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철조망이 설치돼 있으니 넘어가지 마시오.'
16일 경기 동두천시 상봉암동에 위치한 '동두천시 옛 성병관리소' 입구에는 철제 펜스와 철조망이 쳐져 있었다. 언덕에 오르니 울타리 넘어 군데군데 페인트칠이 벗겨진 2층짜리 회색 성병관리소 건물이 보였다.
2300평에 달하는 성병관리소 부지에는 어린아이 키만큼 자라난 풀이 무성했다. 관리소로 향하는 입구에 있는 잡초는 건물 1층 창문을 가릴 정도였다. 긴 세월 동안 건물이 관리되지 않고 방치됐다는 걸 가늠하게 했다.
지난 16일 찾은 경기 동두천시에 있는 옛 성병관리소 건물. 주보배 기자동두천 성병관리소는 1970~80년대 국가가 운영하던 성병 낙검자(검사 탈락자) 수용소다. 군사독재 시절, 국가는 미군기지 인근에 기지촌을 조성해 성매매를 독려하고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을 관리했다. 성병관리소에는 '캠프 케이시' 등 미군 기지촌에서 일하는 여성 중 성병 검사를 통과하지 못한 이들이 강제 격리·수용됐다.
동두천시는 성병관리소 부지가 포함된 소요산 일대에 '관광지 확대 개발 사업'을 하기 위해 관리소 건물을 철거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시민단체는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기억을 담고 있는 성병관리소를 "역사적으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법원은 2022년 9월 미군을 상대로 성매매에 종사한 여성 95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피해 여성들이 2014년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청구한 지 8년만의 결과였다.
2심 판결을 맡은 서울고등법원은 기지촌 성매매 운영, 관리, 정당화 과정에 국가가 개입했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 국가가 조직적·폭력적인 방식으로 성병을 관리했다는 원고의 주장도 일부 수용했다. 이 '조직적·폭력적 성병 관리'에 활용된 것이 바로 성병관리소였다.
2심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완치 판정을 받을 때까지 수용소(성병관리소)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탈출을 시도하다가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치료 과정에서) 페니실린 쇼크로 인한 부작용에 시달리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적시했다.
성병관리소 내부 모습. 경기북부평화시민행동 최희신 활동가 제공동두천 옛 성병관리소 철거 저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동대책위원회) 고경환 활동가는 성병관리소 건물 내부가 군대 내무반과 유사한 구조라고 기억했다.
"직사각형 형태로 7개의 방이 있었고 한 방에 최대 20명씩 총 140명 정도 수용 가능했어요. 창문이 모두 쇠창살로 이뤄진 건 수용자들이 쉽게 도망갈 수 없도록 설계된 거겠죠."
성병관리소는 1973부터 운영되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사실상 운영이 중단됐고 1996년에 폐쇄됐다. 이후 학교법인 신흥학원이 건물과 부지를 소유하고 있다가 동두천시가 지난해 2월 29억 원에 매입해 관광지 확대 개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시민단체들은 이에 반대해 지난 12일 공동대책위원회를 발족하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공동대책위원회는 "성병관리소 건물은 한국 근현대사의 아픈 과거를 보여주는 상징적 공간으로, 지워야 할 역사가 아닌 우리 공동체가 성찰하고 반성해야 할 역사"라며 "그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공간은 역사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높다"고 밝혔다.
성병관리소가 운영되던 시절의 모습. 동두천시청 자료사진
반면 시는 철거 계획에 변함이 없다는 입장이다. 동두천시는 지난 14일 '소요산 관광지 확대 개발 사업' 준공식을 개최했다. 오는 9월 동두천시의회에서는 성병관리소 철거비용 2억 2천만 원을 포함한 제2차 추경 예산안을 심의할 예정이다.
동두천시 관계자는 이날 CBS노컷뉴스와의 통화에서 "성병관리소를 철거하고 호텔, 사우나 등으로 개발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 다만 확정된 사항은 아니지만 (피해 여성들을 위한) 기념비를 세우는 것을 검토 중이다"며 "철거는 올해 안에 진행될 예정"이라고 밝혔다.
풀숲이 우거진 성병관리소를 뒤로 하며 고경환 활동가는 이렇게 말했다.
"성병관리소는 전쟁과 분단 속에서 국가가 여성을 희생 시킨 인권 침해가 이뤄진 공간입니다. 현재 남은 성병관리소는 동두천이 유일해요. 평택, 파주, 고양, 의정부 등의 성병관리소, 성병진료소는 모두 사라지고 없죠. 슬픈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이 곳 만큼은 일부라도, 보존하는 게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