스   
    ◆권영철> 1979년 12월 12일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군사반란의 핵심주역 전두환 노태우가 대통령직을 이어받으면서 12.12 군사반란 사건은 사법적인 단죄를 받는데 15년 넘게 걸렸습니다.
       
    5.18 광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도 빗발치긴 했지만 사법적 단죄로까지는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6월항쟁으로 민주화 바람이 거셌지만 야권 분열로 군사반란의 핵심인 노태우씨가 13대 대통령이 되면서 12.12 군사반란과 5.18 이후 벌어진 광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구체적인 책임을 묻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1993년 3당 합당으로 출범하긴 했지만,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정부가 들어서고 나서야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에 대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에 나설 수 있었습니다.
       
    ◇정다운> 문제제기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에서도 계속됐지만 군사정권이 끝나고 나서야 책임추궁이 시작될 수 있었다.
       
    ◆권영철> 그렇습니다. 1993년 2월 25일 제14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김영삼 대통령은 5.18 13주년을 앞두고 대국민 담화를 발표합니다. 먼저 들어보시죠.(1993년 5월 13일 담화)
    "1980년 5월 광주의 유혈은 이 나라 민주주의에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 희생은 바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분명히 말합니다. 오늘의 정부는 광주 민주화 운동의 연장선 위에 서있는 민주 정부입니다."

       
    ◇정다운> 오늘 이 정부의 뿌리는 군사정부가 아니라 광주민주화운동의 연장선에 서 있는 민주정부다
       
    ◆권영철> 그렇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은 '5.18 광주민주화 운동의 정신을 기리고 그 명예를 높일 수 있는 사업을 적극 지원할 것'과 '광주 민주화 운동과 관련하여 아직까지 억울한 처지에 있는 분들을 위로하는데 필요한 모든 노력과 지원을 다할 것'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렇지만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문제는 역사에 맡기고 과감하게 용서하자고 제시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의 말 이어서 들어보시죠.(1993년 5월 13일 담화)
    "진상규명은 역사를 올바르게 바로 잡고 정당한 평가를 받자는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결코 암울했던 시절의 치욕을 다시 들추어내어 갈등을 재연하거나 누구를 벌하자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잊지는 말되 과감하게 용서함으로써 새롭게 화해하자고 말하고 싶습니다."

       
    ◇정다운> 성격 규정은 제대로 했지만, 책임자 처벌에선 한 발 물러선 듯한 태도여서 반발이 심했겠는데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먼저 나선 쪽은 12.12 군사반란 당시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등 진압군 쪽입니다. 진압군 쪽 22명이 93년 7월 19일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한 신군부 측 핵심인사 38명을 군형법상 반란 등 혐의로 검찰에 고소, 고발 합니다.
       
    서울지검 공안1부에서 수사에 착수했지만 이른바 5공 실세로 불리는 하나회 출신 신군부들이 해외에 도피하기도 하고 수사에 응하지 않으면서 수사가 길어졌습니다. 93년 7월에 착수한 수사가 이듬해인 1994년 10월 말에서야 수사결과를 발표했으니까 15개월 정도가 걸렸습니다.
       
    당시 서울지검 조준웅 1차장의 발표내용 들어보시죠.
    "검찰은 어떤 결정을 하는 것이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최선인가 하는 관점에서 이와 같이 제반요소를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사회의 안정과 국가발전을 위하여 이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소추처분을 유예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노태우·전두환 전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전두환 노태우 등 34명은 기소유예, 박준병 등 4명은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한 것입니다.
       
    ◇정다운> 기소유예라면 죄는 있다는 거잖아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당시 검찰의 수사결과는 '사전 계획 하에 실행한 군사반란사건임이 명백히 드러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검찰은 그 증거로 △10.26조사와 직무상 전혀 관련이 없는 국방부군수차관보 와 수도권부대 주요 지휘관들이 정총장 연행문제를 협의한 점 △거사 직전 특전사령관등 육본 직할부대장들을 연희동요정으로 유인한 점 △집단으로 대통령에게 정총장 연행재가를 요청한 점 병력동원,△핵심 지휘관 체포, 국방부·육본 등의 점령 등에 대해 사전 모의하고 결정한 점을 제시하면서 신군부 측에 군권 장악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검찰은 12.12사건이 내란죄에 해당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내란죄가 성립하려면 정권탈취 목적이 있어야 하는데 12.12사건으로 헌법이나 헌법이 정한 정부조직 제도 자체가 파괴된 것이 아니고 당시 대통령과 국무총리 등 헌법기관이 그대로 유지됐기 때문에 국헌교란 목적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밝혔습니다.
       
    ◇정다운> 군사반란이 맞는데 봐준다? 말이 안 되잖아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군 형법상 최고의 범죄가 군사반란 아닙니까? 군사반란을 저지른 피고소인들에 대한 기소유예는 법적형평성에 어긋날 뿐 아니라 검찰의 명백한 직무유기라는 반발이 거세게 일었습니다.
       
    검찰은 전·노 전 대통령 등이 하극상에 의한 군사반란을 일으킴으로써 헌정사를 후퇴시킨 점등에 비춰 공소제기를 통해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는 것이 마땅하다"면서도 "그러나 이들을 기소할 경우 재판과정에서 과거사가 재론되는 등 법적 논쟁이 계속돼 국가분열과 대립양상을 재연함으로써 국력을 소모할 우려가 있는데다 이들이 이미 5공 청문회 등을 통해 국민적 심판을 받을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궁색한 논리를 내세웠습니다.
       
    12.12 군사반란에 대한 검찰의 1차 수사는 고소인 측의 항고와 재항고를 고검과 대검에서 기각했고, 헌법소원까지 냈지만 헌재에서도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끝나는 듯 했습니다.
       
    ◇정다운> 그게 끝이 아니었군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헌재가 검찰의 기소유예는 정당하다면서도 군사반란 혐의에 대해 대통령 재임기간 공소시효는 정지된다고 결정해, 전두환은 7년 노태우는 5년의 공소시효가 더 남게 된 겁니다.
       
    여기에 12.12 군사반란 사건에 대한 수사가 진행되고 있던 1994년 5월 13일 정동년 5.18 광주항쟁연합 상임의장 등 5.18 피해자 322명이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한 군 지휘관 35명을 '내란 및 내란목적 살인' 혐의로 검찰에 고소했습니다.
       
    검찰은 12.12 군사반란 사건에 대한 수사가 마무리된 11월 21일 5.18 사건에 대한 수사에 착수합니다. 서울지검 공안1부 검사 10명 전원이 투입됐습니다.
       
    검찰은 1995년 7월 18일 5.18 관련자들에 대해 '공소권 없음' 결정으로 면죄부를 줍니다. 검찰의 논리는 "피의자들이 정권 창출 과정에서 취한 '5.18' 진압 등 일련의 행위는 헌법질서를 바꾸는 고도의 정치 행위로서 법적 판단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한부환 서울지검 1차장의 발표 내용 들어보시죠.(1995년 7월 18일)
    "(새 정권이 출범하고 새로운 헌법질서가 실효 화된 이 사건의 경우 피의자들이 정권창출 과정에서 취한 일련의 조치나 행위는) 사법심사가 배제된다고 보는 것이 상당합니다. 따라서 이 사건 관련자 전원에 대하여 내란 죄 등 해당 여부를 판단하지 아니하고 형식판단 법리에 따라 공소권 없음 결정을 하였습니다."

       
    ◇정다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 이 때 나온 건가요?
       
    ◆권영철> 당시 검찰의 발표 내용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만 검찰이 직접적으로는 그런 표현을 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뒤에 차장검사실에서 백브리핑이 있었습니다. 장윤석 공안1부장 (그래도 승승장구해서 YS, DJ정부에서 검찰국장까지 승진했으나 노무현 정부 들어 서울고검 차장으로 좌천된 뒤 퇴직하고 경북 영주에서 국회의원에 출마해 내리 3선을 함)이 답변을 하는데 어떤 기자가 '그렇다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냐?'고 질문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장 부장이 언론 인터뷰에서 "내 입으로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은 안썼지만 형법이론으로 설명을 했다"면서 당시 발언을 소개했습니다. "어느 형법 책이나 똑같다. 내란죄는 그 성격상 미수죄만 처벌할 수 있고 기수에 이르면 처벌이 불가능하다. 어느 형법교과서나 다 그렇게 쓰여 있다"면서 사례를 들었습니다.
       
    그 사례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이었습니다. "우리 역사에서 고려장군 이성계가 쿠데타를 해서 조선을 세웠다. 그렇지만 조선치하에서 이성계를 누가 처벌할 수 있겠느냐?" 면서, "5.18은 내란죄에 해당되고 기수에 이르러서 공소권이 없음, 법률적으로 공소권이 없음 결정을 한 것"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검찰은 여기에다 새 정권 출범과정에서 국민투표로 국민적 심판을 거쳤기 때문에 사법적으로 국민의 정치적 판단을 번복하는 것도 부당하다고 덧붙였습니다.
       
    ◇정다운>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해괴한 논리 같은데요? 이게 말이 되나요?
       
    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 모인 시민. 연합뉴스5·18 민주화운동 당시 광주 금남로에 모인 시민. 연합뉴스
    ◆권영철> 말이 안 되죠. 검찰의 수사결과 발표 이후 여론은 들끓기 시작합니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말이 기름을 부은 격이 된 겁니다.
       
    당연히 12.12 군사반란과 5.18 광주학살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집니다. 야당에서는 5.18 특별법을 국회 제출하고, 김영삼 대통령이 5.18 특별법 제정을 지시합니다.
       
    그러자 검찰도 태도를 돌변해 12.12 5.18 사건에 대해 특별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재수사에 돌입합니다.
       
    당시 최환 서울지검장의 발표 들어보시죠(1995년 11월 30일)
    "당시 12.12사건과 5.18사건을 결정할 때의 사정과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재범을 했거나 또는 개전의 정이 없거나 하는 등으로 해서 다시 조사해서 처벌할…. 당시 12.12사건과 5.18사건을 결정할 때의 사정과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재범을 했거나 또는 개전의 정이 없거나 하는 등으로 해서 다시 조사해서 처벌할…"

       
    한마디로 사정변경이 생겼다는 겁니다.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모두 15명의 검사로 구성됐습니다. 특별수사본부장과 주임검사를 비롯해 서울지검 특수부와 형사부 그리고 서울의 4개 지청에서 선발된 13명의 수사검사들입니다. 특별수사본부장에는 이종찬 서울지검 3차장 검사가 주임검사에는 김상회 서울지검 형사 3부장이 지정됐습니다.
       
    검찰은 재수사에 착수한다고 밝힌 다음날(12월 1일) 전두환씨 소환을 통보하고 언론에 공개했습니다.
       
    그렇지만 전두환씨는 이에 반발하며 다음날 이른바 골목성명을 발표하고 고향인 합천으로 도피하듯 내려갑니다. 당시 전두환씨 발언입니다.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인하고 타도와 청산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은 좌파운동권의 일관된 주장이자 운동방향이었습니다. 저는 검찰의 소환 요구 및 여타의 어떠한 조치에도 협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검찰은 곧바로 2일 밤 사전구속영장을 발부받아 체포조를 합천으로 급파합니다.
       
    12월 3일 새벽 6시, 전 씨는 체념한 듯 종갓집 골목을 나섰고, 검찰은 전씨를 체포해 안양교도소로 압송합니다. 수갑을 채우지는 않았지만 덩치 큰 경찰관 2명의 중간에 앉아 300km를 달리는 모습의 사진이 전세계에 타전됐습니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이미 비자금 혐의로 95년 11월 구속된 상태였습니다.
       
    ◇정다운> 그 다음에 재판으로 이어지는 거군요?
       
    ◆권영철> 그렇습니다. 재판으로 이어지기 전에 1995년 12월 19일 <광주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안>과 <헌정질서 파괴범죄의 공소시효 등에 관한 특례법안>이 국회를 통과합니다. 이 법안은 헌재에서 합헌 결정을 합니다.
       
    그리고 1995년 12월 21일 전두환 노태우를 비롯해 황영시, 정호용, 허화평, 이학봉 등 신군부 핵심 16명을 기소합니다.
       
    1996년 8월 26일 1심 선고를 하는데 전두환 사형, 노태우 22년 6월 형을 선고합니다.
    1996년 12월 16일 2심 선고 전두환 무기, 노태우 17년으로 감형
    1997년 4월 17일 대법원에서 유죄 확정됩니다.
       
    그렇지만 8개월 뒤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 국민대화합 명분으로 관련자 모두 특별사면으로 석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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