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도피' 논란을 일으킨 이종섭 주 호주 대사가 21일 오전 인천국제공항 제1터미널을 통해 귀국하고 있다. 인천공항=박종민 기자해병대원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의 핵심 피의자인 이종섭 주호주대사가 출국 11일 만에 귀국했다. 이 대사는 오는 25일 예정된 방산 공관장 회의에 참석한 뒤에도 호주로 돌아가지 않고 4·10 총선까지 국내에 머무를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대통령실과 여권에서 연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에 이 대사 소환을 압박하는 가운데 정작 수사의 키를 쥔 공수처의 고심이 깊어진다는 분석이 22일 나온다.
귀국한 이종섭 "조사 희망"…공수처에 촉구
이 대사는 전날 인천공항에서 기자들과 만나 "(수사 외압) 의혹은 사실이 아니다. (국내) 체류하는 동안 공수처 조사 받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공관장 회의 이후 오는 4월 말~5월 초 예정된 한-호주 2+2(외교·국방 장관) 회담 준비 업무도 할 것이라고 했다. 이 대사의 국내 체류 기간이 다음 달 총선은 물론이고 한 달 이상 장기화할 가능성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앞서 이 대사는 해병대원 순직 사건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논란의 중심에 선 지난 10일 호주로 출국했다. 이달 4일 이 대사 임명부터 공수처의 소환 조사(7일), 출국금지 해제(8일) 등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를 두고 더불어민주당 등 야권에서 '도피 출국'이라며 비판하자 대통령실과 여권은 "이 대사를 당장이라도 소환하라"며 수사 주체인 공수처로 화살을 돌렸다.
거기에 더해 이 대사는 지난 19일 공수처에 '조사기일지정 촉구서'까지 접수하며 피의자가 수사기관을 상대로 소환을 압박하는 이례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부를 때가 아닌데"…난감한 공수처
공수처 제공이 대사의 조기 귀국이 현실이 되면서 공수처는 난감한 상황에 빠졌다. 공수처는 수사 외압 의혹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대사의 추가 소환 조사가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지난 7일 한 차례 소환 조사가 있었지만, 4시간에 걸친 약식 조사에 불과했고 혐의를 둘러싼 실질적인 문답이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공수처의 수사가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는 것이 현시점에서 이 대사 소환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공수처가 이 사건과 관련해 박정훈 대령(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고발장을 접수한 것은 지난해 8월이다. 5개월이 흐른 올해 1월에서야 주요 관련자를 상대로 압수수색에 나서며 수사를 본격화했다.
다시 두 달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공수처는 여전히 압수물 분석을 진행 중이다.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 유재은 국방부 법무관리관 등 피압수자에 대한 소환 조사도 아직이다. 현 단계에서 이 대사를 소환하더라도 실효성 없이 설익은 조사로 끝마칠 공산이 크다는 얘기다.
다른 기관은…검찰, 송영길 문전박대 두 번이나
이 대사와 유사한 사례로 검찰 수사를 받은 송영길 전 민주당 대표 사건이 꼽힌다. 송 전 대표는 민주당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이 불거지자 프랑스 파리에서 귀국해 지난해 5~6월 두 차례에 걸쳐 서울중앙지검에 자진 출석했다.
당시 "주변 사람 괴롭히는 것을 그만두고 나를 소환해 달라"는 송 전 대표 주장에도 검찰은 피의자 조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형사사법 절차는 모두에게 공정해야 한다. 아직 소환할 단계가 아니라 조사하지 않는 것이고 필요한 시기에 진행하겠다"는 이유였다. 송 전 대표는 당시 반부패2부 수사팀 면담 요청마저 거절당해 발길을 돌렸다. 검찰은 반년 뒤인 지난해 12월 송 전 대표를 소환했고 결국 구속해 재판에 넘겼다.
공수처는 이 대사 소환 계획에 대해 "아직 결정된 것이 없다"며 말을 아꼈다. 공수처 안팎에선 수사팀이 정치권 등의 압박과는 무관하게 수사팀 판단으로 이 대사 소환 일정을 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한 검찰 출신 변호사는 "수사기관이 정치권이나 유력 피의자로부터 휘둘리는 모습을 연출하면 수사는 이미 주도권 다툼에서 실패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