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만화 전문 황지성 웹툰 작가. 김민수 기자야구 만화를 전문으로 하는 황지성 작가는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야구를 시작했다. 중학교 야구부에서 3루수로 활약하며 부모님의 기대를 모았지만 그는 끝내 선수의 길을 포기했다. 그저 야구가 좋아서 즐겁게 공을 던졌지만 스포츠 입시의 치열한 경쟁과 소년야구에 비해 고압적인 고교야구 문화를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전국구 기량은 아니었어요. 그저 야구가 좋아서 야구를 재밌게 하고 싶었거든요. 그렇게 중학교 3학년까지 올라갔는데, 쟁쟁한 중학 선수들이 진학한 고교 야구부에서 1학년부터 다시 시작하려고 하니 한창 사춘기 마음에 조금 힘들었던 것 같아요. 병장이 됐는데 다시 이등병으로 군대 가는 느낌이었죠."
각종 전국 대회와 봉황대기 상위권에 들 정도로 유명한 야탑고에 진학했지만 결국 동네 고등학교로 전학했다. 혹시나 다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야구부가 있는 학교를 선택했지만 끝내 유니폼을 입지 못했다.
유난히 야구를 좋아했던 아버지, 치열한 경쟁 속에 놓인 아들을 안타까워했던 어머니는 그가 야구를 그만두기로 한 날 함께 펑펑 울었다고 한다. 복합적인 심정이 교차했지만 꿈을 향한 목표와 놓지 않았던 기대가 한순간 와르르 무너졌을 때의 상실감은 고등학교 3학년 내내 이어졌다.
만화를 좋아해 종종 만화 그리기를 즐겼던 그는 방황을 끝내고 펜을 들었다. 고3이 되자 진학을 고민했던 그는 '슬램덩크'와 'H2'를 보며 미처 채우지 못한 자신의 꿈을 만화로 실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야구 만화 전문 황지성 웹툰 작가. 김민수 기자"제가 정말 좋아하는 것을 포기할 때 마음이 복잡했어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 자유로워질 것 같았는데, 유일한 목표가 사라지니 상실감이 너무 컸죠. 결국 만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정하자 다시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어요. 절실했죠. 만화 '미생'을 보면 사회 경험도 없이 다소 늦게 불안정한 회사 생활을 시작하는 장그래가 위기 때마다 자신이 바둑을 두었던 경험을 활용해서 기지를 발휘하잖아요. 저도 야구를 했던 경험이 삶 곳곳에서 어려운 일을 만날 때마다 도움이 되더군요."
'실패'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자 인생의 과정이라고 말하는 황 작가는 여러 차례 데뷔 실패도 겪었다. 자신의 경험이 녹아 있는 야구라는 소재에는 자신 있었지만 본격 상업 만화를 이끌어가는 데는 장그래처럼 경험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야구는 팀플레이다. 자전적 이야기와 실존인물이 등장하는 데뷔작 '피치: 마운드의 여왕'은 같은 공간에서 만화를 그린 대학 동기 명랑 작가와 불개미 작가의 전폭적인 도움으로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풍부한 스토리의 본격 야구 만화를 그리는 국내 작가는 그리 많지 않다. 황 작가는 한국의 아다치 미츠루, 테라지마 유지가 될 수 있을까.
지난해 12월 황 작가의 인스타툰 '야구팬 야덕씨' 2권이 출간됐다. 야구를 소재로 자전적 이야기와 실존인물을 극화한 만화, 야구 슈퍼스타 빙의물, 일상에서 야구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등 다양한 야구 만화로 독자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는 황지성 작가를 노컷뉴스 [만화iN]이 만났다.
황지성 작가는 데뷔작 '피치: 마운드의 여왕'을 비롯해 인스타툰 '야구팬 야덕씨' 등 다양한 야구만화 작품을 선보였다. "못 이룬 꿈, 야구 만화에 투영하고 싶었어요"
- 사춘기 시절 야구 선수의 꿈을 포기하고 만화가의 길을 선택하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 돌이켜보면 엄청난 변화였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야구를 포기해야 한다는 상실감이 매우 컸다. 고등학교 3년의 시간이 너무 힘들었다. 목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그 결정은 내가 한 것이기에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였다. 야구하면서도 내가 좋아했던 만화들을 종종 따라 그렸던 터라 혹시 내가 못 다 이룬 꿈을 '슬램덩크'나 'H2' 같은 만화에 투영할 수 있겠다 싶어서 결정했다. 데뷔까지 쉽지는 않았지만 만화 캐릭터에 나의 이야기, 내가 하고 싶었던 야구를 담아낼 수 있어서 좋았다.
- 본격 야구 만화를 그리기로 한 계기가 있나?= 특별하지는 않았지만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는 걸 즐겼다. 내가 야구를 포기한 이후 부모님은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셨는데, 방황하고 있던 터라 그동안 부모님께 불효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좋아했던 '슬램덩크'나 'H2' 같은 스포츠 만화에서 보면 실제 그라운드 플레이에서 하지 못했던 것을 만화 등장 인물들이 결국 해낸다. 그런 면에서 만화·웹툰 작가는 창조주 아닌가. 하고 싶은 것을 캐릭터에 모두 투영해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심장이 뛰고 내가 야구에서 못 풀었던 것을 만화에 다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다양한 작품을 통해서 다양한 세계관을 담은 야구 만화를 그리려고 한다.
- 웹툰 '피치: 마운드의 여왕'으로 2013년 데뷔했다. 만년 2군 야구선수 진선미를 그린 이야기로, 실존인물이라고 하는데?= '피치: 마운드의 여왕'은 실제 내가 경험한 이야기와 실존인물의 일화를 바탕으로 그린 팩션(Faction)이다. 국내 최초 여자 야구선수 안향미 선수를 모티브로 했다. 안 선수와 같은 계원중학교에서 야구를 했다. 1년 선배였는데, 당시 기사에도 많이 나왔지만 '천재 야구 선수'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사실 여자가 야구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아 당시에 뉴스에 나올 정도로 사회적 벽이 컸다. 함께 야구를 했지만 내부에서는 따로 말을 걸거나 함께 어울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말을 걸기라도 하면 다른 친구들이 놀려댔다. 어찌 보면 사춘기 남자 아이들의 왕따 같은 거였다.
제 작품 이후에 2020년 영화(야구소녀)로도 만들어진 것으로 안다. 최초의 프로야구 진출까지 기대를 모았던 안 선수가 고교야구 진학 후에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안 선수와 함께 야구하면서 그분이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돌이켜보면 좋은 동료들을 만나고 사회나 체육계의 터부가 없었다면 분명 좋은 성적을 거뒀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접 안 선수에게 작품 모티브로 쓸 수 있도록 허락도 받고 추가 취재도 해서 주인공 진선미가 기댈 수 있는 좋은 친구와 동료들의 이야기를 더했다.
야구 만화 전문 황지성 웹툰 작가. 김민수 기자- 데뷔작부터 꾸준히 야구 만화를 하고 있는데, 작품들을 소개해달라.= 2013년 웹툰 데뷔작 '피치: 마운드의 여왕'을 시작으로 2018년 2년 동안 '야신' '야구계의 꼴통'으로 불리는 야구신화 '최진'이 최약체 병문고의 감독이 되어 돌아온다는 내용의 '야신을 위하여'를 연재했다. 2019년부터 야구 생활툰 '야구팬 야덕씨'를 연재하다가 현재까지 인스타툰으로 그리고 있다.
2022년 애니메이션으로도 만들어진 '안녕! 로보99' 단행본 그림 작가로 참여하기도 했다. 그해 서른 살 취준생 진국이 교통사고로 연봉 30억원의 프로야구 홈런왕 천재형의 몸에 빙의돼 메이저리그 진출을 향한 야구인생을 그린 '홈런의 공식'을 연재했다. 현재는 연재중인 야구 웹툰 '천재타자가 강속구를 숨김'의 스토리 각색과 콘티에 참여하고 있다.
- 다양한 스토리의 만화 야구를 그리다 보니 그림체도 조금씩 달라지는 것 같다. 정통 극화도 있지만 '야구팬 야덕씨'처럼 귀여운 캐릭터도 있다.= 어쩌다 보니 그림체가 다양해졌다. 저만의 특별한 무기가 있었다면 갈고 닦았을 텐데, 아무래도 재능이 부족하다 보니 작가로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던 것 같다. 이제는 나만의 색깔을 내고 싶다. 극화체든 캐릭터 스타일이든 황지성 작가의 아트웍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결과물을 만들어내고 싶다.
- 야구 만화는 아무래도 마니아 장르로 볼 수 있는데, 야구 만화를 그리면서 특히 주안점을 두는 것이 있나?= 작품마다 스토리가 다를 수 있지만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야구 콘텐츠를 생각하면 주로 촉망받는 주인공 투수나 4번 타자를 떠올릴 수 있지만 야구인이 아니라면 잘 모를 그 주변부의 이야기를 함께 길어올리려고 한다. 찐 야구팬의 이야기인 '야구팬 야덕씨'도 있지만 '슬램덩크'나 'H2'처럼 드라마가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 야구선수를 경험한 제 이야기도 충분히 녹여내고 싶다.
- 야구선수를 꿈꾸다 웹툰 만화계에 입성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 다른 친구들과 달리 처음 데뷔가 쉽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은 출판만화가 거의 죽고 웹툰으로 시장이 본격화 하던 시절이었다. 뒤늦게 만화를 시작한 것도 있고, 나름 준비해 투고도 했지만 데뷔가 계속 늦어졌다. 그래서 가장 잘하는 앞사람을 쫓아가는 것이 내 결심이 됐다. 먼저 데뷔한 대학동기 명랑 작가와 불개미 작가의 도움이 컸다.
데뷔작 '피치: 마운드의 여왕'은 투고했던 곳에서 더 레벨이 낮은 소형 플랫폼에 내보는게 좋겠다는 답을 들었다. 심지어 스토리 수정까지 하자고 하더라. 낙심이 컸다. 나보다 앞서가는 명랑 작가와 머리를 맞댔다. 그의 조언으로 거의 다 뜯어고쳤다. 다시 플랫폼에 들고 갔더니 그냥 자기네 웹툰 플랫폼에서 연재하자고 하더라. 그래서 데뷔를 할 수 있었다. 고민 끝에 만들어진 작품이 독자들에게 보여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던 마음은 사라지고 성취감이 컸다. 그동안 포기했던, 실패했던 것들이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좋은 감독, 명랑 작가를 만났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단편으로 새 작품을 준비하고 있다고 들었다.= 중단편 웹툰 플랫폼 재담쇼츠와 새 작품을 준비 중이다. 봉황대기 고교야구를 배경으로 경기 마지막회 에이스 투수의 부상으로 경기 경험이 거의 없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던 만년 후보 투수가 마운드에 올라 일생 일대의 순간을 맞는다는 이야기다. 오로지 경기에 몰입할 수 있는 역동적인 야구 액션과 심리 묘사가 담긴 정통 야구 만화다. 시점은 미정이지만 올해 중 연재 될 예정이다. 기대해 달라.
야구 만화 전문 황지성 웹툰 작가. 김민수 기자 - 특별히 가장 애정이 가는 작품이 있나?
= 모든 작품에 애정이 담겼지만 '야구팬 야덕씨'가 지금으로서는 가정 애정이 가는 작품이다. 다른 작품들과 달리 완결 지점을 보지 않고 긴 호흡으로 그리려 한다. '스누피'처럼 일상에서 편하게 즐겨보는 만화로 웹툰과 야구팬 사이에 자리잡았으면 한다. 많은 분들이 사랑해주셔서 펀딩을 통해 단행본으로 1·2권이 출간됐고, 재작년에는 프로야구팀 KT위즈와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캐릭터 이모티콘도 출시됐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도, 야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야구 업계도 즐길 수 있는 캐릭터 카툰으로 만들고 싶다.
- 여러 작품을 했지만 아직 다 담지 못했던 야구 이야기도 있을 것 같다. 꼭 해보고 싶은 스토리가 있나?= 아직 정해진 것은 없지만 크게 두 가지 욕심이 있다. 'H2' 같은 정통 소년만화와 드라마성 짙은 성인 야구 만화다. 드라마 '스토브리그'처럼 야구를 둘러싼 야구인들의 이야기를 그려보고 싶다. 제 작품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야구에 빗대면 특급 선수는 아니었지만 좋은 기회와 좋은 감독을 만나 꾸준히 타석에 나설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음 작품에도 이런 마음을 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