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의 의대 정원 확대 정책에 반대하는 의사협회가 비대위 체제로 전환하고 오는 15일 전국 곳곳에서 궐기대회를 가질 예정인 가운데 13일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한 의사가 걸어가고 있다. 황진환 기자의대정원 확대에 대한 의료계 반발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전공의(인턴·레지던트)들이 당장 집단행동을 공식화하지 않은 것을 두고 정부가 안심하기엔 이르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눈앞의 파업 여부보다는, 이번 증원 발표로 인한 필수의료 현장의 절망감, 그에 따른 '의업 포기'가 더 본질적 문제라는 경고도 나왔다.
응급의학과 전문의들이 모인 대한응급의학의사회의 이형민 회장(한림대성심병원 교수)은 14일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에 출연해 정부가 내년도 의대 입시부터 늘리겠다고 밝힌 '2천 명'을 두고 "전혀 합의되지도 않은 숫자였고, 전혀 실현 가능하지도 않은 숫자"라고 정의했다.
그러면서 설 연휴를 앞둔 지난 6일, 정부가 의대 확대방안을 발표한 데엔 "연휴기간 동안 (의료계가) 대응방안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있었을 것"이라며 "정부가 착각한 것 중 하나가, 전공의들은 어차피 연휴라고 해서 쉬지 않는다. 계속 병원에 출근하며 상황을 예의주시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공의 단체인 대한전공의협의회(대전협)는 지난 12일 임시 대의원 총회에서 대한의사협회와 같이 집행부 사퇴(회장 제외) 및 비상대책위원회 체제로의 전환을 의결했다. 다만, 초미의 관심사였던 집단행동 계획은 빠져 '면허 취소'까지 거론한 정부의 압박이 통한 게 아니냐는 해석이 나왔다.
이 회장은 '정부가 한숨을 돌렸다'는 언론 보도와 관련, "정말 그것은 오판이라고 생각한다"고 잘라 말했다. 또 "(물론) 당장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은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고 저희도 그런 파국을 전혀 바라지 않는다"면서도 "정부가 무서워해야 하는 것은 집단 파업이 아니다. 의사들의 포기"라고 밝혔다.
의료현장을 사명감으로 지켜온 젊은 의사들 사이 회의감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은
"'그래. 내가 이런 대접받고, 이런 식으로 (이 분야에) 미래가 없다면 나는 의사를 그만두겠다', '의료 자체를 그만두겠다'고 하는 포기들이 이어지고 있다"며 전공의들의
'조용한 사직'이 잇따를 거라고 내다봤다.
그는 "응급의학과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과에서 지금 그런 움직임들이 보이고 있다"며 "이런 의사들의 의업 포기야말로 정부가 두려워해야 할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미래가 없는 순간, 이 친구들은 포기한다. 파업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현행 3058명인 의대 입학생이 5058명으로 늘어나게 되면, 배출되는 의사 수도 배가 돼 산술적으로 자연히 필수의료 인력 부족 문제도 해결되지 않겠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는
"우리나라 전체로 봤을 때 유일하게 나아지는 파트는 아마도 '대치동 학원'밖에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강남 학원가를 중심으로 초등학생 대상 '의대반'을 모집하는 기형적 입시경쟁과
"의대 광풍"이 심화될 거란 지적이다.
이 회장은 현 정부 들어 '필수의료 위기'가 대두될 당시 "무슨 말(개념)인지 조금 애매했지만 그래도 의사들이 '중요한 의료들이 약간은 나아지겠구나' 하고 기대하는 면이 좀 있었다"며 "그러나 그 얘기가 나오고 2~3년 동안 (실질적으로) 필수의료를 살릴 대책은 하나도 없었다"고 평가했다.
오히려
'수술실 내 CCTV 설치 의무화' 등 "의사들을 계속 억눌러서 무엇인가를 해결해보겠다"는 정책들만 도드라졌다는 취지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으로 시민들이 들어서고 있다. 황진환 기자전체 의사 수가 많아지면, 이 중 '100분의 1'만 응급의학과를 가도 응급실 의사가 늘어나는 게 아닌지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그럼 (나머지) '100분의 99'는 뭘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되는 것"이라며 "지금도 1년에 (의대에 가는) 3천 명 중 응급의학과를 하는 사람이 100명 정도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야간 근무와 상대적으로 열악한 처우에도 불구하고 "힘들지만 여기서 보람을 느낄 것이란 생각" 하나로 응급의학을 진로로 선택해 왔는데,
의대 증원의 결과로 이 지원율이 크게 늘 거란 기대는 "전혀 하지 않는다"고도 했다.
필수의료 분야 불가항력 의료사고에 대한 면책 등 의사들이 주장해온 '의료사고처리특례법 도입'이 일종의 당근책이 될 수 없냐는 지적엔 "지금 정부가 얘기하는 형사처벌 면책은 '결국 민사소송은 (본인이) 책임져'라는 것"이라며 "면책 또한 피해자와 합의를 하는 보험 등을 가입하는 여러 단서조건을 달았다"고 짚었다. 필수의료에 종사하는 의사들이 여전히 '사법리스크' 부담을 떠안아야 하는 현실은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이다.
의사들에게 교수 채용 및 정주여건 등의 혜택을 제공하고 지역 복무를 유도하는 '지역필수의사제'와 관련해선 "응급의료체계를 살리기 위해서는 취약지역의 응급의료 인프라를 확충해야 한다. 10년, 20년 전부터 계속적으로 주장해온 말"이라고 말했다.
특히 24시간 돌아가는 응급실의 경우, "하기 싫은 사람을 강제로 앉혀놓는다면 절대로 응급의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며 "지역에 강제로 몇 년을 근무시킨다 했을 때 이 사람이 과연 응급실에서 일을 할 만한 동기부여가 될 것이냐(가 핵심)"라고 부연했다.
서울의 한 대학 병원에서 한 의사가 걸어가고 있다. 황진환 기자의사들이 스스로 자부심을 갖고 지역에 남아 일할 수 있는 조건으로는 △필수의료에 대한 대우 개선(수가 인상 등) △의료사고로 인한 법적 위험성을 낮추는 것 등 2가지를 제시했다.
의대 2천 명 증원을 강행할 시 의대생·전공의들이 가장 많이 우려한 '의학교육 질 저하'도 필연이라고 강조했다.
이 회장은 "'이 동그란 밥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다고 뭔 일 생기겠냐' 정도로 접근해서는 망할 수밖에 없다"며
"2천 명이 아니라 20명, 200명을 늘린다 해도 (교육 여건 준비에는) 최소 5년, 10년의 준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당장 1~2년 사이 해부학·생리학·생화학 등의 기초(의학) 교수들을 어떻게 구할 건가. 2천 명을 늘리려면 아무리 적게 잡아도 50명, 100명은 구해야 한다"며
"우리나라에서 한두 명을 (제대로)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몇 달 안에 이걸 하겠다는 것은 거짓말"이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