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삼성전자를 둘러싼 '위기론'이 잦아들지 않고 있다. 시장 전망치를 밑도는 영업이익과 1년 7개월만에 5만원대로 추락한 주가 등 숫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삼성전자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기술 초격차'와 근간이 된 '치열함'이 사라지고 있는 상황 등 더 나은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이 공통적으로 나오고 있는 가운데 전근대적인 거버넌스가 이런 상황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어닝 쇼크' 후 주가 5만원대로 주저앉아…"주가=펀더멘탈 아니"라지만
13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 3분기 매출액 79조원(연결기준), 영업이익 9조1언억원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전 준비 대비 매출은 6.66% 올랐지만 영업이익은 12.84% 하락했고, 시장 전망치였던 10조7천억원(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과 비교하면 10% 넘게 낮은 '어닝 쇼크'였다.
사업부별 '성적표'가 공개되진 않았지만 시장에서는 영업이익 악화의 원인이 반도체 사업에 있다고 봤다. 증권가에서는 반도체 부문 영업이익을 당초 5조3천억원 수준에서 4조원 안팎으로 수정했다.
잠정실적 발표 직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 수장인 전영현 DS(디바이스솔루션)부문장(부회장)은 "시장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로 걱정을 끼쳐 고객, 투자자, 임직원에게 송구하다"고 이례적인 '반성문'을 썼지만 삼성전자 주가는 1년 7개월만에 5만원대로 주저앉았다.
삼성전자 내부에선 '주가는 펀더멘탈(재무 상태나 경영 전략 등 기업의 기초 체력)에 직접 영향을 주지 않고 실적이 좋았을 때도 주가가 반등하진 않았다'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하지만 시장에선 '반도체 겨울론'이 불식된 가운데 삼성전자에만 부는 '나홀로 한파'를 무겁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다.
경영 판단 착오 명백해도 책임지는 사람은 없어
시장에서는 삼성전자 위기론의 근원 중 하나로 '글로벌 기업'에 어울리지 않는 전근대적인 거버넌스를 꼽는다.
글로벌 빅테크와 대만 TSMC 등 삼성전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전문경영자들이 경영에 대한 판단을 하더라도 경영에 관한 주요 의사결정은 이사회에서 이뤄진다. 반면 삼성전자의 이사회에서 실질적인 경영 판단이 이뤄진다고 평가하는 인사들은 거의 없다.
삼성증권 리서치센터장과 JP모건, 메릴린치, 노무라증권 등을 거친 연세대 이남우 교수는 "기업은 의사결정 권한과 책임이 제일 중요하다"며 "삼성은 이재용 회장이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시장에서 나온다"며 "이 회장이 중요 의사결정을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면 이사회가 대표이사 선임이나 큰 의사 결정을 하는 등 제 기능을 해야 하는데 그것도 아닌 것처럼 보여서 시장에선 의사결정 매커니즘의 투명성이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미국 상장 기업에서 경영진이 산업 동향을 제대로 읽지 못했거나 조직 문화가 망가졌다면 이사회에서 경영진에 책임을 물었을 텐데 삼성전자는 의사결정 과정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에 결과에 대한 책임을 묻는 과정도 제대로 되지 못하는 것이 핵심적인 문제"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실적 부진이 대표적인 예로 꼽힌다. 한국CXO연구소 오일선 소장은 "지난해 삼성전자는 '삼성전자가 받아서는 안 되는 성적표'를 받았고, 전문경영인 중 당연히 옷을 벗는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며 "올해 5월 반도체 수장 '원 포인트'로 바꿨지만 시장엔 '옛날 그 삼성이 아니'라는 인상을 줬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챗GPT 등 생성형 AI(인공지능) 열풍으로 데이터 처리 속도를 극대화한 HBM(고대역폭메모리)이 반도체 산업의 핵심 제품으로 부상한 가운데 HBM 기술을 일찌감치 확보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글로벌 메모리 반도체 기업 중 가장 빠르게 메모리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삼성전자는 2016년 세계 최초로 HPC(고성능컴퓨팅)향 HBM 사업화를 시작했지만, 시장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전인 2019년 HBM 투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을 가진 경영진의 판단으로 전담팀을 해체하면서 아직도 SK하이닉스에 뺏긴 주도권을 찾아오지 못하고 있다.
익명을 원한 한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HBM 주도권 회복을 외친 후에도 이렇다 할 성과가 나오지 않는 상황인데 경영 판단을 주도한 조직을 포함해 아무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고 꼬집었다.
이사회 구성원의 질 높이고 실질적 의사 결정 하게 해야
연합뉴스삼성전자를 둘러싼 실타래를 푸는 것은 의사결정 구조의 질을 높이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목소리에 무게가 실린다. 글로벌 기업 위상에 걸맞게 글로벌 기업 다운 의사결정 구조, 이사회에서 중요 경영 판단이 이뤄지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경영진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의 경쟁사인 대만 TSMC의 이사회 구성이 비교 사례로 거론된다.
TSMC는 등기이사 10명 중 1명을 빼면 모두 사외이고, 이들 중 다수가 글로벌 반도체 거물들이다.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회사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의 CEO를 역임했던 마이클 스플린터와 모셰 가브리엘로브 전 자일링스 CEO, 얀시 하이 전 델타일렉트론 이사회 의장, 라펠 리프 전 MIT 총장, 피터 본필드 전 BT그룹 CEO 등 대만 내국 출신 법률 전문가 1명을 제외하면 모두가 외국인이다.
반면 삼성전자는 등기이사 10명 모두가 한국인이다. 4명이 사내이사, 6명이 사외이사인데 사외이사는 관료·금융인·교수 등 '기술 전문가'로 분류되기에는 거리가 있는 인사들이다.
이남우 교수는 "TSMC는 이사회에서 경영 전략을 다듬고 실수를 줄일 수 있는 시스템을 갖고 있지만 삼성전자는 경영진이 전근대적인 경영 판단을 하더라도 뼈 아픈 잔소리를 할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지적했다.
다만 이런 지적에 대해 삼성전자 내부에선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사업만 하는 TSMC와 파운드리를 포함해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는 삼성전자를 단순 비교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글로벌 기술 전문가를 사외이사를 사외이사로 영입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일이 아니라는 소리도 나온다.
전영현 부회장이 DS부문에 대한 대대적인 쇄신을 예고한만큼 연말 이뤄질 것으로 전망되는 조직 및 사업 개편과 인적쇄신, 삼성전자의 수장인 이재용 회장의 행보가 시장의 신뢰 회복을 결정할 가늠자가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리더스인텍스 박주근 대표는 "삼성의 큰 문제는 방향성을 잃어버린 것"이라며 "그때그때 대응하는 조직이 아니라 누군가 구체적인 방향성을 제시하고 구성원들을 끌어가야 한다. 이재용 회장의 리더십과 적극적인 방향 제시가 중요한 때"라고 말했다.