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3월 10일 일요일. 신임 호주대사로 임명된 이종섭 전 국방부 장관이 호주행 비행기를 타기 위해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총선을 한 달여 앞둔 시점. 윤석열 대통령의 느닷없는 인사에 민심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공천 파동으로 인해 제1야당인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이 바닥을 찍은 상태였지만, 뜬금없는 이 전 장관의 출국 논란으로 지난해 7월 발생 후 8개월 간 잠잠했던 '채상병 순직 사건'이 재조명됐습니다. 결과적으로 출국 11일 만에 돌아온 이 전 장관은 대사 임기를 한 달도 채우지 못하고 자진 사퇴했지만, 여전히 '채상병 순직' 수사 외압 의혹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취재 내용을 공개하기 전에 자기 고백 아닌 자기 고백을 하나 하고자 합니다. 지난해 7월 19일 해병대 소속 채상병이 경북 예천군 내성천에서 폭우로 인한 실종자 수색 도중 순직한 이후 박정훈 해병대 전 수사단장에 대한 항명죄 재판 그리고 대통령실 외압과 은폐 의혹 등 각종 사건 사고가 8개월 동안 이어졌습니다.
폭우 실종자 수색 도중 숨진 채상병…돌발 사고였나
이정주 기자가 지난해 수해가 발생했던 경북 예천군 내성천을 찾아 채상병 순직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언론사 내부에서 초기엔 채상병 사건을 '출입처' 시스템에 따라 국방부 기자들이 담당했지만, 수사 외압 논란이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로 번지면서 법조 기자들도 뛰어들었습니다. 채상병이 순직할 때만 해도 담당 기자가 아니었기에, 지난 3월 이 전 장관의 출국을 계기로 본격 취재에 착수한 이후에야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채상병 사건의 전말을 잘 모르고 있었단 사실을.
주변 상당수 사람들이 채상병 사건을 이렇게 인식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7월 경북 예천 인근에서 폭우가 쏟아졌고, 피해 지원 활동에 나선 한 해병 대원이 급류에 휩쓸려 안타깝게 숨진 사건. 크게 틀린 건 아니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 사실이 빠져 있었습니다.
과거에도 군 장병들은 홍수나 화재 등 재난 현장에 빈번하게 동원됐고, 안타깝지만 그 과정에서 산사태 등 돌발 변수로 군인들이 숨지는 사건 사고는 종종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채상병 사건도 이런 돌발 사고에 속하는 것일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아닙니다. 돌발사고가 아닙니다. 사실상 타살에 가깝다는 게 대체적인 평가입니다.
특히 핵심 피의자인 임성근 전 해병대 1사단장이 구명조끼도 입지 않은 해병대 장병들이 급류로 들어가는 상황을 보면서도 이를 방치한 정황은 차고 넘칩니다. 현장에 있는 간부급 부하 직원들과의 SNS 대화, 생존 장병 등 증언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군 장갑차조차 단 5분을 버티지 못하고 나온 그 빠른 강물 속으로 장병들이 무방비로 들어간 겁니다.
이런 기본 수칙도 지키지 않고 구조 활동을 강행했고, 앞길이 구만리인 20살 채상병이 숨졌습니다. 사고가 아닌 타살이란 말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항명죄' 재판장에 선 박정훈 대령…수사 외압 진실은
해병대 채상병 순직 사건 수사 이첩 관련 항명 및 상관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된 박정훈 전 해병대 수사단장의 5차 공판이 열린 11일 오전 서울 용산구 국방부 내 중앙지역 군사법원 입구에서 기자회견이 열렸다. 연합뉴스채상병 순직 사건은 단순히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 사건이 권력형 게이트로 확산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초동 조사를 맡았던 박 대령, 전 해병대 수사단장에 대한 항명죄 논란입니다. 초동조사를 맡은 박 대령은 당시 무리한 수색을 지시한 임 전 사단장 등 8명을 과실치사 혐의로 적시했습니다.
이 전 장관은 박 대령의 초동 조사 결과를 칭찬하며 흔쾌히 서명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7월 31일 오전 11시 50분쯤 어디선가 걸려온 전화를 받고 갑자기 태세를 바꿉니다. 원칙대로 수사 후 경찰로 기록을 넘기는, 다시 말해 사건 이첩을 중단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박 대령은 수사 외압이라고 맞서면서 논란이 커졌고, 박 대령은 자신이 그토록 존경했던 김계환 해병대 사령관과도 갈등을 빚게 됩니다.
개정된 군사법원법에 따른 원칙대로 조사 결과를 경찰로 넘긴 박 대령은 상부 지시를 어겼다는 이유로 항명죄로 기소돼 지금도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경찰로 넘긴 조사기록도 결국 국방부가 다시 찾아옵니다. 국방부 조사본부가 그로부터 얼마 후 공개한 재조사 결과에서 임성근 전 사단장은 과실치사혐의자 8명에서 빠졌습니다.
이 모든 게 과연 우연이었을까요?
이번 사안은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이해하기엔 다소 복잡한 사건입니다. 국방부 장관, 법무관리관, 사령관, 부사령관, 안보실장, 국방비서관 등 처음 듣는 직함들이 기사에 쏟아집니다. 조사 기록을 두고 7월 30일, 31일, 8월 2일 등 수많은 날짜들이 언급되기 때문에 단번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같은 사건을 파헤치는 게 직업인 기자인 저조차 사안을 정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습니다.
박정훈 대령 모친 김봉순씨와 인터뷰 장면통화는 했지만 용건은 다른 사안이었다?…바뀌는 진술들
실체적 진실을 밝히기 위해 사건의 구체적인 전말을 보도하는 기사는 물론 필요합니다. 다만 당사자가 아닌 외부인들이 복잡한 부분까지 외우고 다닐 순 없습니다. 그런 분들께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한 가지만 주목하시면 됩니다.
과연 지금 누가 말을 바꾸고 있는지,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이것만 보면 됩니다.
말을 바꾸는 건 사실상 과거에 거짓말을 했단 점을 인정하는 겁니다. 사건 당시인 지난해 7월부터 8월까지 용산 대통령실 안보실과 전화 통화는 단 1차례에 불과했다고 국회에서 답변했던 김 사령관은 실제론 16차례나 통화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윤 대통령과 통화는 없었다던 이 전 장관 또한 8월 2일 당일에만 3차례나 통화한 사실이 공개됐습니다.
국회 국방위 여당 간사였던 신원식 국방부 장관은 지난해 8월 21일 회의에서 이 전 장관과 통화 여부에 대해 "이 전 장관의 판단이나 엄정한 수사에 혹시라도 여당 간사가 전화를 하는 것이 아는 척하는 것이 방해가 될까 봐 (8월 11일까지는 통화를) 안 했다"고 했습니다. 거짓말이었습니다. 통화 기록 조회 결과 지난해 8월 1일부터 8일까지 두 사람은 13차례나 통화했습니다. 통화한 기록이 드러나자, 이제는 '채상병 사건이 아닌 다른 국방 현안으로 통화한 것'이라고 신 장관은 둘러댔습니다.
반면 박 대령은 일관된 진술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건 초기 군 검찰 측은 구속영장 청구서에서 박 대령이 진술한 'VIP 격노설'에 대해 "망상에 불과하다"고 강도 높게 비난했습니다. 지금까지 박 대령의 진술 중에는 통화 기록과 같은 결정적이 사안에서 거짓으로 드러난 건 없습니다.
말을 바꾸는 자가 범인이다
이종섭 전 장관. 박종민 기자누가 말을 바꾸고 있고, 누가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까.
끈질기게 이번 사건을 취재하며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윤 대통령은 왜 굳이 총선을 한 달 앞둔 3월 초에 이 전 장관을 호주대사로 임명했을까요. 정무적으로 고려해도 총선이 끝나고 임명하는 게 여당 측에 더 유리한데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요. 21대 국회에서 특검은 좌절됐지만, 22대 국회에서 다시 발의됐습니다.
진실을 숨기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국가의 부름 받고 나라를 지키기 위해 해병대에 입대한 한 장병이 실종자 수색 도중 목숨을 잃었습니다. 억울한 죽음이 없도록 원칙대로 사건을 조사한 군인은 항명죄로 재판을 받고 있고, 핵심 피의자들 중에는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도 있고, 도망치듯 호주로 나갔다가 여론에 떠밀려 귀국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건을 맡은 수사 기관은 사건 발생 후 8개월 동안 잠잠하더니 특검 이야기가 나오자 부랴부랴 수사에 속도를 내고 있습니다. 채상병 순직과 수사 외압 의혹의 진실은 무엇일까요. 질문하는 기자는 이 질문의 해답을 찾을 때까지 여러분과 끝까지 함께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