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대위원장이 27일 인천 미추홀구 인하 문화의거리를 찾아 총선 지지를 호소하고 있다. 윤창원 기자
"정말 심판받아야 할 사람들은 이재명, 조국이라는 것을 알려야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국민들께서 많이 망각하시고 잊어버리고 계시거든요. 이재명이라는 사람이 어떤 범죄에 연루됐고 어떤 증거들이 나오고 어떤 수사가 되고 있는 사람인지, 조국이라는 사람이 어떤 범죄를 저질러서 어떤 형량을 받고 어떤 상황에 있는지 이런 부분에 대해서 사실 알고는 계시더라도 그 부분을 자꾸 잊어버리시는 경우가 많이 있을 수밖에 없어요"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 겸 총괄선대위원장이 지난 25일 '총선 전략'에 대한 질문에 내놓은 답변이다. 한 위원장 입장에서는 답답할 만하다. 현재 기준 2심까지 실형 2년 유죄가 인정된 조국 대표의 '자녀 입시비리 사건' 수사를 직접 이끌었던 책임자로서 지금의 '조국혁신당 돌풍'이 이해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국민들이 단체로 망각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현장에서 해당 답변을 듣다 보니 궁금해졌다. 당시 한 위원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을 만나러 갈 예정이었는데, 박 전 대통령은 징역 20년을 선고받아 대법원에서 최종 유죄가 확정된 바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 위원장은 '박근혜 국정농단' 특검 수사에 참여했고, 재판장에 참석해 직접 박 전 대통령에게 "국정을 농단하고 헌법가치를 훼손 유린했다"며 징역 30년을 구형하기도 했다. 한 위원장이야말로 과거를 잊어버린 것은 아닌지 의문이었다.
더군다나 한 위원장의 주요 정치적 자산은 법치주의다. 법무부 장관 출신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여러 범죄 혐의를 받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대항마'로서 정치에 데뷔하자마자 여당 대표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또 법무부장관 당시 야당 의원들의 '내로남불' 행태를 조목조목 반박하면서 '스타 장관' 타이틀을 얻기도 했다.
이런 한 위원장이 박 전 대통령을 만나는 것은 그간 쌓아왔던 정치적 이미지와는 정반대 행보로, 자기 부정에 가깝다. 특정 명분이나 설명이 필요해 보였다. 과거를 모른체하고 얼렁뚱땅 만나러 가는 것은 정치인으로서 부적절해 보였다. 함께 특검에 참여했던 윤석열 대통령도 박 전 대통령을 대면한 것은 대선 이후인 당선인 신분 때로, 당시 "아무래도 지나간 과거가 있지 않나. 인간적인 안타까움과 마음 속으로 갖고 있는 미안함을 말씀드렸다"고 밝히기도 했다.
특히 한 위원장과 박 전 대통령의 만남을 언론 등에서는 총선을 앞둔 '보수 결집'이라고 해석하지만, 이는 바꿔 말하면 한 위원장이 정치적 위치에 따라 언제든지 범죄에 대한 잣대를 달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 그의 생각이 듣고 싶어 질문을 던졌다.
국민의힘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이 26일 대구 박근혜 전 대통령 사저에서 박 전 대통령과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윤재옥 원내대표, 박 전 대통령, 한 위원장, 유영하 변호사. 국민의힘 제공"국민들이 이재명 대표와 조국 대표의 범죄 혐의를 망각하는 것 같다고 했는데, 이번 주에 박근혜 전 대통령 만나러 가시잖아요. 국정농단 특검에도 참여했고 박근혜 전 대통령을 수사해서 유죄 확정까지 받았는데, 이번에 만나기로 한 것과 관련해 같은 비판을 똑같이 받으실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혹시 수사하실 때와 입장이 바뀐 게 있는지 궁금합니다""CBS OOO 기자님이시죠. 또 그런 류의 질문을 하시는데요. 일단 사면 받은 내용은 다 알고 계시잖아요. 그리고 그거는 정치적인 어떤 그런 말씀을 드리는 것이고. 지금 박근혜 전 대통령께서 이재명 대표나 조국 대표처럼 권력을 장악하겠다고 하고 계신가요? 그렇게 보시나요? 그런 취지가 전혀 아니죠. 저는 이명박 전 대통령도 찾아가 뵐 계획입니다. 정치인으로서 전직 대통령을 찾아가 뵙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죠. 그건 전혀 다른 얘기라는 것이 저는 다 이해하실 것 같은데요"
한 위원장의 답변은 실망스러웠다. 답변의 내용 자체에 대한 평가는 '정치인 한동훈'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부분으로 논외로 치더라도, 기자의 매체와 실명까지 거론하며 '좌표찍기'에 나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좌표찍기'는 다른 사람의 신상을 온라인에 공개해 지지자 등에게 공격하도록 유도하는 행위를 말한다.
애초 국민의힘 출입기자들은 한 위원장에게 질문할 때 매체와 이름을 밝히고 한다. 당일 질의응답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럼에도 한 위원장은 "또 그런 '류'의 질문을 한다"고 쏘아붙이며 매체와 기자 실명을 본인 입으로 다시 한번 언급했다. 더군다나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한 위원장은 취임 이후 지금까지 언론과의 질답 과정에서 비판적인 취지의 질문에 대해서만 이날처럼 매체명을 언급하는 행태를 수차례 반복해왔다. 여기에 기자 실명까지 거론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의도가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실제 해당 장면이 유튜브 생중계 등으로 방송된 뒤 보수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기자의 실명이 오르내리면서 조리돌림이 시작됐다. 기자는 주변 조언에 따라 황급히 개인 SNS를 비공개 처리하는 등 혹여 있을 전화번호·주소와 같은 개인정보 유출을 우려해야 했다. 대통령실 황상무 전 시민사회수석이 '회칼 테러' 발언으로 언론을 겁박했다는 논란 끝에 사퇴한 지 일주일이 채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앞서 윤석열 대통령은 '입틀막 경호'로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입틀막'이란 '입을 틀어 막는다'의 줄임말로 대통령경호처 직원들이 행사장에서 윤 대통령에게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인사들의 입을 틀어 막고 내쫓으면서 논란이 됐다. 한 위원장도 '좌표찍기'를 통해 출입기자들을 겁박, 입을 틀어 막으려고 하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미워하면 서로 닮는다고 했던가. 한 위원장은 점점 민주당 이재명 대표를 닮아가는 것 같다. 지난 2022년 12월 민주당 검찰독재정치탄압대책위원회는 이 대표를 수사하는 검사의 실명 등을 공개해 논란을 빚었다. 당시 한동훈 법무부장관은 신년사에서 이를 겨냥해 "다중의 위력을 이용한 온라인 마녀사냥, 좌표찍기를 통한 집단 괴롭힘 등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다양한 방식의 협박 범죄에도 적극 대처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