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4일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의료개혁 관련 현안브리핑에서 기자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연합뉴스정부가 올 2월 의대 증원 정책에 반발해 의료현장을 떠난 전공의들이 제출한 사직서 수리를 허용하기로 했다. 전국 수련병원들에 내린 사직서 수리금지 명령을 4일 부로 철회한 것이다.
전공의들이 대거 병원을 빠져나간 2월 20일을 기점으로 105일 만에 이뤄진 변화다.
각 병원장들이 전공의들의 '사표'를 정상 수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은 그간 정부가 석 달 넘게 반복해온 "돌아오라"는 원론적 호소를 중단하겠다는 의미기도 하다. 미래 필수의료를 책임질 젊은 의사들을 향한 복귀 요청은 계속되겠지만,
끝내 돌아올 생각이 없는 전공의에 대해서는 수련에서 중도 하차할 '퇴로'를 열어주겠다는 취지기 때문이다.
앞서 정부가 전공의 집단사직 초반에 "이번엔 사후 구제, 선처 등이 없다. 굉장히 기계적으로 법을 집행하게 될 것"(박민수 보건복지부 제2차관)이라며 법과 원칙에 근거한 대응을 내세웠던 것과는 180도 뒤바뀐 기조다. 정부는 월 2천억에 가까운 건강보험 재정을 투입 중인 '비상진료'가 장기화되며 남은 의료진이 한계상황에 다다랐고 환자 불편이 커지고 있는 점을 들어
"불가피한 조치"임을 강조했다.
인턴·레지던트가 전체 의사의 40% 이상을 차지할 만큼 전공의 의존도가 큰 상급종합병원 등에서는 정부의 노선 선회가 전문의 자격 취득을 눈앞에 둔 고연차 레지던트 등에게 유인책이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하는 분위기도 읽힌다.
다만, 전공의·의대생을 가르쳐온 의대 교수 등을 포함한 의료계 전반에서는 '이미 늦었다'는 짙은 냉소도 상당하다. 무엇보다
당사자인 전공의들 사이에선 '어차피 돌아갈 생각이 없다'는 미온적 반응이 커 얼마나 많은 전공의가 뒤늦은 수련을 이어갈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당근책' 기대하는 상급병원도 "복귀율, 올라야 최대 30%"
가톨릭대학교 의과대학 교수협의회 비상대책위원회가 지난달 31일 서울성모병원에서 연 '의정갈등을 넘어 미래 의료 환경으로' 심포지엄에서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이 발표를 지켜보고 있다. 연합뉴스5일 CBS노컷뉴스 취재를 종합하면, 복지부가 전날부터 발송한 사직서 수리금지 명령 철회 관련 공문을 받은 수련병원 중 전공의 복귀 여부 파악을 위한 개별상담을 다시 시작한 곳은 거의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지부는 내심 복귀를 원하지만 집단 내 '낙인 효과'를 저어해 주저하는 전공의가 상당수란 판단 아래 이미 지난달 31일까지 각 수련병원장과 진료과장 등을 통해 사직 전공의 개별 상담을 진행한 바 있다.
이달 들어 정부가 주요 상급종합병원을 중심으로 취합한 상담 결과는 초라한 수준이다. 의사 집단행동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에 따르면,
전공의 수가 많은 상위 100개 수련병원 중 70% 가량이 제출한 자료상 해당 병원들의 전공의 복귀 응답률은 '10% 이하'인 것으로 조사됐다.
수도권 5대 대형병원인 '빅5'에 속한 병원 관계자는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임상진료과 과장을 통해 (복귀)의사를 확인하고 병원장은 결재만 하는 것"이라며 "이번 정부 발표 전에도 (전공의) 직접 면담은 한 명도 없었고 극히 일부만 통화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최근 복귀했거나, 이를 문의한 전공의는 전혀 없었다. 전임의(펠로우)만 조금 늘었을 뿐"이라면서도 "이번에 다시 개별적으로 면담을 하면 복귀 의사를 전하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있다"고 조심스러운 바람을 밝혔다.
이러한 기대엔 사직 전공의가 원래 소속돼 있던 병원을 아예 떠나 다른 곳에 취업하려 해도, '전문의 자격이 있고 없고'는 구직 경쟁력에서 큰 차이일 수밖에 없다는 현실도 반영됐다. 이 병원 관계자는
"종합병원에서 (의사 면허만 있는 일반의인) 전공의를 뽑는 곳은 (별로) 없다. 그럼 개업을 하지 않는 이상 전공의들이 갈 곳이 마땅히 없을 거란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정부가 일단 돌아오는 전공의들에 한해선
수련 규정까지 손질하며 최대한 '차질 없는 수련'과 전문의 자격 취득 지원을 약속한 것도 당근책이 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복지부는 전날 관련 브리핑에서 고연차 레지던트의 경우, 우선 내년 1월 전문의 시험에 응시한 뒤 추가 수련기간을 채우면 면허를 발급하는 등의 대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추가 시험 기회를 부여하는 방안도 고려할 방침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향후 돌아올 전공의 규모를 예단하긴 어렵다는 입장이지만, 사직 허용 조치를 통해 복귀율이 '50% 안팎'까지 오를 수 있다고 내다본다. 현재 출근 중인 전공의는 전체 1만 3천 명 대비 7~8% 정도에 불과하다. 반면
주요 상급종합병원들에선 "많아봐야 전체 30% 정도"일 것으로 보고 있어 온도 차이는 분명한 상황이다.
의료계 "갈라치기 의도" "처벌 가능성 살려둔 말장난" 비판
지난 4일 한 온라인 익명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 인터넷 화면 캡처의료계에서도 정부 조치의 실효성과 의미에 회의적인 시각이 지배적이다. 서울대·연세대·울산대 등 19개 의대 교수가 참여 중인 전국의과대학교수 비상대책위원회(전의비)의 공보 담당 고범석 교수(서울아산병원 유방외과 교수)는 "(정부의 표현과 달리) 정부가 전공의를 위한다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며
"(의사들을) '갈라치기'하려는 의도로 보인다"고 비판했다.
이어 "'정부가 정말 다급한가 보다'란 느낌"이라며 "하지만 전공의들은 돌아가지 않을 거다. 후배이자 동생인 의대생들이 복귀하지 않는데, 본인들이 돌아갈 수 없다는 생각도 크다. 정부에서 계속 (의대 증원을) 주장하는 이상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수도권 소재 상급종합병원에 근무하는 교수 A씨도 정부가 복귀하는 전공의에 대해선 면허 정지 등의 행정처분 절차를 즉각 중단하겠다고 밝힌 것과 관련,
"그럼 돌아가지 않는 전공의들은 여전히 처벌 가능성이 살아 있단 말 아닌가"라며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평가 절하했다.
이제 와 돌아갈 여지가 있었다면 애초에 사직서를 내지 않았을 거란 지적도 많다. 노환규 전 대한의사협회 회장은 전날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글에서 "(전공의들에게) '노예'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머리 숙이고 기어 들어오라는 말"이라며 "전공의들은 지난 수개월간 '우리는 당신들(정부 등)의 노예가 아니다'란 사실을 온몸으로 부르짖어 왔다"고 적었다.
실제로 박단 대한전공의협의회 비상대책위원장은 페이스북 글을 통해 "퇴직금은 준비가 되셨겠죠"라며 "사실 이제는 뭐라고 지껄이든 궁금하지도 않다. 전공의들 하루라도 더 착취할 생각밖에 없을 텐데요"라고 비꼬았다. 또
"달라질 건 없다. 응급실로 돌아가진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원칙적 대응' 강조하더니, 결국 '의사 편의 봐주는' 정부?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이 지난달 31일 서울 용산구 서울역 공항철도 회의실에서 환자단체연합회와 간담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에 더해 정부가 의대정원 증원 등 '의료개혁' 완수를 다짐하며 세웠던 원칙을 스스로 무너뜨렸다는 비판은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복귀 여부에 따른 차등은 두되, 병원을 떠난 전공의들에게 업무개시명령 불복의 책임을 묻겠다는 입장을 수차례 밝혀 왔다. 코로나19 유행 국면에서 의료계 반발에 밀려 의대증원 추진을 접은 전임 정부와 달리 의사들의 집단행동에 '면죄부'를 주는 일은 없을 거란 점도 어필했다.
의·정 갈등 장기화로 인한 사회적 부담을 덜기 위한 의도라 하나, 결국 의사들의 편의를 봐주는 게 아니냔 '쓴소리'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우려는 정부가 "비판을 각오하고 (금번 조치를) 결정했다"며 핑계로 댄 '환자'들의 입에서도 나왔다. 김성주 한국중증질환연합회 대표는 "정부의 이번 조치를 기본적으로 환영한다"면서도 "사직서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서 전공의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고 말했다.
또한 "조규홍 복지장관은 전공의들이 앞으로 '훌륭한 의사'로 성장토록 돕겠다고 했는데,
100일 넘게 환자와 가족들의 고통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 한 번 없었던 전공의들이 훌륭한 의사로 거듭날 수 있다는 시각 자체가 매우 적절치 못하다고 본다"고 일갈했다. 그는 "(정부가) 이런 생각으로 그동안 환자들의 고통을 외면한 게 아닌가 싶다"고 씁쓸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